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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속 다섯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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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송명호(전 문화재청 근대문화재전문위원)



지금껏 이어져온 태극기 변천사를 살펴보면 각기 다른 모양일지라도 저마다의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현재 가장 오래된 태극기를 기증한 인물 데니와 대한제국 때부터 일제강점기 동안 항일운동의 상징이었던 네 점의 태극기와 관련 인물들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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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와 데니 태극기(국가등록 제382호)


데니와 데니 태극기

태극기를 말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데니 태극기’이다. 그도 그럴 것이 1882년 9월에 제작해 사용하였다는 최초의 태극기 실물이 아직 발견되지 않은 지금으로선 가장 오래된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인 데니(O.N. Denny, 1838~1900)는 외교 고문으로 1886년부터 1890년까지 업무를 수행하였다. 1886년 5월 3일 청나라 간섭에도 굴하지 않고 프랑스와 통상조약, 러시아육로통상조약 체결, 거문도 무단 점령 영국 극동함대 철수 등 많은 외교적 활동을 하였다. 또한 『청한론』을 발행하여 조선의 통치에 대해서 사사건건 간섭한 청나라를 신랄하게 비난하였다. 

1890년 데니가 4년 동안의 임기를 마치고 귀국길에 오르자 고종은 태극기를 만들어 선물하였는데, 이를 데니의 후손이 1981년 대한민국 정부에 기증한 것이다. 1882년 박영효가 처음으로 만들어 사용했다는 태극기로부터 불과 7여 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볼 때 최초의 태극기도 데니 태극기처럼 생기지 않았을까 짐작할 수 있는 대목으로, 매우 중요하고 가치가 큰 태극기이다. 데니 태극기는 국가등록문화재 제382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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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광순 초상화(왼쪽) / 불원복 태극기(국가등록 제394호)(오른쪽)


고광순 의병대장과 불원복 태극기

고광순(1848~1907) 의병장은 전남 담양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순절했던 고경명 의병장의 12세 손이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명성황후 시해자를 처단하기 위해 각 읍에 격문을 띄우고 의병을 불러 모아 서울로 가던 중 조정에서 파견한 선유사(宣諭使)의 권고로 애석하게도 의병을 해산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의병 활동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1905년부터는 을사늑약 무효를 주장하며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1906년 4월 최익현 선생이 순창에서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으나 최익현 선생이 이미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뒤였다. 1907년 1월에는 독자적으로 담양군 창평에서 부대를 조직하여 항일의병활동을 시작하였다. 비장한 각오로 지리산 연곡사에 본영을 차리고 항일의병 장기전에 돌입하면서 ‘멀지 않아 나라를 되찾는다’는 의미의 ‘불원복(不遠復) 태극기’를 만들어 부대 입구에 게양했다. 의병들은 그 태극기를 보면서 반드시 일제를 몰아내고야 말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이 첩보를 입수한 일제는 1907년 10월 15일 군경 합동 중포대대를 이끌고 야간에 연곡사를 급습하였다. 고광순 의병대는 치열하게 대항했으나, 의병의 무기로는 일제의 대포를 제압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일제 중포대대는 연곡사를 점점 조이면서 불을 질렀다. 고광순 의병대는 불길을 피할 수가 없었다. 다음날 새벽 모두 불길에 처참하게 순절하고 말았다. 시신은 인근 마을 사람이 임시로 묻어두었는데, 며칠 후 매천 황현이 수습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고광순 의병장은 일제의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의병활동의 정신적 지주였던 불원복 태극기는 국가등록문화재 제394호로 등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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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설과 배설 태극기(국가등록 제483호)

배설과 배설 태극기

영국인 베델(1872~1907)은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1904년 3월 데일리메일의 특파원 자격으로 대한제국에 왔다. 베델은 영국 공사의 안내로 광무황제를 알현하였는데, 특별한 환대와 함께 ‘배설(裵說)’이란 이름을 하사받았다. 이때부터 배설이란 이름을 썼고 일제의 침략을 낱낱이 취재하여 본국 신문을 통해 신랄하게 비난하였다.

그해 7월 18일 양기탁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였다. 언론을 통해 대한제국을 집어 삼키려는 일제의 만행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였다. 태극기를 손수 만들어 영국기와 함께 나란히 사장실에 게양하였다. 1905년 11월 17일 학부대신 이완용, 상공부대신 권중현, 내부대신 이지용, 외무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등 을사5적은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과 조선통감부 설치를 담은 을사늑약에 찬성 표를 던졌지만, 배설은 이를 무효라고 주장하며 세계 언론에 전달하였다. 

배설의 언론 활동은 일제가 볼 때 눈에 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일제는 영국 정부에 배설의 언론 활동이 동맹국으로써 해를 끼친다고 압력을 넣었고, 서울에 설치된 영국 총영사관이 재판하도록 설득해 옥고를 치르게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배설이 국채보상운동 의연금을 횡령하여 호의호식한다는 가짜 뉴스를 퍼뜨려 만신창이가 되도록 스트레스를 주었다. 이것도 모자라 온갖 무자비한 강압으로 배설과 양기탁을 대한매일신보사에서 물러나게 한 후 통감부 산하 언론기관으로 만들었다. 

배설은 옥고를 치르고 일제의 온갖 음모에 스트레스를 받다 못해 1909년 5월 1일 순절하였다. 장례식 날 양화진 외국인 묘지로 가는 운구 행렬에는 흰옷을 입은 조문객 1,000여 명이 구름처럼 뒤를 따르며 통곡하였다. 1968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신문사에 게양했던 태극기는 국가등록문화재 제483호로 등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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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와 김구 서명문 태극기(국가등록 제388호)

김구와 서명문 태극기

김구(1876~1949)의 임시정부 국무회의 주석 시절이었다. 1941년 광복운동을 돕던 벨기에 신부 매우사(미우스 오그)가 미국을 간다고 하니, 독립운동자금을 호소한 글을 태극기 바탕에 친필로 쓰고 서명해서 주었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


“매우사 신부에게 부탁하오.

당신은 우리의 광복운동을 성심으로 돕는 터이니 

이번 행차에 어느 곳에서나 우리 한인을 만나는 대로

이하 기구의 말을 전하여 주시오. 

망국의 설움을 면하려거든 자유와 행복을 누리려거든 

정력·인력·물력을 광복군에 바쳐서 

강노말세인 원수 일제를 타도하고 조국의 독립을 완성하자.”


절박했던 임시정부의 독립자금 사정과 일제를 타도하여 독립국가를 세우자는 김구 주석의 애국정신이 글자마다 눈물겹다. 이 태극기는 안창호의 부인 이혜련에게 전달되었다가 독립기념관에 기증되었다. 국가등록문화재 제388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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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초월과 진관사 소장 태극기(국가등록 제458호)


백초월과 진관사 소장 태극기

스님 백초월(1878~1944)은 1919년 11월에 의친왕과 함께 제2의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1920년 무렵 진관사에서 수도를 하던 백초월은 마냥 이렇게만 있을 수 없다면서 항일운동을  결심하고, 일장기의 빨강 동그라미 위에 붓으로 덧칠한 태극기를 칠성각 벽체 속에 숨겨 놓고 홀연히 떠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일장기에 덧칠하여 태극기를 그린 것은 반드시 일본을 딛고 일어서겠다는 비장한 각오의 의미였다. 백초월은 1999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고, 그때의 태극기는 2009년 5월 칠성각 보수 작업 중에 발견되어 국가등록문화재 제458호로 등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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