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립운동가

신민회 일원으로 애국 계몽운동에 헌신한 안태국

이달의 독립운동가<BR />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


신민회 평안남도 총감으로서 애국계몽운동에 힘쓰다

안태국은 1877년 평안남도 중화군에서 태어나 청년기에 평양으로 이주, 상회를 운영하며 기독교를 접하고 개화사상을 형성하였다. 1907년 2월 안창호, 양기탁 등이 주축이 되어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 단체로 신민회가 창립된 후 안창호의 권유로 9월경 창립회원으로 가입하고, 평안남도 지역 신민회를 이끄는 총감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신민회 해산때까지 평안남도 총감뿐 아니라 서우학회 등에 가입해 계몽강연에 참여하고 신민회의 기관지 역할을 하는 대한매일신보 평양지사장, 태극서관 주임, 대성학교 후원회장격인 찬무원, 청년학우회 중앙총무 역할 등 신민회 활동에 적극 동참하며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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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서관 광고,『황성신문』(1908.07.31.)_대한민국신문아카이브 제공


신민회의 주요 간부로 여러 차례 옥고를 치르다

1909년 10월 안중근 의거 후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자 신민회는 총감독 양기탁의 집에서 전국 간부회의를 열고 국외 독립군 기지 건설을 계획하였다. 평안남도 총감인 안태국은 1910년 12월 간부회의 참석 후 평양으로 돌아와 군자금과 이주민 모집을 실행하였다. 그러던 중 일제가 ‘안명근 사건’*을 구실로 신민회 간부를 체포하면서 안태국도 붙잡혀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신민회의 존재를 알게 된 일제가 이른바 ‘데라우치 총독 암살음모 사건’**을 조작하고 전국의 신민회 인사 600~700명을 체포하였다. 당시 옥중에 있던 안태국도 신민회 회원으로 지목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 그는 일제의 사건 날조를 폭로하였으나 결국 6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이어나가야 했다. 


*안명근 사건

안중근의 사촌동생인 안명근이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황해도 신천에서 붙잡히자 일제가 이를 조작하여 황해도 일대 민족운동가 160여 명을 체포한 사건(이른바 ‘안악사건’)


**데라우치 총독 암살음모 사건

안명근의 군자금 모금 활동을 ‘데라우치 총독 암살 모의’로 날조하여 

신민회 회원 105명을 집단으로 기소한 사건(이른바 ‘105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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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 一派 또 압송」,『매일신보』(1911.04.15.)_대한민국신문아카이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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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경찰에 의해 압송되는 신민회 회원들(1911)(좌) / 안태국 변호인이 제출한 입증신청서(1912.12.18.)_국사편찬위원회 제공(우)


국외 한인의 상황을 살피며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투옥 5년 만인 1915년 감옥에서 풀려난 안태국은 고문으로 상한 몸을 추스른 후 1916년 가족들과 함께 중국 북간도 훈춘(琿春)으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그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훈춘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는 한편, 동지들과 한민회를 결성하고 ‘한민회군’이라는 이름의 독립군을 창설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안창호의 초청을 받아 1920년 3월 상하이에 도착한 그는 러시아령 연해주 동포들과 독립운동 상황을 임시정부에 보고하였다. 임시정부 내 요직을 고사한 안태국은 동포들을 대동단결시켜 독립운동 발전에 헌신할 뜻을 밝히고 특파원으로 파견될 예정이었으나 장티푸스에 걸려 1920년 4월 서거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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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국 선생의 長逝」,『독립신문』(1920.04.13.)_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좌) / 안태국 빈소(1920.04.11.)(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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