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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변호사

허헌과 이인의 활약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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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심희기(연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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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헌(좌) / 허헌의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우)


허헌의 공소불수리론

3·1 만세운동 사건의 예심판사는 피의자들의 행위를 내란죄에 해당하는 사건이라고 판단하였다. 당시 형사법제에 따르면 내란죄 피고사건은 조선의 최고 법원인 조선고등법원의 관할에 속하는 사건으로, 조선고등법원에서 내란죄의 유죄·무죄 여부를 심리하게 되었다. 그런데 조선고등법원은 피고인들의 의도에 대해 ‘폭력을 수반하는 폭동’을 일으키려는 게 아니라 비폭력·평화적 시위를 도모하였기에 이 사건을 내란죄 위반 사건이 아니라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고등법원의 관할 사건이 아니라고 판단한 다음 제1심 관할은 경성지방법원에 있다고 지정하였다. 그러자 검사는 경성지방법원에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독립선언과 만세 사건 피의자들을 기소하였다.      

여기서 유명한 허헌의 공소불수리론이 나오게 된다. 피고인들의 변호인으로 선임된 허헌은 조선고등법원 특별형사부의 결정서에 “그 주문(主文)에서 단지 경성지방법원을 관할 재판소로 지정한다고 기재했을 뿐이고 사건을 경성지방법원에 송치한다는 결정이 없으므로, 경성지방법원은 본 사건을 수리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로 주장하였다.      

이러한 허헌의 주장은 변호인의 법적인 의견일 뿐이지 재판부가 변호인의 의견에 구속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 사건의 검사는 조선고등법원의 주문만 볼 것이 아니라 주문을 이유(理由)와 함께 고찰해야 한다며, 그렇게 보면 주문의 관할 지정에 당연히 송치 결정이 포함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재판부가 어떤 의견을 따를 것인지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고, 검사의 의견이 채택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였다.      

그러나 재판부는 ① 사건 ‘지정’ 결정은 사건 ‘이송’ 결정이 아니고, ② ‘지정’한다는 문언에 ‘이송’ 한다는 의미는 포함되지 않으며, ③ 이유에 ‘송치’한다는 내용이 있다고 하여 주문상 ‘지정’의 의미를 변경할 수 없고, ④ 공소불수리 결정을 하게 되면 중대 안건의 진행에 지장을 초래한다는 검사의 주장도 형사정책상 취할 주장이 아니며, ⑤ 상급 재판소(조선고등법원)의 결정이라고 하더라도 하급심이 이에 구속되지 않고 별도로 해석할 수 있음은 재판권의 독립의 문제이므로 변호인이 주장한 ‘공소불수리 결정’이 타당하다고 판단하였다. 재판부는 거의 전폭적으로 허헌의 주장을 수용한 것이다.      

이 결정의 파장은 막대하였다. 이 사건과 연계되어 진행된 사건은 총 10건에 달했는데 이 사건들이 모두 공소불수리 결정이 난 것이다. 물론 검사는 제1심 결정에 불복하여 항소하였다. 예상대로 항소심은 제1심 결정을 파기하고 본안심리를 진행하여 피고인들에게 유죄 판결을 선고하였다. 이 같은 허헌의 변론 활동으로 인해 3·1운동으로 공판에 회부된 33인과 전국의 많은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형벌의 수위가 당초 예상보다 이례적으로 낮아지게 되었다. 피고인이었던 독립운동가들은 고등법원에의 상고를 포기하여 항소심 재판이 확정되었다.    

해당 사건의 판결 이후 불과 한 달 뒤에 이루어진 판사·검사 인사에서 공소불수리 재판을 한 판사는 대구복심법원으로 좌천되었고, 반면에 경성지방법원에 관할권이 있다고 주장하여 항소심에서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킨 검사는 검사장으로 승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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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좌) / 제1경성변호사회 창립 기념에서 이인(우)


이인과 조선어학회 사건

1942년 10월 일제가 조선어학회 회원 및 관련 인물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하여 재판에 회부한 조선어학회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에서 이인은 단순한 변호인이 아니라 피의자·피고인의 지위에 서게 된다. 한말에 일어났던 한글운동이 3·1운동 후 다시 일어나면서 1921년 12월 조선어연구회(뒤에 조선어학회로 이름 변경)가 창립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조선어사전편찬회가 조직되었다.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후 중국 침략을 목전에 두고 조선민족사상을 꺾고 나아가 조선 민족을 말살하기 위해 조선어 교육을 단계적으로 폐지하였다. 1941년에는 조선 사상범 예방구금령을 공포하여 독립운동가를 언제든지 검거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다.      

조선어학회는 사전의 편찬을 서둘러 1942년 4월에 그 일부를 출판사에 넘겨 인쇄하였다.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함흥 영생고등여학교 학생 박영옥이 기차 안에서 친구들과 한국말로 대화하다가 조선인 경찰관에게 발각되어 신문을 받게 되었다. 일본 경찰은 신문 결과 여학생들에게 민족주의 감화를 준 사람이 서울에서 사전 편찬을 하고 있는 정태진임을 파악하였다. 같은 해 9월 5일에 정태진을 연행해 신문하여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 단체로서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이 자백을 단서로 하여 일제는 3·1운동 후 부활한 한글운동을 폐지하고 조선민족 노예화에 방해가 되는 단체를 해산시켰으며, 나아가 조선 최고의 지식인들을 모두 체포할 수 있는 꼬투리를 잡게 되었다. 피의자들을 신문한 홍원경찰서에서는 사전 편찬에 직접 가담했거나 재정적 보조를 한 사람들 및 기타 협력한 33명을 모두 치안유지법상의 내란죄로 몰았다.      

그중 이인은 경성에서 체포되었다. 이인은 조선어학회의 자매기관이라 할 만한 조선기념도서출판관을 발기하는 데 앞장섰기 때문이다. 조선어학회 관련 피고인은 모두 33명이었고, 구속된 인원은 29인이었다. 이인에 대한 취급은 특이했다. 경성에서 체포된 다른 인사들은 함북 홍원경찰서로 끌려갔는데, 이인만 함남 함흥경찰서로 유치되었다. 아마도 항일변호사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유치하면 무슨 말썽을 빚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함흥에 격리시킨 것으로 추정된다. 이인은 이 시절에 겪은 고문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내가 당한 고문은 견디기 어렵다는 아사가제라는 것과 비행기 태우기가 있었다. 사지를 묶은 사이로 목총을 가로질러 꿰 넣은 다음 목총 양 끝을 천장에 매달아 놓아 비틀고 저며들게 하는 것이 비행기 타기요, 두 다리를 뻗게 한 채 앉혀놓고 목총을 두 다리 사이에 넣어 비틀어대는 것이 아사가제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중에 더욱 괴로운 것이 아사가제이니, 나는 이로 인해 평생 보행이 부자유스러울 만큼 다리가 상했다.”

이인, 『반세기의 증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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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의 증언』 표지(좌) / ‘제2차 의열단사건’의 변론을 맡은 이인, 『동아일보』 (1923. 4. 12.)(우)


공판 후 피고인들에게는 “고유 언어는 민족의식을 양성하는 것이므로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은 조선민족정신을 유지하는 민족운동의 형태”라는 함흥지방재판소의 예심종결 결정문에 따라 치안유지법상의 내란죄가 적용되었다. 이들에 대한 함흥지방재판소의 재판은 1944년 12월부터 1945년 1월까지 9회에 걸쳐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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