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의 발자취

수원 산루리의 독립 영웅을 

추모하며

독립의 발자취

글 편집실



수원박물관은 개관 이래로 수원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행적을 밝혀 독립유공자로 추서하는 데 힘써왔다. 올해는 독립운동가 이선경이 수원 구국민단 사건으로 체포되어 순국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선경을 비롯해 독립을 위해 투신한 여러 독립운동가들의 생을 살펴보고, 현재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맞바꾼 숭고한 희생임을 기억하도록 하자.


전 시 : 수원 산루리의 독립영웅들

기 간 : 2021. 10. 3. 까지

장 소 : 수원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

문 의 : 031-228-4150

참 고 : 코로나19 방역 지침에 따라 시간대별 관람 인원 제한,  매주 월요일 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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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달문 밖 시장


이번 테마전을 기획하게 된 취지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올해는 수원 구국민단으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이선경이 체포되어 온갖 고문을 당한 끝에 순국한 지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번 전시는 이선경을 비롯한 산루리 출신의 독립영웅들을 함께 조명하기 위해 기획되었습니다. 이번 테마전에서는 독립운동가들의 사진 및 관련 유물·자료 등 100여 점을 공개하여 산루리와 신작로 일대 등 일제강점기 당시 수원의 모습을 보여주고, 그곳에서 독립운동을 펼친 독립운동가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독립영웅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수원 중에서도 산루리가 대표 지역이 된 이유가 있나요?

수원 산루리(현 중동·영동·교동 일대)는 수원화성의 팔달문 밖에 있던 마을로, 일제의 식민지배가 시작되면서 수원에서 가장 먼저 침탈을 받은 지역입니다. 따라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살았고 실제 활동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산루리 지역 사람들은 일제의 수탈과 폭압적인 행동에 분연히 일어나 각자의 방식으로 독립운동에 나섰습니다. 그야말로 수원 독립운동의 산실이라 표현해도 무리가 아닐 것입니다.


산루리의 역사에 대해서도 알 수 있나요?

그렇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1910년대와 1920년대 사진을 비교해보면서 일제 침탈의 근거지가 되었던 산루리의 아픈 역사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산루리는 오늘날 수원 중동과 교동을 비롯한 팔달문 밖 서남쪽 지역으로 일제강점기 시절 이름입니다. 조선시대 ‘산루동’으로 이름 붙었던 마을의 역사 자료부터, 일제강점기에 수원역부터 향교에 이르는 산루리 일대가 개발되어가는 모습, 산루리에서 만들어진 술병 등 유물도 함께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선경 외에 다른 독립운동가들을 살펴볼 수 있나요?

일제의 무고한 침탈을 목격하며 자란 청년들은 나라 잃은 슬픔을 독립운동으로 승화시켰습니다. 민족대표 48인으로 선정된 독립운동가 김세환부터, 1930년 수원소년동맹으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 김장성에 이르기까지, 산루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이 많습니다. 

현재 서훈을 받은 산루리 독립운동가는 10여 명 정도입니다. 앞으로도 독립운동가 발굴에 박차를 가하고 적극적으로 그들의 업적을 알리고자 합니다.


마지막으로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요.

1920년 9월 유관순이 순국하고 난 지 7개월이 지나, 1921년 4월 21일에는 이선경이 순국하였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유관순 열사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지만, 그 외의 여성독립운동가들에 대해서는 많이 모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선경 또한 경기여고를 퇴학당한 상태였고, 구류 8개월 만에 석방되어 집에서 순국하였기 때문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은 모두 함께 찾아 나서야 할 일입니다. 뚜렷한 역사적 궤적을 보여주는 순국열사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뜨거운 조국애를 널리 현창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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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선경 

2 산루리 전경

3 구국민단사건 판결문(1921)

4 『동아일보』 구국민단의 공판 기사(1921)

5 김세환 

6 김장성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


이선경, 19세의 나이로 외로이 순국하다

수원 중동, 영동, 교동 등 팔달문 밖 마을을 조선시대에는 ‘산루동’이라고 불렀다. 또한 수원화성 화양루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다락골’로도 불리는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하지만 일제의 식민지배와 함께 수원의 전통마을은 그들의 편의대로 재편되면서 ‘산루리’가 되었다. 일제의 침략과 수탈에 시달리며 살아온 산루리 사람들은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각자의 방법으로 독립운동에 나섰다. 이선경 역시 그중 한 명이었다.

이선경은 산루리에서 태어나 수원 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이어 숙명여학교, 경기여자보통학교를 입학해서 서울로 통학을 하였다. 이때 서울로 통학하면서 만난 동네 학생 박성태, 최문순 등과 함께 ‘구국민단’을 결성하고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박성태가 단장을 맡고, 이선경, 최문순, 임효정 등의 여학생들이 함께했다. 구국민단은 1920년 중국 상하이에서 발행하던 『독립신문』과 『애국창가』를 마을에 배포함으로써 독립의식을 고취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와 함께 체포된 독립운동가들의 가족을 구호하는 것도 목표로 세웠다. 그러던 중 이선경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적십자 간호부가 되기 위해 중국 상하이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드디어 독립자금을 마련해 임시정부로 떠나려고 경성에 머물러있던 찰나에 일제로부터 발각되어 8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선경이 당시 투옥된 곳은 악명 높은 서대문 형무소의 여감방이었다. 이곳은 유관순도 갇혀있었던 곳으로 혹독한 고문을 당했던 곳이다. 이선경도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1921년 4월 1일자 ‘구국민단 공판’이라는 기사에 의하면, 다른 구국민단 단원들이 재판받고 있을 때 이선경만 혼자 궐석재판을 받았다는 내용도 있다. 이는 법정에 출석하지 못할 정도로 몸 상태가 안 좋았을 거라고 추론이 가능하다. 실제로 이선경이 죽음의 문턱에 이르게 되자 일제는 급하게 그를 석방하였다. 서대문 형무소를 나온 이선경은 수원에 있는 오빠 이완성의 집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석방 9일 만에 순국하였다. 1921년 4월 21일, 그의 나이 만 19세였다.


3·1운동을 기폭제로 들불처럼 번진 독립운동

일제의 식민지배에 억눌려 있던 수원 사람들의 분노는 3·1운동을 기폭제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3·1운동 이후에도 학생들의 비밀결사 조직, 각종 사회단체들의 저항과 노동자 및 농민들의 투쟁이 이어졌다. 

민족대표 48인 중 한 명으로 수원의 3·1운동을 주도한 김세환, 김세환을 도와 3·1운동을 이끌고 수원 신간회 및 사회운동을 이끌었던 김노적, 구국민단 단장으로 활약한 박선태, 수원 곳곳에 격문을 붙여 조국의 독립의지를 고취시킨 김장성, 사회주의 독립운동으로 세 번이나 검거되었던 차계영, 총독 암살을 계획한 조득렬, 1902년 미국으로 이민하여 미주 독립운동에 나선 이병억 등 수많은 산루리의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의 폭거에 굴하지 않고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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