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인연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과 

동지 윤용자

아름다운 인연

글 김형목(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김좌진, 홍범도와 함께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지청천 장군은 후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을 역임하게 된다. 군인 신분으로서 오랜 시간을 전쟁터에서 보낸 그의 옆에는 묵묵히 가정과 가족을 지킨 아내 윤용자가 있었다. 부부는 인생의 동반자이자 독립운동 동지로서 자녀들까지 훌륭한 독립운동가로 키워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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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청천          

 

“나라의 흥하고 망함은 국민 모두의 책임이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국민 모두 힘을 모아 

생존을 침해하는 적과 맞서 싸워야 한다. 

독립은 남이 주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싸워 찾아야 하는 것이다. 

힘을 모으자. 살길은 하나다.”


조국 독립을 위해 성씨와 이름까지 바꾸다

지청천은 1888년 1월 25일(양력 3. 7.) 서울 삼청동 30번지에서 아버지 재선과 어머니 경주 이씨 사이에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충주로 조선 후기 이래 무관을 배출한 가문이었다. 아명은 수봉, 본명은 지석규와 지대형이나 후일 이청천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만주로 망명하면서 일제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이름을 바꾸었다. 어머니의 성씨와 같이 흔한 이씨로 고쳤다. 이름 중 ‘청’은 조국 독립을 위해 푸른 하늘에 맹세하려는 뜻이고, ‘천’은 하늘의 대공무사(大公無私) 함을 본받을 것을 맹서하였다. 백산이라는 호는 훗날 독립군 동지들이 지어준 것으로 백두산처럼 우뚝 서서 영원히 조국을 지키려는 의미였다.


신흥무관학교 교성대장으로 독립군 양성에 매진하다

다섯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열 살이 되던 해에 근대교육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엄격한 훈육으로 참된 인생의 가치를 일깨워주었다. 배재학당 재학 중에는 황성기독교청년회의 비밀 회합에서 “무장을 갖추고 조국을 되찾자”고 절규할 정도로 열혈 청년으로 성장하였다.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폐교된 후 근대적 군사 지식을 쌓아 구국의 간성이 되려는 일념으로 일본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갔다.

일제의 강제병합 이후 재학생들은 비분강개하는 분위기였다. 그는 “우리가 굴욕을 무릅쓰고 일본까지 온 이유가 무엇이오? 근대적인 군사교육을 받아 장차 나라의 중추가 되기 위함이었소. 그러나 나라가 멸망한 지금은 좀 더 침착해지고 냉정해질 필요가 있소. 우리가 일본에서 적국의 군사전술과 훈련 방식을 익혀 훗날 항일전의 유용한 도구로 사용한다면 그보다 더 현명한 투쟁 방법이 어디 있겠소”라고 설득하였다. 일본군 소위로 임관된 후 지휘관으로서 독일과 일본의 ‘청도대회전’에 참전하였다. 조국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전쟁이었기에 심리적인 동요가 적지 않았다. 

거대한 3·1운동 발발은 자신을 뒤돌아보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망명 기회를 노리던 그는 일본육사 선배인 김광서(후일 김경천)와 함께 중국 동북지역으로 탈출하였다. 망명 후 신흥무관학교 교관과 교성대장으로서 독립군 양성에 열정적이었다. 이들 졸업생과 서로군정서 병력을 이끌고 독립군 연합부대와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주역으로서 명성과 신망을 받았다. 이리하여 경천 김광서, 동천 신팔균과 함께 ‘만주 3천(滿洲三天)’으로 이름을 떨치는 계기였다. 독립전쟁의 금자탑이라는 승리의 기쁨도 잠시였다. 일제의 추격에 연해주로 이동한 대한독립군단은 ‘자유시참변’으로 결국 만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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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광복군 사령관 시절 지청천과 김구


무장단체 통일과 한중 연대에 앞장서다

일제의 만주 침략이 본격화되자 그가 이끈 한국독립군이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사기도 충천하여 일본군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천하무적 독립군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중국군과 연합하여 많은 무기류와 군수품 등을 노획한 ‘대전자령전투’는 독립전쟁 ‘3대첩’ 중 하나로 이를 주도한 인물이 바로 지청천이었다. 하지만 괴뢰 만주국 수립 이후 일제에 의한 만주지배의 공고화, 한·중 연합군의 내분 등으로 중국 관내지역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윤봉길 의거 이후 중국군관학교 안에 한인특별반 개설에 즈음하여 그는 교관으로 초빙되었다. 오광선을 비롯한 한국독립군은 베이징을 거쳐 뤼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 교관으로 부임했다. 한인특별반의 총책임자로서 군사훈련을 지도하는 한편 교무위원으로 중국군과 교섭에도 열성적이었다. 교육과장인 중국인은 그와 일본육사 동기생이었기에 교육 내용과 운영 전반을 원만하게 조정할 수 있었다. 특히 만주지역의 항일 무장투쟁 세력과 지속적인 연계는 주로 만주의 반만 항일군과 제휴로 나타났다. 

동시에 중국 관내지역의 독립운동 정당 결성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재만 한국독립당 대표와 한국혁명당 대표들은 ‘토지와 대생산 기구의 국유’ 등을 지향하는 신한독립당을 결성하였다. 청년군사간부특별훈련반 총책임자로서 청년들 훈련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독립운동 진영의 단결과 통일에 입각한 민족혁명당 탄생도 주도하였다. 그의 소망과 달리 운영 방향을 둘러싼 갈등으로 결국 민족혁명당을 탈당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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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청천 애국시 어록비


한국광복군을 연합군 일원으로 대일전에 나서다

충칭에 정착한 임시정부는 그를 군사위원회 군무장에 임명하였다. 임시정부는 독자적인 군사조직인 한국광복군의 창설에 역량을 집중하였다. 총사령관에 임명된 그를 비롯하여 참모장 이범석, 참모 채원개·이복원·이준식·김학규·공진원 등이 선임되었다. 마침내 1940년 9월 17일, 충칭 가릉빈관에서는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전례식을 거행하였다. 

“헌기(獻旗)를 마치자 총사령관은 늠름한 기상과 장엄한 태도로써 정면을 향하여 다시 축립하였다. 그는 간곡하고도 겸손하며 견결하고 비장한 어조로써 간명한 열변을 토하여 청중을 감동시켰다. 그가 말하기를 비록 자기의 재덕은 중임을 맡기에 부족하나, 각계의 호의를 보답하며 군인의 천직을 다하기 위하야 국궁진췌(鞠躬盡瘁)하야 사이후이(死而後已) 하겠다고 하였다.”

그는 총사령부 예하에 독립여단 성격의 지대를 조직하였다. 총사령부 인원과 군사특파단원을 중심으로 3개 지대를 편성하는 한편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5지대로 편제하였다. 각 지대를 중심으로 병력 충원을 독려하는 가운데 아들 지달수와 딸 지복영도 여기에 참여시켰다. 이러한 노력으로 광복 직전 700여 명에나 달하는 등 비로소 한국광복군은 임시정부의 국군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연합군과 공동작전을 추진하는 등 한국광복군이 연합군의 일원으로 대일전쟁을 수행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는 “현 단계에서 우리의 가장 절박한 임무는 국제 지위를 획득하는 것”임을 역설하였다. 시안의 광복군 2지대와 푸양의 3지대 대원들이 3개월간 훈련을 받아 1945년 8월 4일에 제1기생 훈련을 마쳤다. 김구와 함께 미국 전략첩보국(OSS) 책임자인 도노반 소장을 만나 국내진공작전에 합의했다. 원대한 계획은 갑작스러운 일제의 일방적인 항복으로 무산되었다.

일제 패망 후 그는 한인 청년들을 광복군에 편입시켜 상하이·한커우·베이징·항저우·난징·광저우 등지에 잠편지대를 편성하며 광복군의 조직을 확대하였다. 중국정부가 확군 활동을 저지함에 따라 1946년 5월 광복군 해산을 선언하고 주화대표단 일원으로 이듬해에 귀국하였다.


정치인으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다

지청천은 귀국 후 ‘청년운동이야말로 조국 통일의 유일한 길’이라며 청년 단체 통합에 노력을 기울였다. 대동청년단은 군사적 역량을 중시하며 결집력이 강한 단체였다. 이는 자신의 굳건한 정치적 기반이었다. 이 단체는 5·10총선거에서 13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하였으며, 자신은 서울 성동구에서 전국 최다 득표로 당선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의 무임소장관, 국회 외무·국방위원장, 민주국민당 대표최고위원, 대한적십자사 중앙집행위원, 대한군인유가족회 회장, 반공통일연맹 최고위원, 자유당 원내 대표최고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망명한 이래 1947년 4월 귀국할 때까지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며 독립전쟁에 일생을 불살랐다. 신흥무관학교 교관, 한국독립군 총사령관,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장, 그리고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그는 항일무장투쟁으로 조국 독립을 실천한 진정한 군인이었다. 1957년 1월 15일 자택에서 급서하여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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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 기념


운명적인 만남으로 독립운동가의 아내가 되다

1890년 4월 30일 아버지 윤원기와 어머니 조씨 사이에 여자 4형제 중 둘째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독선생을 모시고 여자들을 공부시킬 만큼 상당히 개방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18세에 지청천과 결혼하여 인연을 맺었다. 첫날밤에 합환주(合歡酒)를 마신 지청천은 아내와 합방을 하는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하였다.

“나는 어머니의 명에 따라 그대를 아내로 맞았지만 이미 세운 뜻이 있어 아내와 더불어 안락한 생활을 누릴 수 있는 몸이 아니오. 나는 이미 군인의 길로 들어서서 나라와 겨레를 위망에서 튼튼히 지키려고 결심하였으니,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이오. 그러니 내가 그대에게 바라는 바는 나와 뜻을 같이하겠다면, 고생을 마다 않고 늙으신 어머니를 나 대신 잘 모셔주며 만약에 혈육이 생긴다면 잘 교육시켜 주는 일이오. 만일 이것이 나의 무리한 요구라고 생각한다면 나에게 시집오지 않아도 좋소. 당신의 생각은 어떻소? 뜻을 분명히 해 주시오.”

아무리 중매결혼이라지만 꿈 많은 꽃다운 신부가 결혼 초야에 신랑으로부터 들어야 했던 말이라고는 미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영원한 동지로서 독립운동을 지원하다

3·1운동 열기가 식어가던 어느 날, 남편 지청천은 아들과 딸을 남겨둔 채로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윤용자는 시어머니 봉양과 자식들 양육에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남편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하여 가족들을 데리고 중국 동북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일제의 감시와 낯선 이곳에서 생활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독립군의 식사와 의복을 제공하는 등 독립운동가의 아내로서 역할에 충실하였다.        

1930년대 중반에는 중국 관내지역으로 생활근거지를 옮겼다. 남편은 독립군 양성에 전념하느라 가정의 경제는 오로지 그녀의 몫이었다. 와중에도 임시정부의 각종 행사를 지원하는 한편 한국국민당 당원으로서 여권 신장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김병인, 오건해, 이헌경, 김수현, 이숙진 등과 한국혁명여성동맹을 조직하는 등 임시정부 군사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특히 아들 지달수와 딸인 지복영을 한국광복군으로 입대시켰다. 이들은 총사령관 자녀로서 각자가 맡은 임무에 충실하여 ‘그 아버지에 그 아들과 딸’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광복 후 2년이나 지나 늦깎이로 귀국하여 동지로서 남편의 정치활동을 도왔다. 1964년 2월 3일 사망한 뒤 남편과 함께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2017년에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가시밭길에도 부부가 묵묵히 걸어간 길은 오직 조국 광복에 있음을 뒤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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