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산책

아일랜드 독립을 위한 

문예부흥운동

세계 산책

글 신현호(백석대학교 어문학부 교수)



아일랜드 문예부흥운동(Irish Literary Revival)은 19세기 후반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약 60년에 걸쳐 전개되었다. 아일랜드 작가들을 중심으로 당시 영국 식민지 통치하에 있는 아일랜드의 민족정신을 고양시키고, 아일랜드 전통인 켈트(Celt) 문화를 부흥시켜 문화적 정체성 확립과 아일랜드 독립정신을 고취하려고 했던 활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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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지도

아일랜드 문예부흥운동의 형성 과정   

19세기 중반 이후 영국 식민지 통치하에 있던 아일랜드는 독립운동을 격렬하게 전개하면서 혼란을 겪고 있었다. 당시 영국의 지배 문화로부터 벗어나려 한 아일랜드인의 정체성 찾기는 19세기 중엽 이후 강화되다가 문예부흥운동으로 구체화되었다.      

아일랜드 문예부흥은 일반적으로 1885년부터 1940년 동안 전개된 것으로 평가된다. 아일랜드 문예부흥의 움직임은 19세기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8세기에 일어났던 미국의 독립전쟁과 프랑스 혁명이 아일랜드의 정세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는 아일랜드 자치정부 수립에 대한 열망을 자극해 1791년 ‘아일랜드 연합’이라는 단체를 설립하게 하였다. 이 단체를 주도한 민족주의 혁명가인 ‘울프 톤(Theobald Wolfe Tone)’과 동료들은 민족 정체성의 개념을 확립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들의 목표는 아일랜드 국민 전체를 통일하는 것, 과거 모든 불화의 기억을 지워버리는 것, 개신교·가톨릭·영국 국교도 등 모든 종파를 아일랜드 사람이라는 공통의 이름으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1840년대를 전후하여 전개된 ‘청년아일랜드운동’은 문학을 통해 아일랜드인들에게 민족정신을 불어넣고 민족의 독립과 고대 아일랜드 문화의 부활을 추구하였다. 1893년에 결성된 ‘게일 연맹’은 아일랜드 고유 언어인 게일어 부활을 주도하였으며 아일랜드 민요 보급에 노력하였다.       

민족운동의 초석이 된 문예부흥운동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친 것은 민족주의자 ‘파넬(Charles Stuart Parnell)’의 실각으로 인한 아일랜드의 정치적 진공 상태였다. 아일랜드 자치를 추진하던 급진적 공화주의자들은 파넬의 실각으로 인해 사분오열되었고, 이로 인해 정치적 환멸감이 확산되고 있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를 중심으로 한 아일랜드 작가와 지식인들은 문화운동을 통해 아일랜드 국민을 하나로 통합하기에 좋은 상황이라고 판단하고, 문예부흥운동을 역동적으로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결국 영국의 오랜 식민통치로 인해 인종·종교·문화·언어 등이 심하게 분열된 아일랜드를 통합하고 아일랜드의 정체성을 확립하려 했던 문예부흥운동은 영국으로부터의 정치적 독립운동에 기여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아일랜드의 문예 및 문화 전반의 양상을 변화시키는 데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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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의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1911)(좌) / 문예부흥운동의 거점이었던 애비극장(우)


아일랜드문예부흥운동의 혼란과 영향  

아일랜드는 수 세기 동안 반복된 이민족의 침입과 수탈의 아픔을 겪어왔으며, 1169년부터 영국의 정복과 지배를 받게 되었다. 수백 년에 걸친 식민지 지배 과정에서 토착문화와 외래문화와의 갈등, 식민지 종주국인 영국과 피식민지 아일랜드 문화 간의 갈등, 친영국계 개신교 문화와 민족주의적인 가톨릭 문화와의 갈등이 계속되었다. 영국은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방편으로 자신들의 문화를 이식하면서 토착민과 토착문화를 파괴하였다. 영국식 교육 제도를 수립하고 전통적인 켈트문화를 폄하하면서 고유 언어인 겔릭어(gaelic)를 영어로 대체하고, 새로운 가치와 역사를 심었다. 그 결과 아일랜드의 문화나 아일랜드 민족의 감수성은 특수성을 가지지 못하고, 지배국인 영국의 문화와 혼합돼 존재하게 되었다.      

19세기 초에 들어서면서 아일랜드인들은 반(反) 영국운동을 펼치며 영국의 오랜 식민통치와 지배 문화로부터 벗어나려 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무력을 동반한 시위와 저항 그리고 예술 활동을 통한 아일랜드 정체성 추구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19세기 후반에 시작된 문예부흥운동은 영국계 아일랜드 작가들이 주축이 되어 아일랜드의 언어와 전통을 부활시키고 영국으로부터의 문화적 독립을 이끌어 아일랜드의 독립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문예부흥운동은 특정한 종교나 계층 및 정치적 입장을 지지하지 않으며 단절되었던 자신들의 전통을 재구성함으로써 아일랜드의 정체성을 찾으려 하였다. 고대 켈트족의 신화와 전설, 민담 등 아일랜드적인 소재와 언어적 리듬을 되살려 아일랜드 고유의 민족문학을 구축하고, 게일어를 보급·확산하며, 아일랜드 국토와 경치에 대한 찬미를 통해 이상적인 아일랜드를  창조하였다. 문예부흥운동가들은 종교 및 인종의 분열이 없던 켈트시대로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고대 아일랜드의 신화를 발굴하고, 중세 시대의 문인들에 의해서 기록된 켈트 문학을 번역하고 소개하였으며, ‘애비극장’과 같은 문예극장을 설립해 희극운동을 펼쳤다. 또한 ‘쿠알라출판사’를 만들어 아일랜드 고유의 신화나 아름다운 전통문학을 유럽 현대문학의 형식과 결부시킨 작품을 민중들에게 전파하였다.       

그러나 당시 상황은 문화의 융합이 아닌 두 문화의 충돌을 야기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아일랜드가 1922년 영국으로부터 자치권을 부여받고 자유국가로 탄생된 이후, 문예부흥운동가들의 업적은 다수의 가톨릭계 국수적 민족주의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공격의 원인 중 하나는 문예부흥운동가들이 영국 피가 섞인 ‘앵글로 아이리시’ 특권 계층으로 아일랜드의 정서를 경험하지 않은 계층으로서, 토착문화인 게일어에 대한 지식 없이 아일랜드 정체성을 확립하려 했고, 게일어가 아닌 영어를 사용하여 아일랜드 문화를 새롭게 창조하려 했다는 것이다. 결국 ‘토착 아일랜드인’들과 ‘영국계 아일랜드인’ 간의 민족 정체성 개념이 큰 차이를 보이며 문예부흥운동은 쇠퇴하고 말았다.       

아일랜드 문예부흥운동의 쇠퇴는 문예부흥운동가들이 아일랜드의 참혹한 현실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데서 생긴 결과였다. 그럼에도 문예부흥운동은 식민지 상황에서 역사에 대한 인식을 고취해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우려고 했고, 정치적인 투쟁이 아니라 아일랜드 고유의 문화 복원과 창출을 통해 식민지 상황을 극복하고자 한 점에 있어 의의를 갖는다. 문예부흥운동은 많은 현대 아일랜드 작가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며, 이들의 문학정신은 아일랜드에 국한되지 않고 20세기 세계문학 전개에도 커다란 시사점을 주었다.        

이어 1921년 아일랜드가 독립된 이후 오늘날까지도 아일랜드 정체성 회복 운동은 계속되고 있다. 학교에서는 아일랜드 고유어를 복원하기 위해 아일랜드 고유어를 중점적으로 가르치고 있으며, 도로 안내나 지명 표기 및 공식 문건에 아일랜드어가 병기되고 있다. 아일랜드 고유의 스포츠인 아일랜드식 하키 헐링, 겔릭축구, 카모기 등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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