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관

겨레의 스승 

주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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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백낙천(배재대학교 인문사회대학장)


주시경은 국내외적으로 격랑이 휘몰아쳤던 개화기에 일생 동안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국학자, 교육운동가, 독립운동가, 개화사상가로서 시대를 선도했던 진정한 위인이었다. 특히 자국어에 대한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민족의 언어와 민족의 혼을 일깨우고 평생을 우리말 연구와 보급에 힘쓴 애국 계몽운동가요 국어학자이다. 오늘날 국어 연구의 학문적 성과가 축적되고 국어 문법의 체계가 확립될 수 있었던 것은 주시경의 우리말 연구에 대한 헌신에서 비롯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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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경


민족 계몽에 헌신하다

1873년 대원군의 실권(失權) 후, 이른바 운양호사건이 빌미가 되어 1876년 조선은 개항을 요구하는 일본에 의해 강화도조약을 맺게 되었다. 이에 부산·원산·인천이 차례로 개항되었으며, 국내 정치 상황은 개화 세력과 수구 세력이 맞서는 혼란스러운 정국이었다. 조선의 국운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으로 치달아 국권이 흔들리고 민족의 자존심이 훼손되는 등 어지러운 상황에 직면했다. 한편 강화도조약이 조선의 자발적 개항이 아닌 일본의 외압에 의한 후속 조치이기는 했지만, 역설적으로 조선은 국제무대에 눈을 돌리는 출발점이 되었으며 서양에 문호가 개방되고 신문명이 들어오는 계기가 되었다. 즉 조선은 강화도조약을 계기로 개항과 자주라는 역설적인 시대적 과제를 떠안게 되었고, 조선의 근대화는 서구화와 동일시되는 엄청난 변화의 소용돌이에 직면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주시경은 1876년 황해도 봉산에서 1녀 4남 중 셋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상주(尙州)로서 백운동서원을 세운 유학자 주세붕의 후손으로 어릴 때 이름은 상호(相鎬)였다. 주시경의 호기심 가득한 총기와 열정은 『청춘』에 실린 선생의 어린 시절에 그대로 나타난다. 주시경이 8세 때 산과 맞닿아 있는 하늘을 보고 ‘그 하늘을 만져 보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덜렁봉이라는 산에 올랐는데, 다른 아이들은 산허리에 있는 풀초에 정신이 팔렸지만 주시경은 기어이 산 정상에 올라갔다는 내용이다. 이는 그의 비범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일례로, 주시경이 황무지와 다름없던 국어 연구에 일생을 매진할 수 있었던 끈기와 도전이 어디에서 연유했는지를 알 수 있는 떡잎 같은 일화이다.    

이후 주시경은 갑오개혁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893년에 배재학당 교사였던 박세양과 정인덕 등에게 신학문을 배우면서 새로운 학문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어 1894년 19세에 큰 뜻을 품고 배재학당 특별과에 입학해 학문에 매진하였다. 1900년 6월 25세 나이에 배재학당을 졸업한 뒤 평생을 국어 연구에 몰두하고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계몽을 위해 헌신하였다. 그러나 조국의 독립을 위한 더 큰 계획을 눈앞에 두고 1914년 7월 27일 선생의 나이 불과 39세에 안타깝게도 생을 마감하였다. 


국어·국문 연구에 매진하다

주시경은 배재학당 재학 5년 동안 영문법을 공부하면서 언어의 특징과 공통성을 깨우치고 언어학의 이론을 정립하면서 국어 문법의 기틀을 세워야겠다고 다짐하였다. 이는 1906년에 쓴 『대한국어문법』에 고백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아래 인용 글은 주시경이 세계 각국의 언어를 관찰하면서 영문법의 기틀 위에서 국어 문법에 대한 독창적인 관점을 펼칠 것이라는 계획을 밝힌 것이다.    


영어 알파벳과 일어 가나를 조금 배우고 유구, 만주, 몽골, 티베트, 거란, 인도, 페르시아, 아랍, 이집트, 히브리 글자들과 세계 각국의 글자들을 구해 보기도 하고 또 영어 문법을 조금 배운 것은 다 국문 연구에 유익할까 하는 것인데…….     


주시경의 학문은 크게 보아 문자론과 맞춤법, 음성학과 문법론, 사전 편찬의 노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세 분야에서 주시경의 업적은 우리말의 기틀을 바로잡아 올바른 어문 생활을 교육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시경의 이러한 노력은 『대한국어문법』(1906), 『국어문전음학』(1908), 『국어문법』(1910), 『말의 소리』(1914) 등의 저서에 잘 나타나 있다. 국어 문법의 규범적 기틀을 세우고 실용의 방편을 마련하는 데 일관된 입장을 견지했다고 할 수 있다.      

주시경은 배재학당 수학 시절 이미 우리말과 우리글에 대한 깊은 식견과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1896년 5월 국어학 관련 첫 공식적인 학회라고 할 수 있는 ‘국문동식회(國文同式會)’를 독립신문사 내에서 결성해 주도적인 활동을 펼쳤다. ‘국문동식’이란 오늘날의 맞춤법을 의미하며, 이곳에서 한글 맞춤법의 틀을 잡고 국문 전용을 주장하였으며 말모이(사전)를 편찬하는 등 국어와 국문에 대한 학문적 연구뿐만 아니라 실천적 국어 연구를 하는 지식인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주시경은 당시 배재학당의 교사였던 서재필 박사가 주도한 협성회(協成會)에 참여하였는데, 이곳은 매주 토요일 시국 토론회와 연설회를 개최했던 곳이다. 주시경은 협성회 활동을 통해 애국계몽사상을 고취시켜 나갔는데 이것이 그의 인생관 형성에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또한 서재필 박사가 주축이 되어 결성된 ‘독립협회’의 주요 인물이었으며, 나아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신문인 『독립신문』의 회계 겸 교보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리고 『독립신문』에 공식적으로 주시경의 첫 논문이라고 할 수 있는「국문론」을 두 차례 발표하면서 한글 전용의 이론을 주장하였다. 이는 1896년 『독립신문』이 최초의 한글 신문으로 발행되는 데 누구보다 주시경의 역할이 지대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1898년에 주시경은 『독립신문』에 네 차례 발표한 내용을 엮어 국어 연구에 기념비가 되는 명저인 『국어문법』의 초고에 해당하는 내용을 완성하였다. 이후 내용 보완을 거쳐 1910년에 국어 문법서의 기념비적인 저서인 『국어문법』을 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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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한글 신문 『독립신문』 초판


후학 양성을 통한 한글 연구 활성화

주시경은 우리나라 국어 연구에 있어 상징적 원형으로서의 존재감을 갖는다. 그가 제시한 국어 문법의 기본적인 체계와 이론은 독창적일 뿐만 아니라, 언어학적으로도 보편타당하고 설득력 있는 학문적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주시경은 상동교회 청년학원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정규 교과목으로 국어문법을 가르치면서 수많은 후학을 길러냈다. 이중 훗날 우리말 연구에 업적을 낸 대표 제자들로는 이규영, 이병기, 권덕규, 신명균, 최현배, 김두봉, 정열모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 남한과 북한에서 우리말 연구와 어문 정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로는 최현배와 김두봉이 있다. 주시경이 이들의 스승이라는 점에서 그는 진정한 의미의 우리말 연구와 어문 정책 수립에 있어 지존자라고 할 수 있다.    

한편, 한글이 음소문자의 단계를 넘어 자질문자의 특징을 갖는 것으로 그 우수성이 세계에 알려져 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주시경의 한글 보급과 교육이라는 실천적 계몽 운동이 밑거름이 되었다. 이러한 실천적 활동은 그의 철저한 애국 계몽사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나라의 혼란 속에서도 주시경은 자국어에 대한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민족의 언어와 혼을 일깨우고 평생을 우리말 연구와 보급을 위해 헌신했던 겨레의 스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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