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산책

멕시코 공화국의 기초를 놓은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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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최해성(고려대학교 스페인·라틴아메리카연구소 연구교수)

 

멕시코 ‘독립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미겔 이달고의 민중저항은 식민통치의 악습 폐지를 외쳤으나 ‘독립’ 요구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처음으로 멕시코라는 국명을 사용해 독립을 선언하고 헌법 제정을 시도한 사람은 이달고의 제자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였다. 국민주권과 대의제에 기초한 공화국 멕시코의 탄생은 모렐로스가 지휘한 독립운동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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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초아칸대학에 세워진 모렐로스 동상

멕시코 독립운동을 이끈 스승과 제자

2019년 멕시코 중앙은행은 새로운 도안의 화폐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화폐 디자인이 바뀔 때마다 그 안에 담길 인물에도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화폐 도안에서 한 번도 제외된 적이 없는 인물들이 있었으니, 이달고와 모렐로스이다. 스승 이달고가 점화한 독립운동의 작은 불꽃은 제자 모렐로스에 의해 거대한 횃불로 타올랐다.         

일반적으로 라틴아메리카의 독립을 다룰 때는 대부분의 국가들이 비슷한 과정을 거쳐 독립을 달성했으리라 여기기 쉽다. 그러나 시몬 볼리바르와 산 마르틴을 중심으로 한 치열한 전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한 남미의 국가들과 달리 멕시코는 복잡한 과정을 걸쳐, 마지막에는 스페인군과 반란군의 지휘관이 협정을 통해 독립을 완성했다. 남미지역의 독립전쟁이 처음부터 크리오요(아메리카 대륙에서 태어난 백인 계층)를 중심으로 전개됐다면, 멕시코의 독립운동은 1810년 농민·노동자 등이 중심이 된 대중봉기를 통해 발화되었다.            

이후 멕시코는 1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여러 단계를 거치며 독립의 결실을 거두게 된다. 대체로 멕시코의 독립과정은 4단계로 구분한다. 이달고가 이끈 대중봉기의 시기(1810년 9월~1811년 7월), 이달고의 처형 이후 모렐로스에 의해 추진된 조직적인 독립전쟁과 제도화 시기(1811년 7월~1815년 12월), 모렐로스의 처형 이후 산발적으로 전개된 독립운동 시기, 끝으로 1821년 반란군 지도자와 스페인 장교가 합의를 통해 실질적인 독립을 이루는 시기로 나눈다. 독립의 기운을 싹트게 했다는 의미에서 이달고의 선구적 행동에 주목이 집중되고 있지만, 전투성과 면에서나 독립운동의 체계화 면에서 더욱 큰 의미를 지닌 단계는 모렐로스가 이끈 제2기였다.


국민주권의 기초를 놓다

1810년 9월 멕시코 중북부의 작은 도시 돌로레스에서 대중봉기를 일으킨 이달고는 추후 합류한 모렐로스를 설득하여 멕시코 남부 항구도시 아카풀코 점령의 책무를 맡긴다. 20여 명의 병사들과 남하하기 시작한 모렐로스는 ‘게릴라 전’을 통해 스페인군에 타격을 입히는 동시에 새로운 세력을 규합하여 아카풀코에 근접하였을 때에는 700명이 넘는 병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전술적으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모렐로스는 이달고의 처형 이후 독립운동의 지도자로 부상한다.         

독립운동의 제도화와 정치적 구심점의 필요성을 느낀 그는 ‘아메리카 최고 국민위원회’ 등 독립 열망을 하나로 모을 기구들을 구성하고 헌법의 기초가 될 사상을 담금질한다. 1812년 칠판싱고(Chilpancingo)에서 개최된 의회에서 모렐로스는 「국민의 감정(Sentimiento de la Nacion)」이라는 제목의 유명한 선언문을 낭독한다. 선언문에서 그는 아메리카의 독립을 천명하고 주권은 민중에게서 직접 나온다는 획기적인 사상을 정립하였다. 이러한 정신을 토대로 1814년 멕시코 역사상 최초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 아파칭간(Apatzingan) 헌법을 제정했다. 비록 현실에 적용되지는 못했지만, 민중 주권의 개념을 도입한 이 헌법은 대의제를 바탕으로한 멕시코 공화국의 기초를 놓았다고 할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1821년 멕시코가 실질적인 독립을 달성하였을 때 채택한 정체(政體)는 입헌군주제였다. 그러나 이 체제는 오래가지 못했다. 불과 3년 뒤 민중 주권의 열망은 군주제를 무너뜨리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공화제를 수립하였다.       

앞서 언급한 칠판싱고 의회에서 모렐로스는 총사령관에 추대되었으나 계속 직위를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수락하였다. 그는 자신에게 붙여지는 칭호가 부담스러워 ‘국민의 충복(Siervo de la Nacion)’이라는 별칭을 붙여 달라고 요청했다. 이후에도 모렐로스는 계속하여 군사작전을 지휘하였으나 1815년 11월 스페인군에게 패배한 후 체포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라틴아메리카 독립의 완성

오늘날 라틴아메리카의 역사 서술은 무엇보다 독립이 식민체제의 신분적 위계질서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특히 소수의 백인 지배층과 다수의 원주민, 아프리카계 예속민 사이의 관계에 독립이 어떤 충격을 가했는지 검토한다. 식민체제의 신분질서는 독립된 아메리카에서 매우 더딘 과정을 거쳐 극복되었기 때문에 학계의 역사학자들은 ‘독립의 성과가 실망스럽다는 점’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십여 개의 국가가 거의 동시에 수립됨으로써 당시 아메리카 대륙은 미국 독립 과정에서 볼 수 없었던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분명 미국의 독립은 옛 유럽 식민지에 건설된 새로운 공화국이라는 하나의 본보기가 되었고 아메리카 대륙의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고무시켰다. 그러나 단 하나의 사건이 세계적 조류(潮流)를 형성하기는 어려웠다. 반면, 한 세대가 지난 뒤 아메리카 지역에 대거 수립된 국민국가들은 하나의 큰 흐름을 만들었고 미래의 비식민화를 위한 원형(原型)을 제시했다. 20세기 중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유럽의 식민통치가 종식되었을 때, 라틴아메리카의 성공적인 비식민화는 계속된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미 세계사에서 기정사실로 인정된 상태였다. 아메리카인들의 성공은 20세기 후반에 급격히 증가한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신생 국가들에도 입헌 공화주의 유형이 통용될 수 있다는 점을 보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모렐로스가 기초를 놓은 멕시코 공화제는 라틴아메리카 공화주의의 완성을 가져왔고,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세계적인 공화주의의 흐름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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