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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우리말 탄압·말살과 

일본어 상용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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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신용하(서울대학교 명예교수)



민족은 무엇보다도 ‘언어공동체’이다. 우리 민족은 구성원들이 한국어를 공동으로 사용하며, 민족의식을 갖고 있을 때 성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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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한국어 말살 정책 전말

일제강점기에 일제는 우리 민족의식을 소멸시키기 위해 ‘한국어 말살과 한국문자 말살 정책’을 강행하였다. 일제는 한국인에게 한국어 대신 일본어를 배우게 해서 일본인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한국어와 민족의 문화 및 역사를 소멸시키면 민족의식이 소멸되고 일본의 노예와 같은 예속 천민층으로 전락하리라 믿었다.

일제는 1910년부터 일본어를 ‘국어’로 여기도록 강요하고 한국어를 박해하다가, 1930년대에 들어서는 모든 한국인들의 일상에서 한국어 사용을 엄금하고 일본어만 전용하도록 강제하였다. 한국어 말살과 일본어 전용은 어릴 때부터 철저히 강제해야 효과가 크다고 하면서, 국민학교 1학년 담임교사는 반드시 일본인 교사만을 배치하도록 조치하였다. 그리하여 철모르는 국민학교 학생들이 부지불식간에 한국어를 사용하는 경우에는 매질을 하고 벌금을 물리거나 벌을 주었다. 

일제는 한국어로 된 신문과 잡지 또한 모두 탄압하여 폐간시켰다. 그러다가 1919년 3·1운동이 퍼져나가자 할 수 없이 한국어 신문·잡지의 발행을 일부만 허용하였다. 바로 이 시기에 한국인 선각자들의 활동으로 한국어 연구와 발전이 추진되고, 한국어로 된 문학·예술이 번영해서 한국어와 한글을 지키고 발전시키는 데 성과를 내었다. 그러나 1930년대에 들어서 일제는 다시 한국어 신문·잡지의 폐간 정책을 강행하였고, 1940년대에는 모든 한국어 신문들을 폐간시켰다. 

그러나 한국인들의 저항도 매우 강력하였다. 이로 인해 한국어 말살과 일본어 전용정책이 잘 진행되지 않자 일제는 ‘씨를 없애야 한다’며, 1942년 한글학자들의 모임인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를 강제로 해산시키고 회원은 물론 학자들까지 체포하여 투옥하였다.


학생들에게 일본어 집중 교육

일제는 “한국인의 황국신민화 정책의 첫째 과제는 철저한 일본어 교육”이라고 강조하였다. 따라서 교육의 중심을 한국어 대신 일본어 집중 교육 강화에 두었다. 특히 국민학교 저학년 교육은 거의 ‘일본어’ 교육이었다. 

일제는 일본어 교육 안에 일본의 역사·문화·도덕 등의 내용을 넣어 한국의 어린 학생들을 일제의 신민으로 만들고 일제 숭배 사상을 주입시키려고 하였다. 예컨대 1939년 총독부에서 발행한 『소학국어(일본어) 독본』 권 11을 보면 총 28개 단원 가운데 71.4%인 20개 단원이 일제의 역사, 도덕, 문화, 군국주의와 무사도(武士道)를 선전하는 내용이었다.    학교에서의 일본어 전용과 상용의 철저화는 전국의 학교에서 매우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시행되었다. 국민학교에서는 매주 초에 ‘국어표(일본어표)’라는 딱지를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서로서로 감시하게 하다가 무의식중에 한국어를 한마디라도 사용하면 딱지를 한 장씩 뺏게 하여, 주말이 되면 표를 많이 빼앗긴 학생에게 체벌을 가하였다. 이 밖에도 한국 학생들이 한국어를 사용하는 정도에 따라 구타·벌금·정학·퇴학·낙제 등 온갖 수모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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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어학회 표준어 사정위원 기념 사진(1935)(좌) /  『소학국어 독본』 표지(우)


공장·상점에 일본어 강습소 강제 설치

일제의 일본어 상용 강제 정책은 학교 밖 일상에도 강행되었다. 1938년 일제는 중일전쟁 도발 1주년을 기하여 ‘국가총동원령’을 내리고, ‘국민총력조선연맹’이라는 친일단체를 조직하여 일본어 강습 등 전쟁동원체제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는 1938년부터 전국에 일본어 강습소를 설치하고, 매년 10만 명씩 4개년에 40만 명의 일본어 보급 수료 계획을 수립하였다. 일본어 강습소는 각종 단체·공장·상점 등 직장 단위로 전국 각지에 설치되었다. 이어 조선총독부는 전국 각도에 통첩을 보냈다. 공장·상점 등 직장 단위로 직장시설을 이용하여 각기 일본어 강습소를 설치하도록 강요하고, 학습 진도를 검사하여 성적에 따라 근무 평가에 반영하도록 하였으며 우수자는 상을 주라고 지시하였다. 일제 자료에 의하면, 1938년에 일본 말 강습회가 3,660개소에서 열렸고 21,373명이 일본 말을 수강하였다. 그리하여 1943년까지 일본 말 강습 총 수료자는 누계 670만 7,627명이라고 선전하였다.

특히 일제는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뒤에 한국 청년들의 일본군 징병을 전제로 1942년 11월 1일 ‘조선청년특별연성소령(朝鮮靑年特別鍊成所令)’을 공포하고, 전국의 각 부·읍·면에 훈련연성소를 설치하였다. 연성 기간은 약 1년으로 총 교육 시간 600시간 가운데 400시간이 학과 수업, 200시간이 교련 수업이었다. 학과 시간의 중점은 일본 문화와 함께 일본 어 습득을 목표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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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신문 검열로 인해 여백으로 발행된 신문(좌) / ‘훌륭한 군인 양성을 위해 일본어를 생활화하자’는 전단(우)


실패로 돌아간 한국어 말살정책

이처럼 일제는 한국인 모두를 대상으로 일본어 상용정책을 펼쳤다. 관공서는 물론 전국의 상점·극장·운동장 등에서도 오직 일본어만 사용하고 방송하도록 하였다. 우체국에서 일본어를 사용하지 않는 우편물은 접수를 거절하였다. 철도·운수·교통·통신에서도 일본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매표와 통화를 금지시켰다. 각 가정에서도 한국어를 사용하지 말고 일본어를 상용하도록 강요하였다. 한국어 말살과 일본어 상용을 전 일상생활에 강제한 것이었다. 

일제 측 자료에 의하면, 1932년 당시 한국 인구 20,205,591명 가운데 일본어를 할 수 있는 한국인은 약 1,578,131명에 불과했다. 즉 총인구의 7.8%만이 일본어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제가 일본어 강제 강습을 전국적으로 시행한 후인 1943년에도 일본어를 사용할 수 있는 한국인이 22.15%로 늘어나긴 했으나 여전히 낮은 비율이었다. 1944년 통계는 구할 수 없지만, 일제강점기 말기까지도 약 78%의 한국인은 한국어 밖에 할 줄 몰랐다고 전해진다. 일제의 한국어 말살정책과 일본어 상용정책은 일제의 강제 집행에도 불구하고 크게 실패한 것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한국인들이 내 나라말을 하지 못하는 고통 속에 살도록 탄압당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일제의 한국어 말살정책은 민족 구성의 본질적 요소인 민족 언어를 완전히 말살하여 한국인을 일본의 영구한 예속민으로 만들려고 획책한 잔인무도한 식민지 정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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