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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변호사로 추앙받는 사람들

INPUT SUBJECT

글 심희기(연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일제강점기 항일변호사들은 변호사 지위를 이용하여 피고가 된 독립운동가의 독립운동을 적극 변론하였다. 또 무죄를 역설하고 조선 독립의 대의를 역설하면서 법정을 투쟁의 장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법정에서의 갈등은 조선 사회에 전파되면서 독립운동을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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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재판 모습


일제강점기 변호사들의 활동

일제강점기 항일변호사들의 변론 중점은 피고인인 독립운동가들의 행위를 일제의 본국법과 조선총독부가 발령한 제령(식민지 법령)에 비추어 정당성을 논증해야 하는 일이었다. 때문에 일제의 성문법 체제 바탕 위에서 그 법령들의 치밀한 해석론을 펼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알게 모르게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인정하게 되므로 식민지 법정에서 독립을 변호하는 일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거나,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굴욕적인 것이 아니냐는 자조나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예를 들어 “일제의 법률을 전공하여 변호사 자격증을 딴 이들이 일본어로 진행되는 법정에서 일제 법률에 따라 어떻게 일제의 식민지배를 부정하는 독립운동을 변호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물으면 어떻게 답할 것인가? 그에 대한 답변은 다음과 같이 가능할 것이다. 일제 법률이 무조건 조선 민족을 억압하는 측면만을 가진 것이 아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법 안에 부분적으로 검찰·경찰·법원의 권력 남용을 억제하는 법리가 있어, 항일변호사들이 잘 활용하기만 하면 독립운동가 이익에 도움이 되는 변호 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한편 변호사에게는 다음과 같은 특권 및 지위가 있어 독립운동가들에게 편의를 제공할 수 있었다. 일제의 법률을 전공하여 자격증을 땄다는 사실로 인해 일제하의 변호사는 경찰도 함부로 폭행이나 구금을 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변호사가 문제 지역을 방문할 때는 그 지역의 행정관청은 물론 경찰도 그 방문을 봉쇄하기가 쉽지 않았다. 또 변호사에게는 일반 사회운동가들에게 허용되지 않는 관청과의 접촉도 가능하였다. 따라서 항일변호사들은 피고인에 대한 요식적 변호 행위로 끝내지 않고, 변호사 지위를 이용하여 피고인들의 독립운동을 적극 변론할 수 있었다. 또 무죄를 역설하고 조선 독립의 대의를 역설하면서 법정을 투쟁의 장으로 바꾸어 놓았다. 법정에서의 갈등은 언론을 통해 생중계하듯이 조선 사회에 전파되면서 독립운동을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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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특별재판부 재판장을 맡은 김병로(좌) / 경성법학전문학교(우)


소수 항일변호사들의 선택

일제강점기에 법학교육을 받기 위해서는 경제적으로 재력이 있는 가정에서 태어나야 했다. 더불어 변호사 자격을 취득해야 판사·검사로 임용될 수 있었으며, 변호사로 개업하면 높은 수임료를 받아 윤택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유리한 지위를 획득했으면서도 굳이 가시밭길을 택한 소수의 변호사들이 있었으니, 사람들은 그들을 항일변호사, 사상변호사, 무료변호사 등으로 불렀다.      

이 소수의 항일변호사들은 식민지 법정에서 법정투쟁 등으로 나라의 독립을 변호하였다. 때로는 독립운동가들과 같이 호흡하고 연대하며 전개한 이들의 법정 변론이 독립운동의 파장을 증폭시켜 일제를 당혹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항일변호사들은 일제의 탄압을 받아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거나 감옥에 갇혀 옥고를 치르기도 했지만 대부분 끝까지 변절하지 않았다. 항일변호사 중에는 일제 국적을 가진 변호사도 있었다. 조선판 쉰들러라고도 할 수 있는 일제의 양심적 변호사들이 있다면 그들의 활동도 조명해야 할 것이다.     

항일변호사들의 경우 민족주의 사건은 물론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사건의 피고인들을 변호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항일변호사들은 사건 의뢰인이 좌파든 우파든 그들의 주장에 공감하여 법정투쟁에 나섰다. 대체로 사회주의 운동가들과 교류하면서도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되지는 않았다.      

이로 인해 항일변호사들은 좌·우 모두에게 인정받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고, 점차 민족 지도자로 성장하여 광복 이후 새로운 국가건설운동에서도 핵심 세력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우리는 항일변호사들의 이러한 개방성과 유연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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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회 울산지회 창립 1주년 기념


대표적인 항일변호사들

일제강점기 항일변호사로는 흔히 세 사람이 언급되고 있다. 이들은 긍인 허헌(許憲)(1885~1951), 가인 김병로(金炳魯)(1887~1964), 애산 이인(李仁)(1896~1979)이다. 그 외에 두 사람을 더 추가한다면 근암 권승렬(權承烈)(1895~1980)과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츠지(布施辰治)를 들 수 있다.      

허헌은 3·1운동 재판에서 관할 문제를 놓고 이른바 공소불수리론을 전개하여 경성지방법원에서 공소불수리 판결을 얻어 낸 것으로 유명하다. 이 판결은 항소심에서 파기되었지만 기선을 제압한 결과 조선독립선언을 한 33인 등이 예상보다 가벼운 선고를 받게 된 계기로 작용하였다.      

김병로와 이인은 국내에 잠입해 일제와 투쟁을 벌인 의열단원들과 독립운동을 이유로 경찰에게 무지막지한 고문을 당한 평북 희천군 주민과 대구·경북의 독립운동가들의 사건을 변호하면서 변호사로서의 성가를 날렸다. 이들은 경성조선인변호사회를 출범시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별도로 형사공동연구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항일변론운동에 조직력을 제공하였다.1920년대 후반부에는 좌우 합작을 도모한 신간회 활동을 이어나갔다. 허헌과 김병로는 신간회의 핵심 간부로 참여하면서 국내 수많은 민중운동을 도우며 민족의 권익 보호에 앞장섰다. 또한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진상을 전국적으로 알리는 민중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들 자신이 투옥되는 고난을 치렀다. 세 사람은 조선공산당, 고려혁명당 등 1920년대 후반의 주요 사상사건의 변호에도 뛰어들어 피고인들과 연대하여 공판 투쟁을 전개하였다. 김창숙, 여운형, 안창호 등 해외의 저명한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조선으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을 때에도 공판에 관여하였다. 이들은 처음에 변호 활동에 주력하였지만, 때로는 그들과 깊이 연대하여 1930년 이후에는 변호사 등록 취소나 정직 처분을 받기도 하였다. 허헌과 이인은 투옥되어 고문을 받았으며, 김병로는 향촌으로 은둔하는 생활을 하면서 항일변호사로서의 절개를 잃지 않았다.     

이들 세 사람 외에도 안병찬, 이면우, 김태영, 권승렬, 이창휘, 윤태영 등의 조선인 변호사들이 함께 활동하였다. 허헌, 김병로, 이인, 권승렬 모두 친일 협력의 경력이 전혀 없는 인물들이다. 해방 공간에서 대부분의 항일변호사들은 사법부의 주요 요직에 임명되었는데, 이에 대하여 좌우 어느 쪽에서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한편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된 후세 다츠지의 경우 광복 이후에도 재일 동포의 민족적 변론에 헌신하는 등 변호사로서 몸소 인권과 평등의 실천을 보여준 대표적인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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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김병로, 권승렬, 후세 다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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