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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학회 사건과 

우리말 지키기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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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신용하(서울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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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학회 사건 수난 동지회(1946)

조선어학회의 탄생

일제의 우리말과 우리글(한글) 말살 정책에 대항하여 학자들은 개인 또는 조선어연구회 등 단체를 조직하였고, 민족의 언어를 지키기 위해 투쟁하였다. 학생들은 조선어연구회 회원들과 민족 신문의 지원을 받으며 여름과 겨울 방학 때 계몽운동과 야학을 통해 동포들에게 한글을 가르쳐서 우리말과 우리글 지키기에 동참하였다. 조선어연구회는 1931년 1월 10일 명칭을 ‘조선어학회’로 바꾸어 계속 완강하게 활동하였다. 

조선어연구회 회원들의 활동으로는 ① 전국 순회 계몽 강연 ② 가갸날(한글날)의 제정(1926) ③『한글』 잡지의 발간(1927) ④ 조선어 철자법(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1930~1933) ⑤ 조선어 표준말 사정 완성(1934~1936) ⑥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제정(1931~1940) ⑦ 『조선말 큰사전』 편찬 사업 진행 등이 대표적이었다. 

조선어연구회 회원들은 단체 활동과 함께 개별적으로도 한글을 연구·저술하여 등사하거나 간행하기도 하였다. 1920년대 전후의 대표작들은 다음과 같다.


1. 주시경, 『말의 소리』, 신문관, 1914.

2. 김두봉, 『조선말본』, 새글집, 1916. 

3. 안확, 『조선문법』, 회동서관, 1917.

4. 최재익, 『조선어의 선생』, 대판옥호서점, 1918. 

5. 이규영, 『한글적새』(전6권), 미간행, 1919. 

6. 이규영, 『현금조선문전』, 신문관, 1920.

7. 강매, 『조선어문법제요』, 광익서관, 1921. 

8. 김두봉, 『깁더 조선말본』, 상해, 1922.

9. 권덕규, 『조선어문경위』, 광문사, 1923. 

10. 이규방, 『신찬조선어법』, 이문당(以文堂), 1923.  

11. 이진환, 『조선문직해』, 덕흥서림, 1924. 

12. 이상춘, 『조선어문법』, 개성영남서관, 1925.

13. 최현배, 『우리말본』, 연희전문학교출판부, 1929.

14. 장지영, 『조선어철자법강좌』, 활문사,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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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말큰사전』 표지와 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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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학회 기관지  『한글』


조선어학회 사건 조작

한글 운동은 일제의 각종 음험한 탄압을 받는 와중에도 뚜렷한 민족의식을 갖고 민족 보전과 독립을 위한 투쟁으로 실행되었다. 이러한 활동에도 일제는 3·1운동의 영향으로 만주 등지에서 한국 독립군의 무장투쟁에 맞서고 있던 터라 탄압할 역량이 부족하였다. 때문에 한국어·한글 연구에는 간악한 검열·억압만 이어가며 투옥은 하지 못하였다.

이후 일제는 ‘조선어학회 사건’을 조작하였다. 일제는 중앙에서부터 조선어학회를 탄압하면 한국인의 반발과 저항이 클 것을 염려하여, 우연히 지방에서 발각된 독립운동 사건으로 보이게 하려고 획책하였다. 이것은 일제의 중앙경시국이 조선어학회 기관지인 『한글』을 지방의 홍원경찰서의 내사보다 2개월 앞서 1942년 3월에 폐간시킨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1942년 5월 함경남도 홍원읍에서 한 일본인 형사가 불심검문에 불손한 태도를 보이는 백(白) 모 청년의 가택을 수색하게 되는데, 그 서적들 가운데 청년의 조카 백영옥(白永玉)의 일기장을 발견하여 조선인 형사 야스다(安田正黙)에게 조사하게 하였다. 그 일기장 2년 전 일기에 “국어(일본어)를 상용하는 학생을 처벌하였다”는 문구가 있었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일제가 다수 여학생들을 일주일 동안이나 구류하여 고문하면서 조사한 결과 이 문구는 백영옥이 반일감정에서 써넣은 것이었고, 실제로 일본어를 상용한 학생을 처벌한 교사는 없었다. 그러나 일제 형사는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은근히 불어넣은 교사로 공민 및 체육교사 김학준(金學俊)과 조선어 및 영어교사 정태진(丁泰鎭)을 주목하였다.

정태진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컬럼비아대학교에서 교육학을 전공한 후 귀국하여 영생여중학교에서 조선어와 영어를 가르쳤다. 이 과목이 폐지되자 그는 수학 및 수신을 담당하다가 2년 전 서울 조선어학회에서 조선말큰사전 편찬사업을 하고 있었다. 일제는 김학준은 문제 삼지 않았다. 조선어학회를 탄압하기 위해 1942년 9월 5일 정태진을 체포하였다. 일제는 잔혹한 고문을 가한 결과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자 집단임에 동의’하는 정태진의 자백을 받아냈다고 한 뒤 공작을 시작하였다. 

일제는 1942년 10월 1일 홍원경찰서 형사대로 우선 조선말큰사전 편찬 작업을 하고 있던 이극로, 정인승, 이윤재, 최현배, 이희승, 장지영, 김윤경, 권승욱, 한징, 이중화, 이석린 등 11명을 체포하였다. 뒤이어 1942년 10월 21일 이만규, 이강래, 김선기, 이병기, 정열모, 김법린, 이우식 등 7명을 체포하였다. 그리고 12월 23일 3차로 윤병호, 서승효, 김양수, 장현식, 이인, 이은상, 정인섭, 안재홍 등 8명을 체포하였다. 이어서 1943년 3월 5~6일에 김도연과 서민호를 체포했으며, 3월 31일과 4월 1일에는 신윤국과 김종철을 체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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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정태진(1903~1952) / 이윤재(1888~1943) / 한징(1886~1942)


조선어학회 해체와 갖은 고문

일제는 조선어학회를 불온단체로 불법화하여 강제 해산시켰을 뿐만 아니라, 10년간 각고 끝에 만든 『조선말큰사전』 원고 3만 2천 장(400자 원고지)과 20만 장에 달하는 어휘 카드를 모두 압수하여 한국어 사전 편찬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었다.체포한 조선어학회 회원들에게는 잔혹한 고문을 가하였다.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자 집단이었음은 이미 모든 한국인이 알고 있던 사실이었으므로, 일제는 더욱 독립운동에 관여한 것으로 꾸미려고 획책하였다. 일제는 학자들을 목총으로 구타하고, 두 팔을 등 뒤로 묶어서 천정에 매달고 돌리는 비행기고문을 가하기도 했으며, 불에 달군 쇠꼬챙이와 끓는 물의 고문을 가하기도 하였다. 일제는 이윤재 등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인 김두봉을 만나 자금을 제공했다는 둥, 김두봉을 통하여 사전 편찬 사업을 위장하고 조선의 독립을 추진했다는 둥, 이극로를 대통령으로 정인승을 내무장관으로 하여 국내 임시정부를 수립하려 했다는 둥 갖가지 자백을 하라고 강요하였다.

일제는 체포한 조선어학회 회원들 가운데 이극로, 이윤재,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정태진, 김양수, 김도연, 이우식, 이중화, 김법린, 이인, 한징, 정열모, 장지영, 장현식 등 16명을 기소하였다. 기소 후에도 재판을 하지 않고 감방에 투옥하여 고문과 심문을 거듭하던 중에 이윤재(1943. 12)와 한징(1944. 2)이 옥사하였다. 다른 이들의 경우 1945년 1월 16일 함흥지방법원에서 판결을 언도받았다. 일제가 조선어학회 회원들에게 적용한 죄목은 ‘치안유지법 위반’이었다. 일제에 의해 체형을 언도받은 5인 가운데서 정태진을 제외한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등 4인은 이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했으나, 일제는 1945년 8월 13일 이를 기각하였다. 그리고 이틀 후 광복을 맞으며 이들은 약 3년의 옥고를 치르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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