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인연

역사를 통해 민족정신과 독립정신을 일깨운

신채호와 박자혜 부부

아름다운 인연

글 김형목(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1920년 봄 옌징대학 의예과에 다니던 박자혜는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의 중매로 중국 상하이와 베이징 등지를 돌아다니며 독립운동을 하고 있던 신채호를 처음 만났다. 둘은 열다섯이라는 나이 차가 있었지만, 박자혜는 신채호의 인물됨과 독립을 향한 큰 뜻에 감명받아 결혼을 결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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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          


주체적인 사관에 입각한 근대역사학 토대를 마련하다

단재 신채호에 대한 평가는 매우 다양하다. 언론인, 역사학자, 계몽활동가, 독립운동가, 아나키스트 등으로 성격 규정은 이러한 사실을 방증한다. 단재야말로 ‘과학적 역사학’을 주장하며 우리 근대역사학을 수립한 역사가가 아닐까. 그에게 역사 연구는 학문적인 영역을 넘어 침잠되는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시대적인 소명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신채호는 수많은 독립투사들 중 박은식·안재홍·정인보·문일평 등과 함께 붓으로써 대쪽 같던 민족적인 절개를 지킨 실천적인 지식인이었다. 정치한 고증과 현장 답사로 생생하고 주체적인 민족사관 정립은 한국사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킨 첫걸음이었다.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라는 결론은 우리 역사에 대한 강한 자부심과 냉철한 역사인식과 무관하지 않다. 나아가 8·15광복은 독립군의 항전과 더불어 독립정신을 고취한 선각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언론을 통한 계몽운동에 앞장서다

1880년 12월 8일(음력 11월 7일)에 충남 대덕군 산내면(현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고령, 필명 금협산인·무애생, 호는 단재·일편단생·단생 등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8세에 본향인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로 이사하였다. 16세에 풍양 조씨와 결혼하여 아들을 두었으나 요절하였다. 

신기선의 추천으로 성균관에 들어가 성균관 박사로서 뛰어난 지적 능력을 발휘해 명성이 자자했다. 그는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논설위원과 주필을 맡아 언론인으로서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일제 침략에 대한 비판적인 논조는 식민당국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가시와 같았다. 많은 영웅전과 역사 논문을 통한 민족의식 앙양은 자신의 책무로 인식하고 실천하였다. 신민회와 국채보상운동 등에 참여하는 동시에 1908년 한글로 된 『가정잡지』를 발행하였다. 또한 『대한협회회보』와 『기호흥학회월보』 등에 논설을 발표하는 한편 일진회 성토에 앞장섰다. 


독립운동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에 나서다

1910년 4월 신민회 동지들과 협의 후 중국 칭다오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안창호·이갑 등과 향후 독립운동 방안을 협의하였다. 이어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권업신문』에 많은 역사 관련 글을 남겼다. 신문이 강제 폐간되자 중국 동북지역(만주)과 백두산 등 한민족의 고대 활동 무대를 답사했다. 사적지를 돌아보던 단재는 고구려에 대한 역사를 기록해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역사서도 발간하였다. 돈이 없어 일본인이 파는 광개토대왕비 탁본을 가격만 물어보고 사지 못한 일화는 심금을 울린다.

1915년 중국 상하이로 활동 근거지를 옮겨 신한청년회 조직에 참가하면서 박달학원의 설립·운영에도 힘썼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해 의정원 의원과 전원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한성 임정 정통론과 이승만 배척운동 등 내분으로 사퇴하고 주간지 『신대한』을 창간해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과 맞서기도 하였다.

단재의 애국에 대한 일념은 이승만을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으로 인식한 대목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완용 등 이른바 을사오적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아직 우리나라를 찾기도 전에 있지도 않은 나라를 팔아먹은 자란 말이오”라고 외치며 임시정부를 박차고 나와 외로이 독립투쟁에 전념하였다.

이후 비밀결사 대동청년단 단장, 신대한청년동맹 부단주 등에 피선되었다. 1923년에는 민중의 직접 폭력혁명으로 독립 쟁취가 가능하다는 「조선혁명선언」을 기초함으로 독립운동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임시정부 창조파의 주동적인 역할을 하다가 다시 베이징으로 옮겨 다물단을 지도하였다. 와중에 중국과 본국의 신문에 논설과 역사 논문을 발표하였다.

무정부주의를 신봉하여 무정부주의 동방동맹에 가입해 1928년 잡지 『탈환』 발간에 앞장섰다. 동지들과 협의한 뒤 외국환을 입수해 자금을 조달하고자 타이완으로 가던 중 지룽항에서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았다. 뤼순감옥에서 복역 중에 1936년 2월에 갑자기 옥사하였다. 신채호의 유골은 뤼순감옥에서 순국한 뒤 화장된 채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후 청주로 운구되어 고향인 귀래리 옛 집터에 암장되었다. 1941년에야 한용운과 오세창 등이 묘표비를 세웠고, 2008년 5월에 영당 뒤 현재 위치에 묘역이 조성되었다.

단재는 독립투쟁을 전개하는 동안 “독립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다”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는 그의 역사 연구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고조선과 묘청의 난 등을 새롭게 해석하는 단초를 제공하였다. 단재는 우리 역사에서 주체적이지 못한 역사적인 사실을 비판하였다. 외세 의존적이고 굴종적인 인식에 대한 비판은 다음 글에서 엿볼 수 있다.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 조선이 되려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여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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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 어록비(독립기념관 경내)       


‘아기나인’에서 간호부가 변신하다

박자혜는 1895년 12월 11일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수유리(현 서울특별시 도봉구 수유동)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중인 출신의 박원순이다. 일찍이 어머니가 사망하여 어린 나이에 궁궐의 견습 나인으로 입궁해 10여 년 동안 궁중생활을 하였고, 일제의 강점으로 대한제국이 망하면서 궁에서 나오게 되었다. 1911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기예과에 입학·졸업하고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강습소 간호부과를 입학·졸업하였다.

조선총독부 부속병원의 조산원으로 근무하던 중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다. 이필주 목사와 연락을 취하면서 이 병원 조산원과 간호원들로 조직된 간우회 회원들과 함께 유인물을 배포하였다. 병원에 부상 환자들이 줄을 잇자 치료하는 과정에서 민족적인 울분을 느끼는 동시에 야만적인 탄압에 몸서리를 쳤다. 3월 10일에는 비밀리에 간우회원들을 규합해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이어 같은 병원 동료들과 열변가인 김형익 등의 한국인 의사를 규합하고 시내 국·공립 병원 직원들의 동조를 얻어 태업을 주도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병원장의 신병인도로 다행히 풀려났으나, 이로 인해 국내에서 활동이 어렵게 되자 중국으로 떠났다. 일제의 감시보고서인 『사찰휘보』는 박자혜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평소 과격한 언동을 하는 언변이 능한 자’, ‘조선총독부 의원 간호부를 대상으로 독립만세를 외치게 한 주동자’로 주목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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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에 실린 산파소 경영난 기사(1928)     


단재와 부부이자 동지로서 인연을 맺다

박자혜는 베이징에서 옌징대학(현 베이징대학 전신) 의예과에 입학하였다. 1920년 봄에 15세 연상인 독립운동가 신채호와 결혼하였다. 단재와의 만남에 대해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검푸르던 북경의 하늘빛도 나날이 옅어져 가고 만화방초가 음산한 북국의 산과 들을 장식해주는 봄 4월이었습니다. 나는 연경대학에 재학 중이고 당신은 무슨 일로 상하이에서 북경으로 오셨는지 모르나 어쨌든 나와 당신은 한평생을 같이 하자는 약속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중매로 인연을 맺어준 사람은 베이징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회영의 부인인 이은숙 여사였다. 이듬해 아들을 낳고 다시 1922년 둘째를 임신했으나, 경제적 궁핍으로 아들과 함께 귀국하였다. 또한 베이징·톈진 등지의 독립운동가와 국내 인사들과 연락 임무도 있었다. 

박자혜는 서울 인사동에 ‘박자혜 산파’를 개원하여 생계를 모색하였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출산을 산파에게 의존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활이 매우 궁핍하였다. 결국 산파소는  일제의 감시와 방해로 사실상 문을 닫고 말았다. 『동아일보』에는 산파소 경영난에 대한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열 달이 가야 한 사람의 손님도 찾아오지 않아 산파소 간판을 달아 놓은 것이 도리어 남에게 부끄러울 지경이다. 그러니 아궁이에 불 때는 날이 한 달이면 사오일이라. (중략) 산파소 간판이 걸린 초가집 대문을 넘어 문턱에 들어서자 부엌도 마루도 없는 한 칸 방에 박자혜가 앉아있었다. 부인의 얼굴을 차마 바라보기 어려웠다.”

풀 장사나 참외 장사 등 노점상도 마다하지 않았다. 어머니로서 자녀를 기르고, 동지로서 중국에 있는 단재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국내 지사들과 연락하거나 해외에서 밀입국해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도 도왔다. 1924년 정의부가 결성된 후에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정의부 요원이 국내로 파견되었을 때 보천교 북(北)방주 한규숙을 중개하였다. 1926년 12월에는 나석주의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투척을 안내하는 등 독립지사들의 연락과 편의를 제공하였다. 이듬해 신채호와 베이징에서 재회해 셋째 아들을 출산하였다.

1928년 신채호가 일경에게 체포되니 책과 옷 등을 구입해 보내주며 옥바라지를 하였다. 때로는 뤼순감옥에 있는 단재에게 하소연 섞인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정 할 수 없으면 고아원에 아이들을 보내라”는 단재의 답장이 돌아왔다. 그리고 단재는 “『국조보감』과 서양역사책을 사서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책값이 50원에 달하는 거금으로 여사는 안재홍에게 부탁했으나 사서 보내지 못했다. 이후 편지는 거의 오지 않았다. 1934년 『신가정』 기자는 ‘부군은 옥중에, 신산(辛酸)한 새해맞이, 신채호 부인 박자혜 여사 방문기’에서 당시 곤궁한 상황을 담담하게 밝혔다.

1936년 신채호가 옥사한 뒤 첫째 아들 신수범은 일제의 감시와 탄압에 견디지 못하고 경성실업학교를 중퇴하고 해외로 떠났다. 셋째 아들 신두범은 1942년 영양실조로 사망하였다. 홀로 셋방에 살던 박자혜는 유일한 희망이었던 조국의 독립도 보지 못한 채 평생의 회한을 뒤로하고 1943년 10월 16일에 병고로 세상을 떠났다. 쓸쓸히 병사한 뒤 화장되어 한강에 뿌려졌다. 단재의 고혼이 외롭게 돌아와 고향에 깃들었듯이 박자혜의 삶과 죽음 역시 그러했다. 단재의 묘소에는 부인의 위패만 묻혀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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