아름다운 인연

든든한 동지이자 후원자 이혜련과 안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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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형목(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안창호의 아내로 널리 알려진 이혜련은 남편의 후원자를 자처하며 미주지역 여성독립운동을 이끈 주인공이다. 그는 독립운동가의 아내이자 동지 나아가 한 가정의 가장까지 도맡으며 고단한 삶을 이어갔다. 누구의 ‘아내’가 아닌 조국 독립을 위해 앞장선 ‘독립운동가’ 이혜련의 활약에 주목해본다.


부부가 되어 힘을 합치다

이혜련(李惠鍊)은 1884년 4월 21일 평안남도 강서군 보림면 화학리에서 이석관(李錫觀)의 2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도산(島山) 안창호(安昌鎬)는 1878년 11월 9일 강서군 초리면 봉상도(일명 도롱섬)에서 안흥국(安興國)과 황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아버지가 사망하여 할아버지의 보살핌 속에서 성장한 그는 한학을 공부하였다. 이후 상경한 도산은 구세학당에 입학하여 근대교육을 받았다. 그는 1897년 할아버지가 정해준 약혼자 혜련과 여동생 안신호를 데리고 서울로 가서 정신여학교에 입학시켰고 이후 고향 인근에 점진학교를 운영하는 등 근대교육 보급과 민중 계몽에 나섰다.           

혜련이 정신여학교를 졸업하자 두 사람은 1902년 9월 3일 밀러(F.S. Miller) 목사의 주례로 제중원에서 결혼하였고, 다음날 부부는 인천을 출발하여 미국으로 장도에 올랐다. 이는 부부로서는 한국 최초 미국 이민이었다. 하지만 혜련은 광복을 맞을 때까지 고국 땅을 밟을 수 없었다. 혜련의 본관은 안성(安城)이나, 미국식 호칭방식에 따라 안혜련·헬렌 안(Helen Ahn)·이헬렌 등의 이름을 사용하였다. 어려운 미국생활에서 한인 단결의 절실함을 느낀 도산은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인친목회’를 결성한 후 리버사이드에서 ‘노동주선소’를 조직하였다. 1905년에는 공립협회와 1907년에는 대한신민회 등을 결성하는 등 오로지 조국 독립을 위해 매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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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련, 안창호 부부의 가족사진


남편의 후원자를 자처하다

미주에 정착한 도산은 공립협회를 결성하고 초대회장으로 취임하여 한인사회의 각성과 대동단결에 전력을 기울였다. 기관지 『공립신보』 발행은 이러한 목적을 관철하려는 일환이었다. 도산이 미주와 중국·러시아 등지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전개할 때 혜련은 공립협회와 이를 계승한 대한인신민회를 지원하였다. 당시 일과 학업을 병행한 혜련은 도산의 많은 지지자와 동지 등을 대접하는 일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었기에 학업을 중단하고 말았다. 이때부터 혜련의 ‘내조’는 독립운동 참여를 알리는 신호탄이나 마찬가지였다.       

미주에서 한인사회의 구심체를 마련한 도산은 대한인신민회 통상장정과 취지서를 가지고 1907년 2월 고국으로 돌아갔다. 당시 혜련은 “당신은 애국자요 영걸의 인물로서 국가에 속한 사람이니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일할 수 있는 대로 마음 놓고 활동하시오.”라며 용기를 주었다. 이후 도산은 이갑 등 옛 동지들과 대한제국기 최대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하였고, 이어 평양에 민족교육기관인 대성학교와 민족기업을 설립하였다. 또한 서북학회와 청년학우회를 창립하는 등 한민족 정체성과 자긍심을 일깨우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혜련은 남편이 없는 미주에서 독립운동단체를 유지하는 동시에 한인사회를 지도하였다. 대한인국민회를 후원하기 위해 의연금·국민의무금·특별의연금 등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였다. 가족 생계비는 물론 나아가 독립운동을 하는 남편을 지원하는 것도 혜련의 몫이었다. 그는 백인 집의 청소, 빨래, 요리 등 집안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고 첫째 안필립과 함께 과일가게를 운영하며 가사를 책임졌다. 당시 도산은 억척스러운 아내의 삶을 위로하며 편지를 보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항상 몸이 나라 일에 매여서 가사를 돌보지 못함으로 식구가 오랫동안 헤어져 있는 것도 염려하거니와 내가 스스로 집을 위하여 돈을 벌지 못함으로 장차 아이들 교육할 힘이 없을까 염려하나이다. 우리가 한때 세상에 나서 나라를 위하여 고생하고 죽는 것은 조금도 염려할 것 없거니와 하느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어린 자식을 교육하지 못하면 또 직책을 잃음이라. 장차 무슨 재정으로 아이를 키울지 염려함을 마지아니하나이다. 하여간 그대는 크게 주의하여 아이 듣는 데는 해로운 말도 말고 어떻게 하면 양심을 잘 기를까? 몸이 강건하여 마음이 유익하고 몸에 유리하도록 잘 기르시오.”


도산은 남편과 아버지로서 ‘자기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미안함을 토로한 것이다. 이는 당시 독립운동가들 대부분이 공유하는 인식이리라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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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련(1913)(좌) / 이혜련과 첫째 안필립(1907)(우)

한인사회에 횃불을 밝히다

1913년 도산은 로스앤젤레스에서 ‘흥사단’을 창립하였다. 부부는 흥사단의 일은 물론 가정도 소홀하지 않으려 단소 건물 1층 한구석에 가족이 머물 공간을 마련하였다. 혜련은 매일같이 드나드는 손님과 동지들의 식비 마련을 위해 밤낮으로 청소하고, 세탁하고, 바느질하고, 요리하여 돈을 벌어야 했다. 뛰어난 음식 솜씨와 바느질 솜씨로 일감을 얻어 남편의 든든한 후원자를 자처하였다. 부부는 생활의 곤궁함에도 한국 고유문화를 간직하고 2세들의 민족정체성 유지에 노력하였다. 한인 자녀들에게 한글을 잊지 않도록 곳곳에 한글강습소를 운영하였다. 흥사단과 대한인국민회는 각 지방회마다 국어교육을 의무교육으로 정하고, 『초등국민독본』과 『국어독본』 등의 책자 발행·보급에 앞장섰다. 한글과 한국사는 한인들의 자긍심을 일깨우는 원천으로 인식·실천하였다.

한편 혜련은 도산의 동지 이갑이 러시아에서 중병으로 고생 할 때에는 미국 초빙을 주선하였다. 이마저 여의치 않자 시베리아에서 치료받게 하는 등 1천 달러를 보내주기도 하였다. 삯바느질과 빨래를 하며 틈틈이 모은 돈을 남편의 동지를 위해 담대하게 내놓은 것이다. 돈을 받은 이갑은 감사함에 소리 내어 울었다고 한다. 1917년 도산은 멕시코 교민사회를 방문하여 한인들이 거주하는 곳곳을 돌면서 각종 악습 폐지, 한인회관 건축, 국어학교 설립, 경찰소 조직, 실업회사 설립 등 한인들 권익옹호에 나섰다. 멕시코에서 돌아온 그는 국내 3·1운동 소식을 들었다.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이었던 그는 희소식을 미주와 멕시코 한인사회에 널리 알렸다.       

로스앤젤레스에서 부인친애회를 조직한 혜련은 독립의연금 모금에 솔선수범하였다. 후일 미주의 여성단체가 통합된 후에는 대한여자애국단 로스앤젤레스지부에서 국민 의무금, 국민회 보조금, 특별 의연금 등의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미국 적십자사 로스앤젤레스 지부 회원으로서 전시 지원 활동을 펼치며, 재미한인사회의 ‘대모’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1926년 도산이 다시 상하이로 떠나며 남긴 송별사에서 “나는 평생을 통해 당신에게 치마 한 감, 저고리 한 채를 사줘 보지도 못한 부족한 남편이요.(중략) 나는 너희들이 소학에 다니고 중학을 졸업하는 동안에도 연필 한 자루 공책 한 권 사줘 본 적이 없는 부족한 애비다.”라고 전하며 당시 참석한 모든 이들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남편 대신 5남매를 키우며 살아온 혜련의 억척같은 삶이 눈에 선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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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한인사회 순방할 당시 안창호(1918)


한국독립운동 사료를 정리하다

윤봉길의 훙커우 의거로 상하이에서 체포된 도산은 국내로 송환되어 서대문감옥과 대전감옥에 수감되었다. 1937년에는 일제가 ‘수양동우회 사건’을 조작하여 도산을 다시 체포하였다. 하지만 조국 독립을 향한 그의 열정은 굳건하였다. 중일전쟁 때 부상병 돕기 운동, 일화배척운동, 광복군 후원금 보내기 운동 등을 통해 대일항전에 앞장섰지만, 1938년 고문 후유증으로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혜련이 속한 대한여자애국단은 중일전쟁에 즈음하여 재난민과 부상병 등을 돕기 위하여 약품과 붕대 등을 모집하였다. 또한 중국군에게 겨울옷을 보내기 위한 난민 구제 의연금을 모집하여 쑹메이링(宋美齡)에게 보냈다. 더불어 일화배척운동에도 열성적으로 참가하였다. 1940년 중국에서 한국광복군 창설 소식이 전해오자 대한여자애국단은 1940년 10월 총부 임원회를 개최하여 광복군 후원금 500달러를 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 앞으로 송금하였다. 

한편 혜련은 고단한 삶 가운데에서도 도산과 관련된 신문기사·메모지·편지·저작·연설문·사진·기차표·뱃표·여권 등을 모으고 정리하였다. 이러한 사료의 중요성을 인지한 그는 특히 남편의 편지를 보물처럼 여겼다. 그는 남편뿐만 아니라 다른 독립운동가의 유물도 소중하게 여겼다. 이에 김구 주석은 1942년 혜련에게 태극기 보관을 부탁하기도 하였다. 이후 독립운동에 관한 사료와 유물 등을 독립기념관에 기증하며 독립운동은 물론 미주 한인사회의 생활상 복원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도산과 함께 안장되다

1946년 1월 6일 혜련은 대한인국민회 총회관에서 열린 신년도 첫 총회임원회에서 대한여자애국단 제6대 총단장에 선출되었다. 쿠바에 거주하는 동포들이 노동정지를 당하고 극심한 생활난으로 구제를 요청해오자 각 지부별 구제금 모금에 나서 121달러를 지원하였다. 6·25전쟁 동안에도 적십자와 피난민을 돕기 위해 한국구제회(Korea Relief Society)를 조직하였다. 그는 전쟁 중에 있는 고국으로 옷가지·약품·담요 등의 갖가지 구호품을 보냈다.      

1962년 정부는 도산에게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하였다. 1963년 혜련은 61년만에 고국을 방문하여 남편의 훈장을 전달받았고, 1969년 4월 21일 86세의 생일날에 사망하고 말았다. 1973년 11월 10일에는 도산 탄생 95주년과 흥사단 창당 60주년을 맞아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 도산공원이 조성·개관하였다. 이에 혜련의 유해는 망우리 묘소에서 이장한 도산의 유해와 함께 공원 내 묘지에 안장되었다. 2008년 정부는 그의 공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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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의 건국공로훈장을 전달받는 이혜련(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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