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관

『찬미가』 와 「거국가」

인문학관

글 김동수(백제예술대학교 명예교수·시인)


윤치호의 『찬미가』

윤치호는 1865년(고종 2년) 충남 아산 출생으로, 개화당이었던 아버지 윤웅렬의 영향으로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에 개화 계몽 운동에 힘썼다. 그는 1881년 16세에 조사시찰단의 일원이었던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그때 시찰단의 일부는 일본에 남아 신학문을 공부하였는데 윤치호도 도시샤학교에 입학하여 2년간 서양학문을 익혔다. 당시 근대화된 일본의 현실을 체험한 그는 조국의 근대화가 필요함을 절감하고, 이후 중국 상하이와 미국에서 근대 교육을 받았다. 

그러던 중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관직을 사퇴한 뒤, 1906년에 장지연·윤효정 등과 대한자강회를 조직하였고 회장으로 추대되어 교육사업에 힘썼다. 1907년에는 안창호, 양기탁, 이동휘 등과 함께 신민회를 설립하여 국민 계몽운동에 헌신하였다. 

이후 1908년 안창호 등이 주도한 평양 대성학교 교장과 대한 기독교 청년회 연맹(YMCA)의 이사와 부회장 및 세계 주일학교 한국지회의 회장에 선임되어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윤치호의 신앙사상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은 1908년 그가 편집 발행한 『찬미가』가 있다. 15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찬미가』에는 그가 작사한 「애국가」 세 편이 들어 있다.

윤치호는 1911년 일제가 민족 지도자를 말살하기 위해 날조한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6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가 3년 만에 석방되었다. 출옥 후에는 YMCA의 총무와 회장으로 활동하였고, 연희 전문학교·이화 여자전문학교 이사와 송도 고등보통학교와 연희 전문학교의 교장 등을 역임하였다. 하지만 1920년부터 친일 단체와 모임에 깊이 관여하면서 조선총독부 일간지인 『매일신보』에 일본 제국주의를 찬양하고 중일전쟁에 청년들이 자원입대할 것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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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토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대한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히 보전하세.윤치호의 

『찬미가』 제14장 1절


안창호의 「거국가」

그런가 하면 안창호는 조국이 독립 하려면 먼저 선진국을 보고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 1902년 부인과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24세 때 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904년에는 신학강습소에서 신학을 공부하였고, 1905년에는 공립협회를 조직하여 민족 독립과 계몽에 힘써 『공립신문』을 발행하기도 하였다.

1907년 안창호는 공립협회가 샌프란시스코에 자리를 잡고 애국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게 되자 국내로 돌아온다. 이후 비밀결사체인 ‘신민회’를 조직해 애국지사들의 구국운동을 총지휘하고, 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여겨 평양에 대성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러던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사건의 거사가 일어나자 일본 헌병대는 이것이 신민회의 짓이라 생각하였다. 이어 대성학교 교정에 있던 안창호를 즉각 체포하여 서울로 호송한 뒤 용산 일본 헌병대에 감금하였다. 이어 각처에서 신민회 중심인물들을 검거하였다. 몇 달 후에 석방되었으나 일본의 탄압은 날로 심해졌고, 1910년 안창호는 앞날의 승리를 약속하면서 「거국가」를 남기고 망명길에 올랐다.

국권 상실 전 조국을 떠나며 당시의 심회를 읊은 이 노래는 「거국행」,「한반도 작별가」라고도 불린다. 1절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이별에 대한 고국에의 위무를, 2절에서는 복받치는 울분을 누르며 독립 의지를 다짐하고 있다. 3절에서는 한결같은 조국애의 기약을, 4절에서는 귀국할 때까지 조국의 안녕과 광명의 그날을 기약하는 염원을 담았다. 

거국가는 『대한매일신보(1910. 5.)』에 소개되었고, 이후 국외 동포 사회로 번져 나가 미주 『신한민보(1915. 11.)』에도 소개되었다. 이 노래가 민족 사립학교에서 애창되자 조선총독부에서는 일제 반항을 장려하는 노래로 지목하고 부르지 못하게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가는 역사적 상황과 시대의 회한을 토로한 민족 지도자의 표현으로 우리 민족에게 큰 힘을 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값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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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국가          

1.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잠시 뜻을 얻었노라 까불대는 이 시운이

나의 등을 내밀어서 너를 떠나가게 하니 

이로부터 여러 해를 너를 보지 못할지나.

그동안에 나는 오직 너를 위해 일할지니 

나간다고 설워마라 나의 사랑 한반도야.


4.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지금 이별할 대에는 빈주먹을 들고가나

후일 상봉할 때에는 기를 들고 올터이니

눈물흘린 이 이별이 기쁜 환영 되리로다.

악폭풍우 심한 이 때 부대부대 잘있거라

훗날 다시 만나보자 나의 사랑 한반도야.

안창호의 「거국가」 1절과 4절(2·3절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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