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보기

군자금을 모집하다, 형무소에 수감되다

만나보기<BR />

글 박경목(서대문형무소역사관 관장)

 

1929년 4월 천마산 마치고개에서 ‘권총 강도사건’이 발생하였다. 3인조 강도의 범죄 대상은 일제 우편수송차량이었다. 차를 세워 돈을 빼앗고, 신고하지 못하도록 자동차를 파손한 뒤 운전수를 인질 삼아 산으로 도피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단순한 ‘강도’가 아니었다. 이들의 목적은 군자금을 모아 무관학교를 세우고 독립군을 양성하여 일제와의 전면전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끝내 체포된 이들은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된 옥고를 치렀다.


alt

(좌측부터) 최양옥(1893~1983), 김정련(1895~1968), 이선구(1902~미상)


우편수송차량 습격 의거

1929년 4월 18일 오전, 춘천을 출발해 서울로 향하던 경성우편국 소속의 ‘제7호’ 우편수송차량이 오후 1시 40분경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과 미금면의 경계지점인 천마산(天摩山) 인근 마치고개(磨峙嶺)(현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에 다다랐다. 가파른 고갯길을 내려가며 서행하던 중 어떤 사람들이 차를 멈춰 세웠다. 차가 멈추자 두 사람이 뛰어올라 운전사 김영배(金泳培)를 총으로 위협하여 결박한 뒤 조수석에 앉혔다. 차량은 금곡방면으로 향했고 마침 서울에서 출발해 이곳을 지나던 오성(五星)자동차 소속의 ‘경(京) 제447호’ 차량을 발견하자 정면 출동하여 정지시키고, 이어 춘천에서 출발해 서울로 향하던 선일(鮮一)자동차 소속 ‘경 제502호’ 차량을 정지시켜 엔진 부위를 파괴하였다.       

차량을 습격한 이들은 최양옥(崔養玉), 김정련(金正連), 이선구(李善九) 세 사람이었다. 이선구가 운전을 맡고 최양옥과 김정련은 우편수송차량의 짐칸에 실린 붉은색 우편물 주머니를 뒤졌으나 현금은 없었다. 정지시킨 두 차량의 승객들에게 “독립운동을 하는 상하이 공명단원으로 군자금을 모집하려고 이와 같이 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약 53원의 현금을 징수하였다. 그리고 승객과 운전사들에게 ‘조선독립만세’, ‘공명단 만세’를 외치게 한 후 인근 천마산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사건 발생 50여 분 후인 오후 2시 30분경이었다.

세 사람의 의거는 전국을 들썩이게 했다. 일제 경찰은 무장경관을 곳곳에 배치해 검문검색을 강화하고, 신문기자들은 사건의 내막과 ‘범인’의 정체를 기사화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서울 시내에서는 ‘호외!’라는 외침과 ‘권총 든 청년이 시내에 잠입했다’는 이야기로 어수선하였다. 사건 발생 당일 동아일보사에서는 ‘범인계통은 상하이 공명단’, ‘권총은 모젤식, 네발을 발사’라는 제목의 저녁 호외를 발행하였다. 이어 각종 신문에는 ‘양주대도(楊州大道)에 권총단 돌현(突現), 우편자동차를 습격’ 등의 제목으로 관련 기사를 연일 보도하였다.


alt

                                                  최양옥, 김정련, 이선구가 탈취한 우편수송차량(위)과 선일자동차 소속 차량(아래),『동아일보』(1929. 4. 18.)(좌) / 

                                                                      최양옥 체포 당시(위), 김정련(아래 왼쪽), 이선구(아래  오른쪽), 『동아일보』(1929. 4. 22.)(우)


일제 경찰의 대대적 검거작전

현장을 벗어나 천마산으로 들어간 세 사람은 일제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며 암굴에 피해있었다. 일제 경찰은 ‘범인’검거에 혈안이 되어 서울 시내에 무장경관을 배치하여 검문검색을 강화하는 한편 천마산 일대를 샅샅이 수색하였다. 포위망이 점차 좁혀 오자 4월 19일 저녁 8시경 세 사람은 급히 도피하였다. 이때 김정련은 일행과 떨어져 다음 날 20일 새벽 00시 20분경 양주군 화도면 녹촌리 배봉산 인근에서 총격전 끝에 체포되고 말았다. 최양옥과 이선구는 양주군 와부면 덕소리까지 나와 배를 타고 남한강을 따라 구리 수석리에 상륙하여 아차산(峨嵯山)에서 잠시 숨을 돌렸다. 그리고 당일 오전 9시 30분경 망우리 고개에서 내선(內鮮)자동차 소속 ‘경 제408호’ 차량을 빼앗아 타고 서울시내로 잠입하였다. 서울에서 두 사람은 경찰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흩어졌다. 

이선구는 4월 20일 오후 11시 20분경 후사를 부탁하려고 황금정 1정목(현 을지로) 이명구(李命求)의 집에 들렀다가 잠복해있던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최양옥은 체부동 118번지 박인서(朴寅緖)의 집에 머무르고 있던 친척 최상하(崔尙夏) 방에 은거하였으나 정보를 탐지한 경찰에 의해 21일 오전 5시 30분경 체포되었다. 최양옥의 체포과정은 일제 경찰 100여 명이 동원된 대대적인 검거 작전이었다. 그가 체부동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종로경찰서에서는 무장경관을 동원하여 4월 21일 새벽 박인서의 집을 겹겹이 포위하였다. 5시 30분경 날이 밝자 사복형사대가 담을 넘어 잠입하여 잠자고 있던 최양옥을 급습했던 것이다.         

긴박했던 체포 순간에도 최양옥은 의연하고 대담했다. 조선일보 기사(1929. 4. 21)에 의하면 ‘태연자약하게 침착한 태도로 조금도 반항하지 않고, 옷을 입은 후 담배 한 개를 붙여 물고 … 유유히 걸어 나와’ 그를 둘러싼 수십 명의 신문기자들에게 ‘신문기자 제군! 공명단(共明團)을 몰라서 ‘명(明)’자를 ‘울 명(鳴)’자로 쓰느냐’고 호통을 치고 ‘빙글빙글 웃는 얼굴로 유유히 호송자동차에 올랐다’고 한다. 당시 신문기자는 처음에 ‘밝을 명(明)’자로 기사를 썼다가 경찰당국에서 ‘울 명(鳴)’으로 발표하자 이후 그대로 ‘共鳴團’이라고 썼다고 한다. 지금 공명단의 한자를 ‘共鳴團’으로 표기하는 사유이다.


alt

「공명단(共明團)도 모르나」,『조선일보』(1929. 4. 21.)  


일제와의 전면전을 계획한 공명단

최양옥, 김정련, 이선구는 대한독립공명단(大韓獨立共鳴團) 단원이었다. 공명단은 1928년 음력 6~9월경 중국 산시성(山西省) 타이위안(太原)에서 신덕영(申德永), 최양옥, 안창남(安昌男) 등의 주도로 결성되었다. 신덕영은 1919년 국내에서 조직된 조선민족대동단의 일원으로 전남 광주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집한 인물이다. 이때 최양옥과 김정련도 대동단에 합류해 군자금모집 활동을 하였다. 이 일로 세 사람은 체포되어 1921년 12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신덕영은 징역 8년, 최양옥은 7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김정련은 5월 31일 광주지방법원에서 무죄로 방면되었다. 이후 출옥한 이들이 중국에서 다시 만나 독립운동을 재기한 것이다. 안창남은 산시성 군벌 염석산(閻石山) 부대에서 항공중장을 지내고 산서비행학교 교장을 지낸 인물로, 1929년 최양옥과 김정련이 국내로 잠입할 때 군자금 600원을 지원하였다. 이선구는 신의주부청(新義州府廳) 자동차 운전사로 일하다가 1928년 7월 사자생(寫字生: 필사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으로 잠깐 일했던 김정련과 친분을 쌓았다. 

이러한 인연으로 최양옥이 김정련을, 김정련이 이선구를 공명단 단원으로 가입시켜 뜻을 함께 하였다. 이들은 150만 원의 자금을 마련하여 중국에 무관학교를 세우고, 75,000여 명의 독립군을 양성하여 일제와 전면전을 벌이고자 했다. 이를 위해 우선 군자금 모집에 주력하고자 국내로 잠입하여 고액의 현금이 실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우편수송차량을 탈취한 것이다.


alt

(좌측부터) 최양옥 수형기록카드, 김정련 수형기록카드, 이선구 수형기록카드

지옥의 철창에 수감되다

세 사람은 서대문형무소에 미결수로 수감되었고 1929년 12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최양옥은 징역 10년, 김정련은 8년, 이선구는 5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12월 14일 최양옥은 경성형무소로 이감되었고, 두 사람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선구는 1933년 10월 24일 병고로 가출옥하였으나 이후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최양옥은 1939년 12월 13일, 김정련은 1935년 5월 19일 출옥하였다. 이들이 수감된 1930년대 서대문형무소는 ‘옴 감옥’, ‘초열, 지옥의 철창’으로 불리는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비좁은 감방에 피부병과 각종 질병, 더위와 추위, 배고픔으로 하루하루를 이겨내기 힘든 나날을 보내야 했다.          

김정련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다. 그가 수감된 신감 4동(현 9옥사) 6호 감방 옆 7호 감방에 1932년 4월에 일어난 윤봉길(尹奉吉) 의거에 연루된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가 수감되었다. 그에게 감옥 내 암호 통신법인 이른바 ‘타벽통보법(打壁通報法)’을 알려주다 간수에게 발각될 위기에 처하자 ‘미친 척’하며 대들어 위기를 모면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기지로 안창호는 무사하였지만 김정련은 ‘지옥의 계호계(戒護係)’로 끌려가 ‘도살장으로 끌고 가는 돼지모양’으로 결박당한 채 ‘뼈가 으스러지게’ 두들겨 맞았다. 그러면서도 ‘도산 선생을 생각하고 오히려 기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고 한다.


MAIN TOP
SNS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