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관

지지 않는 별

항일 시인 윤동주

인문학관

글 김동수(백제예술대학교 명예교수·시인)



일제강점기 한국의 문학은 국내문학과 해외망명문학 등으로 나뉘는데, 그중 국내문학은 조선총독부의 언론 탄압과 감시에 의해 서서히 친일문학으로 변질되어 갔다. 그런 와중에도 윤동주는 순결과 자기희생의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식민지 현실을 누구보다도 괴로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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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동주, 송몽규가 명동소학교 시절 만든 문예지 『새명동』 복간호(왼쪽) /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본(1948)(오른쪽)


어려서부터 고국에 대한 향수를 안고

윤동주의 증조부인 윤재옥은 함경북도 종성에서 살다가 명동촌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이때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이 독립지사인 김약연의 누이동생 김용과 결혼해 1917년 12월 30일 윤동주를 낳았다. 

할아버지는 기독교 장로였고, 아버지는 명동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윤동주는 1925년 8세의 나이에 명동소학교에 입학하였다. 윤동주의 일생에서 소학교 시절은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그는 큰 기와집과 깊은 우물, 뽕나무밭과 과수원, 가랑나무가 우거진 기슭에 교회당이 있는 아름다운 환경 속에서 자랐다. 그의 생애 28년 중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소년 시절을 명동에서 보내며 기독교 신앙을 키워갔다. 그러기에 윤동주 시의 출발은 종교적 신앙에서 오는 순결한 동심과 거기에 비치는 동포들의 궁핍한 삶에 대한 연민의 정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소학교 4학년 담임교사였던 한준명 목사는 “동주는 어린 시절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어요. 어쩌다 문답을 하면서 대답이 막힐 때면 눈물이 핑 돌았던 기억이 나요”라며 “동주 할아버지가 그 동네에서 제일 부자였고 밭이 많았어요. 말을 기르고 있어 외출할 때는 그걸 타고 다녔지요”라고 회고했다. 

윤동주는 고종사촌인 송몽규와 함께 서울에서 발간한 월간 『아이생활』과 『어린이』라는 잡지를 읽었다. 5학년이 되면서 송몽규와 함께 원고를 모아 『새명동』이란 신문 형식의 등사판 문예지를 만들어 동요 및 동시 등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러다 1932년 윤동주의 교육을 위해 가족들은 룽징으로 터전을 옮겼고, 그의 나이 14세에 캐나다 선교부가 설립한 미션스쿨인 은진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때 그는 밤늦게까지 교내 잡지를 만드느라 등사 글씨를 쓰기도 하였고, 손수 재봉질을 하여 옷을 고쳐 나팔바지를 만들어 입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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릿쿄대학 시절, 송몽규(앞줄 가운데)와 윤동주(뒷줄 오른쪽)


광명의 제단에 타오른 촛불 하나 

1934년  은진중학교 3학년 시절(17세)이었다. 그해 12월 고종사촌인 송몽규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자, 이에 크게 자극을 받은 윤동주는 ‘대기는 만성’이라는 각오로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그때 쓴 첫 작품이 「초 한 대」였다. 윤동주와 소학교·중학교 동기인 문익환 목사는 이렇게 회고했다. 

“은진중학교가 있는 언덕 일대는 일본 순경이나 중국 관원들도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는 치외법권 지대여서 우리는 그곳에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애국가를 마음껏 부를 수 있었고 무척 신났었다. 그러다 동주가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요한 1:15)’는 복음서의 말씀대로 역사를 바로 보는 눈이 열렸다.” 

1935년 18세 되던 해에 윤동주는 5년제 중학교로 편입하기 위해 평양에 있는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2학기(7개월)라는 짧은 시간을 보냈지만, 고향을 떠난 뒤 겪은 객지 생활의 외로움과 고뇌를 담아 15편의 주옥같은 시를 만들어냈다. 그러던 1936년 숭실중학교에서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이를 거부하고 룽징으로 다시 돌아와 광명학원 중학부에 편입했다. 이때 북간도 옌지에서 발행하던 『가톨릭 소년』지에 용주(龍舟)라는 필명으로 「병아리」, 「빗자루」 등 30여 편의 동요·동시를 발표하였다. 

1938년 광명학원 중학부 5학년을 졸업하고 4월에 송몽규와 함께 다시 서울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해 『조선일보』와 『소년』에 산문과 동요를 발표하였다. 그 유명한 「별 헤는 밤」과 「서시」도 이때 탄생한 것이다. 윤동주의 28년 생애에서 이 4년간의 연희전문학교 시절이 가장 풍요로우면서도 자유로웠던 시기였다.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가 민족적인 정서를 살리기에 가장 알맞은 배움터였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연희전문학교 시절 후배인 장덕순 교수에 의하면 “그는 얌전하고 말이 적은 외유내강형의 성격이었으나, 지조와 의지는 감히 누구도 어쩌지 못하게 강하였다”고 한다.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42년 2월 도쿄 릿쿄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해 한 학기를 마치고, 그해 가을 교토의 도시샤대학교 영문과로 다시 전학하는 등 만 3년을 일본에서 살았다. 그러던 1943년 독립운동 혐의를 받고 송몽규와 함께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후쿠오카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윤동주는 모진 고문을 받다 1945년 2월 16일 28세의 나이로 옥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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