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광복회, 더 큰 자리매김을 바라며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BR />

글 이계형(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대한민국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유족들이 구성한 단체로 ‘민족정기 선양 및 회원간 친목’을 목적으로 한 광복회는 높은 윤리와 도덕성을 바탕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최근 광복회의 논란을 보며 그동안의 역사를 회고하고 새 출발을 바라는 마음에서 몇 가지 제안하고자 한다. 


첫발을 내딛다

1962년 삼일절을 맞아 처음으로 독립유공자 204명에게 건국훈장을 서훈하고 같은 해 4월 ‘독립유공자 및 월남귀순자 특별원호법’이 제정되었다. 이어 1963년 삼일절에 744명이 건국훈장·대통령표창을 받으면서 이를 계기로 1964년 4월 상호단합과 친목도모를 위해 중구 을지로 2가에 광복구락부가 조직됐다. 그 후 민족대표33인유족회·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등 독립유공자·유족을 모아 사단법인 광복회가 1965년 2월 탄생했다. 이때 초대 회장은 33인유족회를 이끌던 이갑성이 맡아 여러 독립유공자 단체를 하나로 통합했다. 다만 화학적으로 결합하지 못하고 물리적 통합에 그친 것이 분란의 씨앗이 되고 말았다. 1966년 4월 제1차 정기총회에서 정관을 개정하여 회장, 부회장(4명), 이사(20명)와 회원 중에서 선출한 대의원(32명)을 두되, 과반은 독립유공자로 채우기로 했다.      

그러나 내부 분란으로 그해 8월 광복절 행사는 광복회와 그 산하단체인 순국선열유족회가 별도로 치렀다. 급기야 1967년 2월 광복회원 40여 명이 광복회 회장단과 집행부를 불신임하면서 회장이 사표를 제출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런 사달은 연금인상 문제, 독립유공자 처우 문제, ‘순국선열’ 문구누락 등이 원인이었다. 이에 이갑성이 회장으로 재선되었고 정부는 대일청구권 자금을 지원하여 독립유공자·유족에게 생계보조금을 지급하고, 유자녀 장학사업을 시작했고 광복회는 안정을 찾아갔다. 이후 1970년 10월 이화익이 제2대 회장, 1971년 2월 조시원이 제3대 회장에 올랐다. 


논란의 불씨가 되다

1973년 3월 사단법인 광복회가 공법으로 전환하면서 원호처(현 국가보훈처)의 감독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회장 선출 권한을 가진 대의원을 사실상 회장이 임명하는 것으로 광복회 정관이 고쳐지면서 논란의 불씨가 되었다. 1973년 5월 공법으로 전환된 후 처음 열린 정기총회에서 제4대 회장으로 안춘생이, 이어 1976년 5월 제5대 회장으로 박시창이 선출되어 1977년 3월 여의도에 광복회관을 착공했다. 1977년 5월 제6대 회장에 선출된 김홍일은 광복회관 공사를 차질 없이 추진하여 1978년 11월 광복회의 여의도 시대를 열었다. 1979년 6월 제7대 회장에 재선되었지만, 1980년 8월 사망하면서 자동 면직되었다.  

1980년 9월 제8대 회장으로 김상길이, 1984년 9월 제9대 회장으로 유석현이, 이어 1988년 6월 제10대 회장으로 이강훈이 취임했다. 그는 1990년 제11대 회장에 재선되어 4년 동안 많은 일을 해냈고, 19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주의가 꽃을 피우던 시기였던 만큼 임시정부의 역사적 의미를 강화하고자 했다. 이에 독립유공자 훈급 재조정 및 친일척결과 통일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1992년 9월 김승곤이 제12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김영삼 정부의 ‘역사바로세우기’에 맞춰 독립유공자 중 친일파를 가려 수훈을 삭탈토록 했으며, 호주승계인이 없는 독립유공자의 자녀가 연금을 받도록 하여 유족 범위를 넓혔다. 


분란과 파행을 겪다

1996년 5월 문민정부 출범 후 첫 회장 선거를 앞두고 광복회에 분란이 터졌다. 전 회장이 대의원을 선출하는 정관에 불만을 가진 회원들이 정기총회장에 난입하여 서로 멱살을 잡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이에 정관을 개정하기로 하였지만 총회는 이를 상정하지 않은 채 폐회되었고, 이후 가까스로 갈등을 봉합하여 13대를 ‘임시체제’로 꾸리기로 했다. 1996년 9월 권쾌복이 제13대 회장에 선출되었다. 그의 임기는 1년 7개월이었고, 취임 후 7개월 이내에 정관을 개정해야 하는 임무를 떠맡았다. 그러나 임기만료에 맞춰 신임회장 선출과정에서 갈등이 나타났다. 회장단·고문단 연석회의에서 선정한 대의원선출위원 12명 중 7명을 회장 권한으로 바꾸고, 이에 선출된 대의원들이 1998년 5월 권쾌복을 제14대 회장으로 다시 선출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결국 국가보훈처가 선거를 무효로 하고 정상화추진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파행을 겪었다.        

1999년 1월 전국대의원 임시총회에서 윤경빈이 제14대 회장에 선출되었다. 그는 정관을 개정하여 건국포상자·대통령표창자에게 회원자격을 부여했다. 이후 2002년 6월 제15대 회장으로 장철이 선출되었는데, 취임 후 언론매체 인터뷰에서 ‘국민화합을 깨뜨리는 친일파 청산 중단’을 언급하여 사퇴압박을 받았다. 이를 기회로 지명직 대의원들의 간접선거로 회장이 선출되는 비민주적 방식을 지적했다. 광복회원 중에서 대의원 80명을 뽑아 선거하는데, 그중 30명을 현 회장이 임명하였기에 연임 혹은 후임 선정에 유리했다. 이에 회장 직선제 선출방식이 제시되었지만, 현실적으로 각 지부장만이라도 직선으로 선출하자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장철 회장은 6개월 만에 자리에서 물러났고 그러한 제안들은 묻히고 말았다.


변화의 물결이 일다

2003년 2월 제16대 회장으로 선출된 김우전은 독립유공자 복지회관 건립, 영주귀국 독립유공자 정착금 확대 등의 업적을 남겼다. 이어 2005년 6월 김국주가 제17대 회장에 선출되었다. 재임 동안 안동지회를 시작으로 전국에 지회를 설립했고, 그동안 문제점으로 지적된 대의원 선출 방식을 바꿔 회원들이 직접 뽑도록 했다. 이를 계기로 2008년 6월 김영일이 제18대 회장에 선출되었고, 그는 40억 원을 들여 광복회관을 리모델링했지만 안타깝게도 임기 1년여를 남겨놓고 별세했다.          

2011년 6월 처음으로 독립유공자 유족 박유철이 제19대 회장에 선출되었다. 그런 만큼 회장 선출 분란도 어느 때보다 커졌다. 그는 광복회 영속성을 위해 법을 개정하여 회원 수를 늘려 질적·양적 성장을 도모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임기가 끝날 무렵 구설수에 휩쓸렸다. 그의 재임을 반대하는 일부 광복회 회원들은 항의 농성을 벌였고, 그들은 애국지사 후손들의 생활자금으로 쓰기로 했던 친일재산 환수 금액으로 광복회관을 신축하려한 점을 거세게 반발했다. 이런 가운데 2015년 5월 총회가 열렸지만, 광복회관 앞에서 회원 간의 충돌이 계속되어 경찰이 출동하여 정문을 봉쇄한 가운데 선거가 치러져 연임에 성공했다. 그는 450억 원을 들여 2019년 2월 광복회관을 개관했다.           

2019년 6월 박유철 회장의 연임을 반대한 유족 김원웅이 제21대 회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는 2020년 8월 광복절 기념사에서 이승만과 친일파의 결탁, 국립묘지 친일파 파묘, 미군정과 백선엽을 비난하면서 논란이 크게 일었고, 야당까지 나서 반발하면서 정치권으로 문제가 확산되었다. 또한 선친의 독립운동 이력이 허위라는 주장까지 나돌았다. 더불어 국회 카페 운영 비리 의혹 등이 그의 발목을 잡았고, 결국 취임 2년 8개월 만에 2022년 2월 스스로 사퇴했다. 


새 모습으로 거듭나기 위해서

광복회는 60년 가까운 세월 동안 900여 명에서 시작하여 8,300여 명으로 회원이 증가했고, 민족통일·민족정기 선양, 순국선열과 독립유공자의 희생정신 승화, 유족지원에 힘써왔다. 이는 변함없는 국민 지지와 정부 지원받으며 선열의 고귀한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는 회원들의 노력 덕분에 가능했다. 그렇지만 광복회장 선출을 둘러싼 분란은 대한국인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줬을 뿐만 아니라 외면당할 위기에까지 처했다.      

오는 2022년 5월에 예정된 선거에서 당선될 회장은 광복회가 본연의 길로 나갈 수 있도록 지도력을 발휘하고 선열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특히 회장 선출 방식의 고질적인 문제점으로 지적된 간선제를 회원 직선제로 바꿔야 하고, 젊고 유능한 유족 참여를 확대하여 혁신적으로 탈바꿈해야 한다. 실추된 신뢰 회복을 이루어 모든 국민으로부터 존경받는 단체로 거듭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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