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의 발자취

일제강점기 문예인들의 삶

독립의 발자취<BR />

글 편집실 사진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은 지난 2월 기획전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를 개최하고, 관련 내용을 도록으로 발간하였다. 여기에는 일제강점기 1930~1940년대를 중심으로 문학과 미술의 상호 관계가 잘 나타나 있다. 본지는 도록의 내용을 재구성하여, 일제강점기 시인과 화가의 교유를 보여주는 작품과 자료 일부를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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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기획을 하게 된 취지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과거 문학과 미술은 원래 한 몸처럼 동거했습니다. 시화일률(詩畫一律), 시와 그림이 한 몸과 다름없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전통은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살아 있었습니다. 시인과 화가들은 함께 어울리며 예술을 공유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시인과 화가의 동석은 드물어졌습니다. 전문화 시대라고 하지만 사실 통섭과 융합이라는 말이 더욱 절실한 시기입니다. 과거의 융합을 되돌아보며 현대를 되짚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기획전과 도서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주세요.

전체 콘셉트는 미술과 문학의 만남입니다. 전시를 위해서는 140여 점의 작품과 자료 200여 점, 그리고 각종 시각자료 300여 점을 준비했습니다. 여기에는 새롭게 선보이는 발굴 자료도 있고, 새로운 시각에서 소개한 자료도 있습니다. 당시 어둡고 힘겨운 시대를 살면서 창작가들이야말로 어떻게 시대를 끌어안고 작업했는지 다양한 모습으로 만나볼 수 있습니다.


이번 자료를 준비하며 어려웠던 점이 있다면요?

관련 미술 작품을 찾는 데 꽤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또 유존작의 희소성은 아무리 흥미로운 주제라 해도 전시 구성을 어렵게 합니다. 그래도 문헌 자료 등 입체적 조명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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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글, 정현웅 그림,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여성』 제3권 제3호, 조선일보사(1938. 3.)(좌) / 『삼사문학』 제3호, 표지: 정현웅, 삼사문학사(1935. 3.)(우)


소개된 작가들은 어떤 인물들인가요?

1930~1940년대 한국의 문예인들 사이에서 문학가와 미술가의 공동작업은 셀 수 없이 자주 일어났던 일입니다. 이상과 구본웅, 김기림과 이여성, 백석과 정현웅, 이태준과 김용준, 김광균과 최재덕, 구상과 이중섭 등은 시대의 전위에 함께 서 있었습니다. 이들은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작가 세계를 구축하였습니다. 특히 백석 시인이 특정인을 거명하면서 쓴 시, 그 시 속의 주인공인 정현웅이 백석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예술적 동행을 한 점도 눈여겨볼만합니다. 


당시 시대적 상황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일제강점기 지식인들이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조선에서 할 수 있었던 일은 일간지와 잡지사 기자였습니다. 그만큼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 극히 제한적이었는데, 이러한 사정은 작가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한계가 많은 문예인을 신문사에 붙잡아 두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함께 꾸민 신문사 학예면은 해당 신문사의 지적 깊이를 증명해 주는 징표였을 뿐만 아니라, 미적으로도 완벽하게 아름다워야 할 하나의 ‘작품’으로 인식되어 갔습니다. 이와 더불어 신문의 판매 부수를 책임졌던 신문소설의 파급력 또한 대단한 수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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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文章)』 창간호, 문장사(1939. 2.)(좌) 『문장(文章)』 제3권 제3호, 문장사(1941. 3.)(우)


시인과 화가의 합작 ‘화문(畵文)’

문인과 화가의 결합은 신문사들이 자매지로 함께 발간했던 잡지 『여성』, 『조광』, 『신동아』, 『중앙』 등에서 더욱 빛을 발하였다. 이 잡지들에서는 경쟁적으로 문인과 화가들을 ‘매칭’하여, ‘화문(畵文)’이라는 아름다운 장르를 발전시켰는데, 백석과 정현웅, 정지용과 이순석, 김광섭과 김규택 등의 조합이 빚은 아름다운 합작품은 대중들에게 굉장한 호소력을 지녔을 터다.     

‘화문’은 문자 텍스트와 도상 텍스트의 혼종 장르로, 도상 및 이미지(畵, 寫)와 글(文, 詩)의 이종혼종이 일반적인 것이었으나, 경우에 따라 ‘화-문-사진’ 등의 삼중 결합도 가능하였다. 양식적 차원에서 ‘문’과 ‘화’가 혼종된 장르임을 암시하는 ‘화문행각(畵文行脚)’, ‘화문점철(畵文點綴)’, ‘시화순례(詩畵巡禮)’ 등의 용어가 매체에 따라 사용하기도 하고, ‘이인행각’, ‘이중행각’ 등의 명칭이 붙여지기도 한다.      

소재(주제) 차원에서 ‘근교삼제(近郊三題)’, ‘춘교칠제(春郊七題)’ 등이 사용되거나, 텍스트의 성격 및 참여 필자 수를 보여주는 명칭과 기획 주제를 암시하는 명칭이 결합된, ‘춘교이인행각(春秋二人行脚)’, ‘신추화문첩(新秋畵文帖)’, ‘강교화첩(江郊畵帖)’ 등의 명칭이 쓰이기도 했다.


조선중앙일보 폐간 후 발행된 『문장』

그러나 1936년 8월 손기정의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조선중앙일보가 폐간을 맞았고, 1940년 8월 군국주의가 극단으로 치달으면서 우리말 사용마저 제약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 시점에 이르러서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마저 폐간되고 말았다.     

이후 개인이 사비를 털어 발행된 문예지 『문장』이 마지막 불꽃을 피웠다. 1939년 2월에 창간된 문예 종합지 『문장』은 김연만 발행으로, 이태준·정지용이 운영 및 편집을 맡고, 김용준과 길진섭이 권두화와 표지화를 맡아 잡지를 발간하였다. 당시 민족말살정책이 시행되고 있었음에도 특정 사상과 이념에 치우치지 않고 민족 고전 발굴에 힘썼으며 한글 및 어문학과 관련된 학술 연구 논문도 꾸준히 발표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육사를 비롯해 이광수, 김동인, 이효석 등 최고의 소설가와 시인들의 작품을 수록하였으며, 현재까지도 회자되는 수많은 시와 소설을 등단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김용준, 길진섭, 김환기의 아름다운 표지화와 삽화를 선사함으로써 일제 말기 문예인들의 최후 보루가 되었다.    

당대 최고의 문예 종합지였던 『문장』은 안타깝게도 일제에 의해 1941년 4월에 강제 폐간되었다. 이후 1948년 10월 정지용이 속간하였으나 1호 만에 종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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