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산책

식민지배에 맞선 

베트남의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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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재현(목포대학교 사학과 교수)



1945년 9월 2일 호찌민은 베트남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포하였다. 이는 80여 년에 걸친 프랑스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베트남인들의 열망을 담은 외침이었다. 베트남 독립운동은 한국의 독립운동과도 인연이 깊다. 베트남이 주권을 빼앗기는 과정을 서술한 『월남망국사』는 출간된 이듬해인 1906년 우리나라에 소개되면서 한국 지식인들에게 경종을 울렸다. 또한 1919년에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회담이 열리고 있던 파리를 찾은 김규식 등의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호찌민과 만나서 교류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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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당국에 체포된 베트남국민당의 지도자 응우옌타이혹(1930)             


독립운동의 시작

베트남은 19세기 후반에 프랑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먼저 남부 지역이 1858~1867년에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고, 북부와 중부 지역은 1883년에 체결된 보호조약을 통해서 프랑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식민지배에 대한 베트남인들의 저항은 프랑스의 식민지 정복이 시작되는 것과 동시에 터져 나왔다. 1885년 7월 5일 섭정 대신인 똔텃투옛은 어린 함응이 황제를 데리고 몰래 궁을 빠져나가서 황제의 이름으로 프랑스의 침략에 저항하자고 호소하는 근왕령을 반포하였다. 이에 각지에서 관리, 유생, 지주 등이 호응하여 농민들을 이끌고 무장 저항운동을 펼쳤다. 근왕운동이라 불리는 이 운동의 목표는 한국의 위정척사운동처럼, 외세의 침략을 몰아내고 과거의 정치·사회 질서로 돌아가는 데 있었다. 근왕운동은 프랑스의 식민 지배가 정착하는 것을 끈질기게 방해했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1900년 이후 새로운 세대의 독립운동가들이 택한 방법은 그들의 선배인 근왕운동의 지도자들과는 사뭇 달랐다. 그들은 조국의 독립과 함께 사회의 변화를 모색하였고, 베트남 사회가 바뀌지 않는다면 독립을 이루는 것도 불가능하리라 생각했다. 이러한 흐름을 대표하는 두 인물은 판보이쩌우와 판쩌우찐이었다. 둘 다 어려서 유학을 공부했지만, 중국에서 건너온 ‘신서(新書)’를 통해 서양의 지식을 배웠다. 이들은 군주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식민지배에 저항했다는 점에서 베트남 최초의 근대적 민족주의자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둘의 행보와 사상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판보이쩌우는 무장 투쟁을 통해서만 독립이 가능하리라 보았고, 이를 위해서라면 전통적 지배 세력과도 손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반대로 판쩌우찐은 독립이라는 장기적 목표 아래에서 먼저 베트남 사회를 개혁하고 민족의 역량을 키우는 데 역점을 두었으며, 이를 위해서 당장은 식민당국과도 협력하고자 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두 가지 노선 모두 프랑스 당국의 탄압을 받아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독립운동의 급진화

1920~1930년대 베트남의 젊은이들은 어려서부터 식민당국이 세운 학교에서 공부를 해서 프랑스 문화에 익숙한 세대였다. 하지만 프랑스인과 동등한 기회를 부여받지 못하고, 억압적인 통치로 일관하는 식민지배의 현실에 크게 실망하였다. 더군다나 당시에 폭발적으로 증가한 베트남어 신문들이 이들의 민족의식을 북돋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보다 더 급진적인 경향의 독립운동이 출현하였다.     

1927년에는 교사와 학생, 언론인이 중심이 되어 베트남의 독립과 공화정의 건설을 열망하는 베트남국민당이 결성되었다. 국민당 지도부는 일단 자신들의 주도하에 봉기가 시작되면 민중이 합세하리라 기대하면서 1930년 2월 베트남 북부의 옌바이라는 도시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이는 민중 봉기로 이어지지 못한 채 실패로 막을 내렸다. 국민당 지도부 대부분은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프랑스 식민당국은 옌바이 사건에 경악했다. 그러나 그 뒤에 식민당국이 취한 정책은 개혁으로 베트남인들의 마음을 돌려놓으려는 것이 아니라, 더 가혹한 탄압으로 독립운동의 성장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이는 더 많은 이들을 독립운동에 투신하도록 할 뿐이었다. 나아가 옌바이 사건은 비공산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을 와해하고 공산당 세력이 확산하는 발판이 되었다.     베트남의 공산주의 운동은 호찌민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910년대 말부터 1920년대 초까지 파리에 머물던 시절에 공산주의 사상을 처음으로 접한 그는 소련과 국제 공산주의 운동이 식민지 해방 운동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라고 생각했다. 1925년부터 호찌민은 베트남에서 멀지 않은 중국 남부의 광저우에 거처를 마련하고, 혁명 운동에 투신할 이들을 모집하는 데 주력하였다. 공산주의 사상이 점차 베트남에 확산하면서 1930년에는 인도차이나공산당이 결성되었다.     

1930~1931년에 베트남 중부 지역에서는 대규모 농민 봉기가 일어났고, 공산당 당원들이 이에 깊숙이 개입하였다. 식민당국은 공중 폭격까지 하면서 봉기를 무자비하게 진압하였으며, 수많은 공산주의자를 체포하거나 처형하였다. 처형을 면한 이들은 남부의 외딴섬에 있는 수용소에 감금되었다.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이곳은 전국에서 온 독립운동가들이 유대감과 독립에 대한 의지를 다지는 ‘혁명의 학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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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응우옌지압 장군(좌)과 호찌민(우)(1945)           


베트남의 독립

견고한 듯 보였던 프랑스의 지배가 휘청이게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부터였다. 1940년 6월 일본군이 베트남에 진주하였다. 일본에 협력하는 대가로 유지되던 프랑스의 베트남 지배는 1945년 3월 일본이 베트남의 모든 프랑스 관리와 군인을 체포하고, 친일 괴뢰 국가를 수립함으로써 종식되었다.       

한편 호찌민과 공산당원들은 베트남 북부의 산악 지역에서 베트남의 진정한 독립을 획득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들은 공산주의에 적대적인 이들을 아우르기 위해 1941년에 베트남 독립동맹(비엣민)을 결성하였으며, 그 뒤로는 비엣민의 이름으로 모든 활동을 펼쳤다.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자 비엣민은 8월 혁명이라 불리는 전국적 봉기를 일으켜서 재빨리 권력을 장악하고 9월 2일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렇지만 이는 1954년까지 계속될 기나긴 독립전쟁의 시작에 불과했다.식민지의 독립을 허용할 생각이 없었던 프랑스는 대규모 병력을 보내서 베트남을 재침공하였다. 그리하여 시작된 인도차이나 전쟁은 1954년 3~5월에 펼쳐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비엣민 군대가 프랑스군에 참패를 안긴 뒤에야 종식되었다.      

베트남 독립운동의 역사는 단순히 식민지배에 맞선 투쟁의 역사만이 아니다. 베트남의 독립을 열망하고 이를 위해서 목숨까지 내던진 사람들 중에서도 독립을 달성하는 방법과 독립 후 베트남의 미래에 대해서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공존하였다. 이들 사이에 벌어진 갈등은 식민지배를 몰아낸 뒤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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