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사적지

항일비밀결사 신민회의 서울 근거지

독립운동 사적지<BR />

정리 편집실


애국계몽운동을 무장투쟁으로 연결시킨 신민회

신민회는 한말의 대표적인 애국계몽운동 단체로, 1907년에 안창호의 발기에 의해 양기탁·전덕기·이동휘·이동녕 등 7인의 창건위원 및 노백린·이승훈·이시영·이회영·이상재·김구·신채호 등이 중심인물이 되어 조직되었다. 신민회는 1910년 '한일강제병합'을 전후하여서 '절대독립'에 의거하여 이전의 애국계몽운동을 무장투쟁으로 연결시키는 역할을 한 중심단체였다. 1911년 황해도 일대에서 일제히 검거되어 지하 단체이던 신민회의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고, 검거된 수백 명의 애국 계몽 운동가들 가운데 105명에게 실형이 선고되면서 해체되었다.


‘상동파’ 애국지사들의 거점 상동교회

상동교회는 스크랜턴(W. B. Scranton) 목사가 서울 남대문로에 세운 교회다. 스크랜턴은 1885년 미국북감리회 최초의 의료 선교사로 내한하여 정동교회 근처에 병원을 세우고 환자들을 무료 진료하다가, 1889년 남대문 근처 지금의 교회 자리를 사들여 의료선교를 시작하였다. 1893년에는 병원과 교회를 분리해 길 건너편 달성궁(현 한국은행 자리) 안에 있는 한옥에 독립된 예배당을 마련했는데, 이 병원이 제중원에 흡수된 뒤 1902년 현재 자리에 신식 벽돌 예배당을 짓고 다시 이전하였다.

상동교회가 민족운동의 거점이 되기 시작한 것은 전덕기를 비롯한 44명의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1897년 9월 교회 안에 엡윗청년회를 창립하면서였다. 독립협회운동의 일선 행동대로 활약했던 상동청년회는 1905년 을사늑약 반대투쟁을 주도하며 ‘상동파’라 불리는 애국지사들의 거점으로 자리를 잡았다. 을사늑약 소식을 접한 김구, 이준 등 경향 각지의 애국지사들이 전덕기가 시무하던 상동교회에 모여 조직적인 반대투쟁을 전개한 것이다. 최남선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상동교회 뒷방에는 전덕기를 비롯해 이회영·이동녕·이준 등 우국지사들이 수시로 모여 국사를 도모했다고 하는데, 안창호가 귀국한 지 2개월 만인 1907년 4월 무렵 신민회를 조직할 수 있었던 것도 ‘상동파’와 같은 모임이 뒷받침되어서였다.


옛 상동교회

한말 ‘상동파’로 불린 애국지사들의 거점으로 비밀결사 신민회의 서울 근거지 가운데 하나였던 곳으로 멸실되었다.


alt

경성부시가강계도, 1914(좌) / 옛 상동교회(우)

현 상동교회

현재 건물은 1974년 구 벽돌 예배당을 철거하고 신축한 것이다. 7층부터 교회로 사용되고 있으며, 건물 내부에 새로나 백화점이 있었으나, 1998년 폐점하고, 현재는 새로나 쇼핑으로 남아있다.


alt

현 상동교회 정면(좌) / 현 상동교회 입구(우)

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30 

위치 고증 「경성부시가강계도」(1914)에 현 남대문로 변에 ‘교회(敎會)’라는 글자가 보인다. 

MAIN TOP
SNS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