톺아보기

태극기의 유래와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

톺아보기

글 송명호(전 문화재청 근대문화재전문위원)



일제는 태극기 게양 자리에 일장기를 게양하고 태극기 유래까지 조작하여 말살하려 했지만 태극기를 통해 국권을 회복하려는 정신력과 독립운동의 원동력은 꺾지 못했다. 오히려 국권을 상실해 분노한 대한의 국민들에게 정신적 지주로 승화하여 독립운동의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


alt

                                 감은사지 금당 석재에 새겨진 태극 문양(왼쪽) / 경복궁 근정전 계단의 태극석(중앙) / 신덕왕후 묘 병풍석 태극 문양(오른쪽)


태극기의 시초

지구촌의 나라 국기는 올림픽 참가 기준으로 206개이다. 세계의 국기들을 살펴보면 공통적으로 삼색 줄과 십자형 밑그림에 별·달·해를 넣어 제작하고 있어, 한데 모아 놓으면 비슷비슷하고 어느 나라 국기인지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반면 우리나라 국기는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하고 유일한 태극 문양과 4괘로 구성되어 있어서 세계의 국기들 가운데서도 눈에 확 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국기인 태극기는 언제 만들어졌을까? 태극기가 처음으로 제작되어 그 모습을 세상에 알린 것은 1882년 9월 25일이었다. 1882년 7월 23일에 발생한 임오군란을 긴급히 수습하기 위해 고종은 박영효를 특명전권대신 겸 수신사로 임명하고 일본으로 파견하였다. 이때 고종은 국기를 미처 준비하지 못하였으니 운송하는 배 안에서 태극 문양과 건곤감리의 4괘를 갖춘 국기를 만들어 사용하라고 지시하였다. 이 같은 사실을 일제의 중앙지 신문 『시사신보』는 10월 2일자에 크게 보도하였다. 그 기사 내용을 보면 이렇다.


조선이 국기를 만들려고 하자 청나라에서 마건충을 사신으로 보내 청룡기를 국기로 만들어 사용할 것을 간섭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절대로 청나라 것을 따라 하지 않겠다 선언하였고, 태극 문양에 4괘를 그려 국기를 만들도록 지시하였다.


고종의 지시에 따라 박영효는 국기를 처음으로 만드는 일이라서 일본이 제공한 메이지마루호를 타고 가던 중 함께 간 서광범, 김옥균, 김만식, 영국 영사 아스톤, 선장 제임스와 논의해 태극기를 만들었다. 맨 처음에 논의할 때는 태극 문양에 8괘를 배치하려고 했는데, 그렇게 되면 너무 복잡하다는 반대 의견이 있어 고종이 지시한 대로 건곤감리 4괘만을 채택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최초의 태극기가 탄생하였고, 9월 25일 고베에 도착한 일행이 니시무라야 숙소에 게양하였다. 박영효가 수신사로 일본에 머무른 동안에 일본, 영국, 미국, 벨기에, 청나라, 프랑스, 네덜란드, 스페인, 이탈리아 등 외국의 공사들은 “태극기 모양이 너무 독특하고 예뻐서 크게 감탄하였다”며 그 모양을 그려갈 정도였다고 한다.

박영효 수신사가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귀국한 후 1883년 3월 6일(음력 1월 27일)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현 외교부)에서 “국기를 이미 제정하였으니 팔도(八道)와 사도(四都)에 알리어 사용할 것”을 건의하였고, 이는 곧 받아들여져 공포되었다. 여기서 ‘국기를 이미 제정하였다’는 뜻은 고종의 지시에 의해 박영효 수신사가 1882년 9월에 만들어 사용했던 것을 말한다. 


alt

청나라의 삼각 황룡기, 청나라는 조선에게 황룡기를 변형해 국기로 사용할 것을 제안하였다.(왼쪽) / 태극기 말살을 위한 조선총독부 칙령 19호(오른쪽)        


태극기 말살 정책

태극기가 국기로 정해지고 국민들에게 널리 보급되기도 전, 1910년 8월 29일 일제가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강탈한 경술국치로 태극기도 함께 말살되기 시작하였다. 조선총독부는 1912년 칙령 19호에 의해 일장기를 대대적으로 보급하고, 휴일이나 기념일에 일장기를 게양하도록 함으로써 태극기를 말살하려 들었다. 황실에 망신을 줄 요량으로 황실 축제일에도 일장기를 게양하도록 하고 대한제국의 존재를 없애려 하였다. 1927년에는 국기게양설비신설 명령을 보내 전국의 형무소와 관공서에 높이 18미터 국기게양탑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관공서와 학교는 말할 것도 없었고, 전국 곳곳에 일장기를 게양하도록 하여 태극기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려 하였다. 심지어 깊은 산속 사찰에까지 일장기를 보급해 게양하도록 강요했다. 

국민들 기억 속에 태극기 모양은 점차 희미해져 갔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일제의 눈을 피해 몰래 만든 태극기의 문양이 만드는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른 모양이었다.그러다 광복이 된 후 1949년에 이르러 태극기는 대한민국의 정식 국기로 선정되었다. 그런데 와중에 태극기가 48종류나 등장해 어느 모양이 진짜인지 고르는데 애를 먹었다. 태극 문양의 배열과 4괘의 위치, 색깔과 크기가 모두 달랐다. 태극기를 처음 만들었을 때는 분명히 하나였을 텐데 그 지경이 된 것은 일제 36년 동안의 태극기 말살 정책 때문이었다. 결국 국기시정위원회를 구성하여 48종류 중에 하나를 선정하였고, 수차례 논의를 거쳐 1949년 10월 15일에 현재와 같은 태극기를 국기로 채택하였다.


일제의 태극기 음모론

한때 ‘태극 문양의 태극기가 중국 것이다’라고 헛소문이 퍼진 적이 있는데, 이는 일제가 퍼뜨린 태극기 음모론 때문이었다. 태극 문양의 기원은 신라 682의 경주 용당리에 감은사(현재는 감은사지)의 금당 석재에 새겨진 신비의 문양이란 것이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감은사 태극 문양은 음양의 머리에 눈이 없는 것으로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의 궁궐 계단과 왕릉의 병풍석에 새겨 위엄을 높여 왔다. 지금도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의 회암사지와 경복궁 근정전 계단, 창경궁의 명정전 계단, 동구릉의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정자각 계단과 여러 왕릉의 병풍석에 또렷이 남아 있다. 그것이 유래가 되어 태극기의 중심 도안으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반면에 중국의 태극 문양은 기원과 문헌조차 분명하지 않을뿐더러, 모양에서도 우리나라 태극 문양과는 달리 음양의 머리에 눈이 박혀 있어서 우리의 것과 확실히 구분된다. 청나라 이홍장이 쓴 문서 『통상장성안휘편』의 대청국속고려국기를 보고 만든 것이라고 소문을 퍼뜨렸으나 그것은 1886년의 일로써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국기를 제정·반포했던 1883년 3월 6일보다 훨씬 지나서 생긴 일이기 때문에 앞뒤가 맞지 않는 내용이었다.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

태극기는 일제의 모진 말살과 음모론에도 굴하지 않고 국권을 상실한 시대에 살았던 국민들에게 정신적 지주로 승화하여 독립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을 계기로 17세 태극기 소녀 유관순 열사의 처참한 순국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일제 강점기 36년 동안 국내는 물론 상하이에서 미국에서 만주에서 항일운동의 힘과 격려와 교훈이 되었다. 수많은 애국지사와 광복군이 일제와 싸우다가 목숨을 잃은 순간까지도 당당하게 “대한독립만세”를 외칠 수 있었던 것은 태극기 정신 때문이었다. 이러한 태극기 정신은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모진 말살에도 흔들리지 않고 결국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마주하게 하였다.


alt

(왼쪽부터) 

박영효가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태극기(1882)

가장 오래된 데니 태극기(1890)

임시의정원 태극기(1919~1949)

MAIN TOP
SNS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