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인연

영원한 독립군 신팔균과

자결한 부인 임수명

아름다운 인연<BR />

글 김형목(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신팔균과 임수명은 1912년 신팔균이 경찰의 눈을 피해 환자로 위장하여 병원에 입원해있는 동안 환자와 간호사로 만나 1914년 결혼하였다. 결혼 후 임수명은 신팔균을 도와 군자금 조달 등의 역할을 맡았다. 이들 부부는 국내외적으로 독립운동 활동을 하면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함께한 운명공동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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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팔균

대한제국 군인으로서 구국 간성이 되다  

동천 신팔균은 김경천(본명 김경서), 지청천(본명 지석규)과 함께 ‘남만주 삼천’, ‘군인계의 삼천’으로 불릴 만큼 독립전쟁사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그가 참여하거나 주도한 서로군정서, 신흥무관학교, 대한통의부에서 무장투쟁을 견인하였다. 베이징에서는 김동삼·박용만 등과 함께 창조파 일원으로 활약하는 등 무장투쟁노선으로 일관한 참된 군인이었다.     

신팔균은 1882년 5월 19일 서울 정동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윤수, 호는 동천이다. 본관은 평산이며, 본향은 충북 진천군 이곡면 노곡리(현 진천군 이월면 노은리)이다. 그의 가문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전통적인 무반이었다. 고조부 홍주는 무과에 급제한 후 순조대에 훈련대장을 지냈다. 증조부 의직도 무과에 급제하여 부사를 지냈으나 일찍 사망하였다. 할아버지 신헌은 개혁적 관료로서 강화도조약 체결 당시 전권대신이었다. 특히 국방 문제 등에 자신의 의견을 적극 개진하였다. 그는 어느 문인 학자에 못지않은 경세가로 글씨와 문장에 능통하였다. 아버지 석희는 한성부 판윤과 경무사, 중추원 일등의관 등을 역임하였다. 신팔균은 삼 형제 중 장남으로 동생 가균과 필균이 있었다. 가균은 그와 함께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한 후 민영환의 부관으로 근무하다가 군대해산 직후에 해직되었다. 이처럼 무인적 배경 속에서 성장한 그가 군인의 길을 걷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900년 10월 무관학교에 입학한 신팔균은 1903년 9월 보병과를 졸업하였다. 당시 입학 규정은 까다로워 입학생 대부분이 정부 유력자 친족이거나 지배층 자제 등이었다. 일부는 근대교육을 수학하거나 관료 생활을 하다가 입학하는 등 선망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재학 중인 1902년 7월 6일 육군 참위(현 소위)에 임관되어 이듬해 3월 견습을 거쳐 시위대에 정식으로 배속되었다. 군대 해산 직전 보병 부위로 승진하고 보병 제7대대 부관에 보임되어 근위대에 배속되었다. 군대 해산에도 그는 해임되지 않고 부위로 근무하는 가운데 2년 뒤에는 정위로 승진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가문의 배경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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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팔균의 육군무관학교 졸업증서


사립보명학교와 대동청년당원으로 계몽운동에 나서다

군인으로 재직하던 중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는 현실을 직접 목격하였다. 국권 회복을 위한 실천력이 요구되는 결정적인 순간을 맞았다. 당시 사립학교 설립에 의한 교육구국운동이 들불처럼 전국 방방곡곡으로 확산되는 분위기였다. 그가 낙향하기 이전 동생인 필균은 친척인 신재균과 같이 사립보명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 학교는 1897년에 신욱이 설립하였으나 동생이 문중을 기반으로 인수하였다.       

주요 교과목은 한문·국어·역사·지리 등으로 민족정신 함양과 항일의식 고취에 중점을 두었다. 교사는 신팔균을 비롯하여 동생 가균·필균과 생질 이조영 등으로 사실상 ‘문중학교’로서 성격을 지닌다. 그는 고택에 머물며 강당 고개에 있는 학교를 왕래하며 학생들의 사기 진작에 노력을 기울였다. 재정이 충분하지 못하여 학부로부터 정식 인가는 받지 못하였다. 음성에 거주하는 친구 송달용에게 보낸 편지는 이와 같은 상황을 그대로 보여준다.    


“어제 올린 편지에 말씀드린 것 잘 보셨을 것으로 믿거니와 날마다 고대고대하건대 끝내 아무런 회답 말씀이 없어 못내 의심스럽습니다. 김 주사가 이번에 욕을 본 것은 나 때문인 탓도 없지 않습니다. 또 30원 때문에 발등에 떨어진 급한 일을 면하지 못하여 심히 미안하오나 이제 다시 급히 아뢰오니 그렇게 이해해 주시는 위에 30원을 전보환으로 붙여주시면 우선 시급한 사세를 면할 것 같습니다. 예사로이 생각지 마시기를 간절히 빌면서 남은 말씀은 답장 오기를 서서 기다리옵니다. 다 쓰지 못합니다.”     


한편 이때를 전후하여 대동청년당(단)원으로 비밀결사에 참여하였다. 이 단체는 보성중학교 교장 박중화를 중심으로 서울 남형우의 집에서 조직되었다. 목적은 신민회의 구국운동을 실천하는 데 있었다. 당원들은 연계를 통해 구국을 위한 사상과 방략을 근대교육을 통하여 널리 확산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대종교인으로 훗날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든든한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다만 단원으로서 구체적인 활동상은 거의 파악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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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장교 시절 신팔균과 동지들


항일투쟁을 위한 기반 구축에 나서다  

강제 병합 이후 일제는 신팔균을 집요하게 감시하거나 회유하는 등 국내에서 활동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중국으로 망명을 결심한 배경은 이러한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는 두 번째 부인인 임수명을 만나 결혼한 전후인 1914년경에 중국 안둥(현 단둥시)을 거쳐 베이징으로 활동 근거지를 옮겼다.    그는 베이징과 남만주를 왕래하며 항일운동을 펼쳤다. 3·1운동 이후 북경고려공산당에 가입·활동하면서 이후 최진 등과 군인구락부를 조직해 활동하였다. 1922년 8월에는 경신대참변 당시 발생한 한국인 고아들의 교육을 위한 자치기관 성격을 지닌 한교교육회를 만들었다. 이는 군사통일회 개최에 즈음하여 만주에서 참여한 황학수 등과 합의하여 이세영(일명 이천민)을 회장으로 만든 단체였다. 목적은 교민의 자녀를 항일투사로 육성하는 데 있었다. 회원은 ‘대한 민족’으로 품행 단정하고 상당한 지식이 있는 사람으로 한정하였다. 집의학교를 설립하여 구체적인 교육활동을 전개하였으나 경비 부족으로 1년 만에 폐교되고 말았다.      

이듬해에는 박용만·최동오 등과 북경한인구락부 조직에 참여하였다. 이 단체는 한인들의 교육·오락·구제사업 등 베이징 한인들을 대상으로 사회사업을 병행하였다. 1924년 7월에는 원세훈과 신숙 등이 합세하여 북경한교동지회로 개칭하였다. 또한 한중호조사에도 간여하는 등 베이징 한인사회 대동단결 도모에 헌신적이었다. 1923년 1월부터 6월까지 개최된 국민대표회의는 임시회의·정식회의·비밀회의 등 74회나 개최되었다. 그는 김동삼 등과 임시정부의 외교론과 실력양성 노선을 비판하면서 무장투쟁노선에 입각한 임정개조론을 주장하였다. 창조파는 임시헌법을 새로 제정하고 국민위원회를 조직하는 등 신정부를 지향하고 있었다. 신팔균은 군무위원장으로 선출되어 5개 군구(軍區)를 관할하는 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창조파의 주요 인물로서 연해주와 만주 지역 무장부대를 총지휘하는 역할을 맡았다. 베이징에서 다양한 활동과 함께 중국과 연대를 모색하는 등 한인사회 지도자로서 부각되었다.   


대한통의부 총사령관으로 대동단결을 모색하다 

대한통의부는 남만주의 무장투쟁 세력과 전덕원 등 의병 계열 세력을 기반으로 성립된 단체였다.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는 가운데 무장단체 사이에는 협력과 알력은 지속되고 있었다. 이 단체 지휘부는 1924년 1월 중앙의회에서 위원장제로 개편했다. 베이징으로 사람을 보내어 신팔균에게 위원장 취임을 요청하자 이를 수락하였다. 군사위원장에 취임한 그는 대대적인 군대 개편과 군사훈련에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사관 자격을 갖춘 군인을 양성하기 위한 ‘사관 학원’으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서로군정서나 신흥무관학교에서 경험은 커다란 도움이 되었으리라 짐작된다.  

1924년 7월 2일, 남만주 흥경현 이도구에서 군사훈련 중,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 지방군의 습격을 받았다. 갑작스러운 습격에 신팔균은 진두지휘하면서 안전지대로 병력을 후퇴시키던 중에 총상을 입었다. 부하들이 피신시키려 하자 거부하고 부상병부터 후송시키도록 명령 후 다시 전투를 지휘하던 중 총탄이 흉부를 관통하는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다. 중대장 김하석이 그를 업고 탈출하였으나 결국 운명하게 되었다. 최후 순간에도 그는 “일제와 싸우다 죽어야 하는데, 무관한 중국 사람과 싸우다 죽는구나”라며 억울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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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팔균 부인 절명 보도 기사


남편의 순국 소식에 가족과 함께 절명하다

임수명은 1912년 서울에서 간호원으로 일하던 중에 일제 경찰에 쫓겨 환자로 위장한 신팔균을 만나 1914년에 결혼하였다. 남편과 같이 중국으로 망명한 후 베이징에서 1917년과 1919년 각각 아들을 출산하여 양육하였다. 또한 비밀문서 전달, 군자금 모금, 독립군 후원 등 독립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 독립투사였다.      

신팔균이 순국하던 시점에 부인은 만삭의 몸으로 베이징에 있었다. 순국 소식을 알면 뒷일이 염려되어 동료들과 동지들이 강권하여 귀국시켰다. 그렇게 막내딸을 출산하고 남편을 기다리던 그녀에게 청천벽력 같은 남편의 순국 소식이 전해졌다. 이때 셋째 아들까지 병사하면서 받은 충격에 삶의 기력을 잃었다. 임수명은 갓난아이와 함께 음독하여 열녀처럼 남편의 뒤를 따랐다. 슬픔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후에도 아들이 사망하는 등 일제 강점으로 일가족 모두가 희생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참한 상황으로 이어졌다. 임수명의 죽음에 대한 아래 신문 기사는 진한 메시지를 던져준다. 


“더구나 자기 남편은 그리운 조국을 벗어나 거치런 만주 뜰에 비상한 죽엄을 하고 어린 자식을 둔 외로운 홀어미가 원한과 간난 중에서 이 세상을 살라 하나 자기의 몸을 의탁한 남편이 이 세상을 떠난 이상에는 좁쌀만한 몸을 의지할 곳이 없고 차라리 멀리 황천으로 따라가 외로운 혼끼리 서로 위로하고 서로 의지하는 것이 쾌하겠다는 것이 이런 종막을 짓게 된 것이다. 남편이 민족을 위하여 죽고 아내는 남편을 따라 죽는 이 사실을 들을 때에 우리는 또다시 뜨거운 동정이 없지 못할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다

신팔균은 부유한 명문가에서 태어나 기울어가는 국운을 지키고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목숨을 걸고 항일투쟁에 나섰다. 군인으로서 가정의 안위와 개인의 영달을 버리고 독립을 위해 싸우다가 총탄을 맞고 장렬히 순국하였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독립군의 산증인으로 다가온다.     

독립운동가 중에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한 인물이 적지 않았다. 안중근·이회영·이상룡 일가는 대표적인 가문이다. 이들은 국망에 즈음하여 국권 회복과 조국 독립을 위해 존귀한 목숨까지 민족 제단에 바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자신뿐만 아니라 부인이 독립운동을 하다가 남편 사망 소식을 듣고 순국한 경우도 있었다. 바로 신팔균과 임수명 부부와 가족이 대표적인 경우로 심금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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