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무궁화가 국화(國花)가 되기까지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BR />

글 이계형(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우리나라 상징물 가운데 가장 소외된 것이 무궁화가 아닌가 한다. 태극기와 애국가는 대내외 행사에서 게양되고 울려 퍼지지만 국화인 무궁화는 상대적으로 덜하다. 그만큼 관심도 적다, 누군가는 진딧물이 많고 꽃도 그리 예쁘지 않다고 하고 어떤 이는 이를 폄훼, 왜곡하는 책자를 출간한 적도 있다. ‘무궁화’의 의미와 역사를 안다면 인식이 달라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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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억(좌) / 남궁억이 고안한 무궁화 자수 본에 수를 놓은 자수 지도(우)


무궁화는 언제부터 나라의 상징이었나

오늘날 무궁화(無窮花)로 불리기 전 이 땅에는 오래전부터 근(槿), 근화(槿花)가 있었고, 중국에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지리서 『산해경(山海經)』에는 “군자국(君子國)은 대인국(大人國) 북쪽에 있다. 사람들은 의관을 갖추고 칼을 차며 짐승을 주식으로 한다. (중략) 근(槿)이라는 풀이 자라는데, 아침에 났다가 저녁에 죽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꽃이라 신기하게 여긴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나라는 ‘근역(槿域)’이란 별칭을 갖게 되었고, 신라 혹은 고려시대에는 ‘근화향(槿花鄕)’으로 부르기도 했다. 1910년 9월 경술국치 이후 자결 순국한 황현은 절명시에 “근화세계이침륜(槿花世界已沈淪, 이 땅은 이미 망했구나)”이라며 침통해 했다.      

그렇다면 ‘무궁화’로 불린 것은 언제부터일까? 1896년 11월 독립문 정초식 당시 배재학당 학생들이 불렀다는 애국가 후렴구에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이 회자되면서 ‘무궁화’가 대중화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때 처음으로 ‘무궁화’가 등장한 것은 아니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1241)에 ‘무궁(無窮)’ 및 ‘무궁(無宮)’이란 표현이 있고, 조선 초 의약서인 『향약집성방』(1433)에 ‘無窮花木’(무궁화목)으로, 최세진이 지은 『사성통해(四聲通解)』(1517)과 『훈몽자회』(1527), 그리고 허준의 『동의보감』(1613)에도 ‘무궁화’로 기록되어 있다.      

무궁화는 새벽녘에 피기 시작하여 오후가 되면 오그라들었다가 해 질 무렵에 떨어지지만, 다음 날 아침이면 다른 가지에서 새 꽃이 핀다. 이러길 무더운 여름 8월부터 10월까지 100일 동안 한 그루에서 무려 3천 송이가 피고 지니 ‘무궁화’란 이름이 제격이 아닐 수 없다, ‘일편단심’, ‘영원’, ‘은근과 끈기’라는 꽃말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 때문인지 일제강점기에 ‘무궁화’는 탄압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를 기렸던 이들도 고초를 겪어야 했다. 반대로 독립운동가들은 이를 조국 독립의 표상(表象)으로 내세웠다.       

무궁화가 우리나라 상징으로 등장한 것은 대한제국 시기이다. 으레 대한제국 문장하면 오얏꽃을 떠올리겠지만, 무궁화 문양 또한 폭넓게 사용되었다. 1892년 인천전환국에서 제조한 5냥 은화에 무궁화 가지 도안이 사용된 이후 1905년까지 이어졌고, 1900년에는 훈장(자응장)과 외교관·문관 대례복에 무궁화 문양이 전면적으로 새겨졌다. 1902년에 제정된 ‘대한제국 애국가’의 인쇄물 표지 중앙에 태극을, 주위에는 네 송이의 무궁화를 그려 넣었다. 통감부가 들어선 뒤 친임관(황제가 직접 임명장을 주는 최고 고등관)과 칙임관(정1~종2품 최고관리)의 대례복 모자, 소매, 등, 허리에 각각 무궁화 한 송이씩이 새겨졌는데 감춰졌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무궁화를 국화로 인식하여 ‘무궁화가’가 널리 퍼지면서 일제강점기에 ‘무궁화’는 우리 민족의 희망을 상징했다. 

 

민족의 염원이 담긴 무궁화가 되기까지

1919년 3·1운동 이후 무궁화 강산, 무궁화 삼천리 동산 등이 널리 혼용되었고 다시금 근화, 근역 등의 용어가 회자되었다. 「무궁화」 잡지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이에 일제는 1920년대 후반부터 ‘무궁’이란 말을 트집 잡아 민족운동의 일환이라면서 출판물을 불허하거나 기사를 삭제토록 하였다. 무궁화 보급 운동을 벌였던 남궁억은 1933년 11월 무궁화 십자당 사건으로 피체되었다가 고령에 석방되었지만 이내 고문 여독으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한편,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1운동을 배경으로 한 창작극 ‘무궁화의 노래’를 공연하였고, ‘무궁화 애국가’를 공식 행사에 불렀으며, 광복군 장교의 군복에 무궁화를 새기고 색깔로 계급을 구분하기도 하였다.     

광복 후 무궁화는 민족정신으로 되살아났다. 1946년 1월 경찰 복장의 견장, 모장(帽章), 단추 등은 무궁화로 바뀌었고, 법관의 의장 역시 무궁화 가지에 13도를 상징하여 열세 송이의 무궁화가 달렸다. 이외에도 담배 이름이나 우표, 엽서, 지폐에도 무궁화 도안을 사용하였다. 그해 4월 광복 후 첫 식목일에 전국적으로 무궁화를 심었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급행열차 이름이 ‘무궁화호’로 바뀌었고, 태극기 깃봉에 무궁화 봉오리를 제작토록 하는가 하면, 대한민국 중앙정부 공무원의 휘장을 무궁화로 정하였다. 1950년 4월에는 은색 봉황새와 금색 무궁화가 새겨진 대통령기를 만들었다.     

오늘날에도 무궁화는 외국에 보내는 공문서와 국가적 중요 문서, 기타 시설물, 물자 등에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휘장으로, 나라 문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대통령의 관저, 집무실 등과 대통령이 탑승하는 항공기·기차·자동차 등에 사용하는 대통령 표장 중심 부분에 무궁화가 자리 잡고 있다. 우리나라 가장 높은 등급의 훈장 명칭이 ‘무궁화대훈장’일 뿐 아니라 훈장 도안도 무궁화로 장식되어 있고, 대통령·국무총리 표창장과 그 외 각종 상장도 무궁화 도안이 들어 있다. 국회기·법원기 등에도 무궁화 도안 중심부에 기관 명칭이 새겨 있고, 국회의원·지방의회 의원 배지, 장·차관 등의 배지도 무궁화를 기본 도안으로 하고 있으며, 군인·경찰의 계급장 및 모자챙 그리고 모표 등에도 무궁화가 있다. 정부에서 주관하는 국경일 등 각종 행사에 무궁화를 장식하며, 독립운동가의 묘소나 독립운동 사적지에도 무궁화를 심었다. 무궁화를 ‘국화’로 공식적으로 채택하지 않았지만, ‘국화’로서 인정한 셈이다.    

무궁화는 하루 동안만 피지만, 다른 가지에서 또 다른 가지에서 매일 다시 꽃이 피어나는 것을 보면 참으로 굴곡진 우리 역사와 많이 닮아있다. 광복 후 유행한 〈귀국선〉의 노랫말에 “돌아오네 돌아오네 고국산천 찾아서 / 얼마나 그렸던가 무궁화 꽃을 / 얼마나 외쳤던가 태극 깃발을 / 갈매기야 웃어라 파도야 춤춰라 / 귀국선 뱃머리에 희망도 크다”라며 귀국 동포들의 감격스러운 심정이 담겼는데, 여기서도 애타게 그리던 조국 광복과 염원이 무궁화로 표현되었다. 당시 광복된 조국을 그리던 애달픈 심정은 아닐지라도 ‘무궁화’의 역사를 통해 그 의미를 새롭게 다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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