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산책

자유·평등을 향한 끝없는 투쟁 

프랑스 혁명

세계 산책

글 김대보(원광대학교 역사문화학부 교수)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은 자유와 평등을 얻기 위해 일으킨 투쟁이었다. 혁명 당시 그리고 혁명 이후에도 자유와 평등을 위한 투쟁은 끊이지 않았다. 프랑스 혁명은 이러한 끝없는 투쟁과 함께 자유와 평등을 향한 인간의 무한한 희망을 탄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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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루이 다비드, 〈테니스코트의 서약〉(1791)        


재정 위기와 프랑스 혁명의 시작

프랑스 혁명 전 프랑스가 안고 있던 가장 큰 문제는 재정 위기였다. 프랑스는 17세기뿐 아니라 18세기까지 전쟁에 많은 돈을 쏟았고, 혁명 전 마지막으로 참전한 미국의 독립전쟁은 재정 적자를 더욱 심화시켰다. 미국 독립혁명 이후 더욱 악화된 재정 적자는 조세 제도의 개혁 없이 증세만으로는 개선될 수 없었다. 1787년, 루이16세는 면세 혜택을 누리던 두 특권 신분인 성직자와 귀족들에게도 세금을 부과하는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면세 특권을 포기할 수 없었던 성직자와 귀족은 루이16세에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1788년 한발 물러난 루이16세는 재정 및 조세 제도 개혁을 위해 1614년 이래 열리지 않았던 총신분회(삼부회)를 1789년 5월에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1789년 5월 5일 총신분회가 개최되었고, 제1신분인 성직자와 제2신분인 귀족 그리고 제3신분인 평민 대표가 모였다. 그러나 세 신분의 대표들은 격렬한 대립을 보였다. 제1신분과 제2신분은 분리 심의와 신분별 투표를 주장했고, 제3신분은 공동 심의와 인원별 투표를 주장하였다. 그러던 중 부르주아를 중심으로 한 평민 대표들은 자신들의 주장에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성직자와 귀족 대표를 제외한 채 국민의 대표를 자처하며 6월 17일에 ‘국민의회’를 결성하였다. 루이16세와 성직자 및 귀족 대표들은 회의장을 봉쇄하여 평민 대표들의 결집을 방해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평민 대표들은 6월 20일 베르사유 궁전 앞의 정구장으로 장소를 옮겨, 앞으로 헌법을 제정하고 이 헌법을 굳건한 기반 위에 올려놓을 때까지 절대 해산하지 않기로 결의하였다. 

이렇게 평민 대표들이 주도하는 개혁이 진행 중일 때, 시민들은 여전히 배가 고팠지만 자신들의 목소리를 온전히 낼 수 없었다. 자신들의 처지를 개선시켜달라는 요구를 하면서 튈르리 궁전 앞에서 시위를 하던 파리 시민들에게 궁전수비대가 발포를 했고, 시민들은 무장을 결심하였다. 앵발리드에서 무기를 챙긴 시민들은 7월 14일에 바스티유 요새를 습격했고, 무력 충돌 끝에 요새를 함락시켰다. 이제 시민들은 혁명의 주요 동력으로서 국민의회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이제 국민의회는 프랑스를 쇄신하기 위한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구체제의 특권을 폐지했고(8. 4~11.),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8. 26.)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약 2년 동안 준비한 끝에 1791년 프랑스에 첫 번째 헌법을 안겨주었다.


프랑스 혁명의 위기

국민의회가 이어가던 프랑스의 쇄신에는 장애물이 있었다. 구체제의 재정 위기에서 시작된 적자 문제를 여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국유 재산을 매각하기도 했지만 부족한 재정을 채우기에는 부족했다. 결국 ‘아시냐’라는 화폐를 발행했지만 화폐 가치 하락과 물가 상승을 불러왔다. 여기에 외국의 위협과 전쟁이 현실로 다가왔다. 

왕실의 권력을 되찾고 싶었던 루이 16세는 외국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혁명을 진압하려고 하였고, 1791년 6월 오스트리아 군대를 이용해 파리를 탈출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오스트리아가 프랑스를 공격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싹텄고, 1792년 4월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계속 패배했고,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시민들은 우왕좌왕하던 의회에 자신들의 힘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1792년 8월 10일 튈르리 궁전을 습격한 뒤 의회를 압박하여 왕권을 정지시켰다. 그리고 9월 21일 새롭게 구성된 의회가 프랑스 공화국을 선포하였다. 이어 1793년 1월 21일 루이16세가 처형당하고, 10월에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처형당했다. 

유럽의 여러 국가들이 프랑스 국왕이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프랑스에 맞서기 시작했다. 위기에 처한 프랑스를 지키기 위해 의회는 1793년에 두 차례에 걸친 대규모 징집령을 내리면서 전쟁에 모든 힘을 쏟았다. 그리고 1793년 가을, 혁명의 적들에게 공포를 보여주어 위기에 처한 프랑스와 혁명을 구해야 한다는 논리로 ‘공포정’을 등장시켰다. 국가적 위기 상황 속에서 반혁명 혐의자들을 단두대에서 처형시키기도 했고, 예외적인 제도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혐의자들에 대한 가혹한 법과 민중운동에 대한 억압 등은 공포정치 반대파들의 피로도를 높였다. 결국 1794년 7월 27일, 당시 정국을 이끌고 있던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일파가 처형당하게 되는 테르미도르 반동이 일어났다. 이후 국민공회는 1년 동안의 준비 끝에 1795년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고 총재정부를 탄생시켰다.

총재정부는 정치와 경제의 안정을 꾀했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테르미도르 이후 통제 경제의 폐지는 가파른 물가 인상을 불러왔다. 총재정부는 1796년에 화폐개혁을 단행했지만 재정 적자는 여전히 지속되었고, 정복전쟁을 통한 수입에 의존해야 했다. 정치적으로도 총재정부는 선거 결과를 뒤집기 위한 쿠데타를 일으키는 등 안정과 거리가 멀었다.

1798년부터 1799년까지, 프랑스는 다시 결성된 대프랑스 동맹군과 전쟁을 치러야 했다. 프랑스군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여러 정파 사이의 갈등 때문에 정치적 불안정은 계속되었다. 그해 11월 9일, 당시 최고 권력자 가운데 한 명이었던 시에예스는 헌법을 개정하여 정치적 불안정을 해결하기 위해 이집트에서 급히 돌아온 나폴레옹을 끌어들여 쿠데타를 일으켰다(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 이로써 통령정부가 탄생했고, 프랑스 혁명은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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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16세의 처형, 작자 미상(1793)(왼쪽) / 프랑수아 부쇼의 〈500인위원회에서 보나파르트 장군〉(1840)(오른쪽)


프랑스 혁명이 남긴 것

프랑스 혁명은 구체제에서 억압받고 있던 프랑스인들이 자유와 평등을 얻기 위해 일으킨 투쟁이었다. 물론 보편적인 자유와 평등은 프랑스 혁명이 단기간에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프랑스 혁명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도 정치적 권리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던 사람들은 끊임없이 싸워야만 했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 이후에도 자유와 평등을 위한 인류의 노력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프랑스 혁명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혁명의 진행 과정에서 만들어진 제도나 체제가 아니라, 자유와 평등을 향한 인간의 끝없는 투쟁과 무한한 희망을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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