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산책

미국의 독립혁명

세계 산책

글 김형곤(건양대학교 교수)



올해 7월 4일은 미국이 독립한 지 245년이 되는 해다. 1776년 식민지 아메리카는 종주국인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다. 아메리카 식민지인들이 자유와 평등을 획득하기 위해 절대주의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했다는 의미에서 미국의 독립은 분명한 ‘혁명’이었다. 그러나 혁명이기 이전에 ‘전쟁’이기도 하였다. 자유와 평등을 획득하기 위한 것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기 위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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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펠함이 조각하고 폴 리비어가 판화한 보스턴 대학살         

 

영국의 아메리카 식민지 착취

영국 절대주의가 꽃 폈던 엘리자베스1세 이후 개척되기 시작한 아메리카 식민지는 그동안 본국과 동등하고 충실한 영국인으로 성장해왔다. 하지만 유럽 절대주의 국가 간에 7년 전쟁을 치르며 영국의 통치방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동등하고 충실한 동반 성장이 아니라 본국을 위한 수탈과 착취의 대상으로 식민지를 취급하였다. 

당시 아메리카 식민지의 경제 구조는 본국인 영국에 종속되어 있었다. 제조업이 거의 발달하지 못했고 소비시장 역시 영국과 유럽 대륙에 종속된 상태였다. 식민지인들은 생산된 원재료 담배·사탕수수·대구 등을 영국 상인에게 위탁 판매해 필요한 상품을 샀다. 식민지인들은 생산된 잎담배를 영국 상인에게 보내 최상 등급을 받아 필요한 상품을 많이 사는 것이야말로 명예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영국 상인들의 농간은 심해지고 원재료에 최하 등급을 매기기 일쑤였다. 식민지인들의 빚은 늘어만 갔고, 자신들의 재산이 영국 상인들에게 빼앗긴다고 생각하였다. 

그런 중에 식민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인디언 동맹 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했음에도, 차별과 착취는 더욱 본격화되었다. 영국 정부는 식민지를 보호한다는 이유로 전쟁 비용을 식민지인들이 내야 한다는 구실을 내세웠고, 각종 세금을 만들어 부과하였다. 이제는 영국 상인뿐만 아니라 영국 정부에서도 식민지인들의 재산을 빼앗아가려 하였다. 

1765년에는 ‘인지세법’을 만들어 각종 문서에 일정 한도의 돈을 부과하였다. 하지만 영국 의회에 대표를 보내지 않는 식민지인들로서는 참으로 황당한 세금이 아닐 수가 없었다. 매사추세츠 과격파 중 한 사람인 새뮤얼 애덤스는 인지세법의 시행을 방해하였다. 버지니아의 패트릭 헨리는 식민지인에 대한 과세권은 오직 식민지의회에만 있다고 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고, 버지니아·뉴욕·매사추세츠 등의 식민지의회 지도자들이 모여 인지세법의 폐기를 주장하였다. 결국 영국 정부는 식민지인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인지세법을 폐기하였으나, 이듬해 또 다른 법인 ‘타운센드법’을 만들었다. 이제 식민지로 수입되는 종이·유리·페인트·납·차(tea)에 관세를 부과하고, 세금 집행을 감독한다는 명분으로 영국군을 식민지에 주둔하도록 하였다. 

그러던 1770년 3월, 보스턴 항구에 주둔한 영국군과 주민들 사이에 사소한 다툼 끝에 식민지인 5명이 죽는 이른바 ‘보스턴 학살’이 발생하였다. 당시 보스턴 인구는 총 1만여 명이었는데 장례식에 무려 1만 명 이상이 참석해 죽은 이들을 숭고한 애국자로 찬양하였다. 이 사건 이후 영국 정부는 보스턴에서 군대를 철수시키고 차에 대한 세금만 남기고 타운센드법을 폐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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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라웨어강을 건너는 워싱턴, 엠마누엘 로이체 작(1851)             

 

끊임없는 반격 그리고 독립

식민지인들은 비로소 어떻게 해야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고 영국 정부의 간섭을 배제할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들은 ’통신위원회’를 만들어 식민지 간에 연락을 취했고, 영국 상품의 불매운동과 영국군 방해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보스턴 차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부도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식민지 인도에서 값싸고 질이 좋은 차를 대량으로 생산하여 아메리카 식민지인들에게 독점으로 판매하고 있었다. 식민지인들은 영국과 경쟁 중인 네덜란드의 차를 밀수하여 애용하고 있었는데, 영국군의 방해로 비싼 영국 차를 억지로 사야만 했다. 이에 1773년 12월 식민지인 150명이 정박해 있던 동인도회사 배에 올라가 차를 모두 바다로 던져버린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 이후 영국 정부는 식민지에 대한 단순한 경제적 이익을 얻는 데서 나아가 식민지를 본격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1774년에 영국 정부는 ‘매사추세츠 정부법’을 만들어 식민지의회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이어 ‘재판 운영법’으로 식민지인들의 자유와 인신을 구속하고, ‘군대 주둔법’으로 법 집행을 관리·감독하도록 하였다.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되자, 13개 식민지 대표들은 대책을 논의하였다. 이들은 몇 번에 걸쳐 식민지 차별정책을 금지하는 ‘청원’을 보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자,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전쟁을 결의하였다. 

독립군 총사령관으로 워싱턴이 선출되었고, 민병대 1만 8천 명이 긴급 소집되었다. 이들은 세계 최강의 해병대를 가진 영국군과 악랄하기로 소문난 독일 용병 3만 3천 명을 상대로 싸워야 했다. 전쟁 초기, 워싱턴이 이끄는 독립군은 뉴욕전투를 비롯하여 무려 33번의 전투에서 연전연패하였다. 하지만 워싱턴은 패배로부터 절망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배웠다. 영국군은 바다와 강에서 최강이라는 것, 그들은 이른바 라인 베틀을 전투 방식으로 고집하고 있다는 것, 전쟁의 끝은 사령관인 자신을 잡아야만 끝난다는 것, 그리고 귀족 중심의 오만한 군대라는 것 등이었다. 1776년 12월 크리스마스 저녁, 워싱턴은 3천 명으로 줄어든 독립군을 이끌고 꽁꽁 언 델라웨어강 도강 작전을 통해 영국군을 상대로 첫 승리를 기록하였다. 곧바로 워싱턴은 파지 계곡 등의 산악지역으로 숨어 게릴라전을 펼쳤다. 필라델피아와 뉴욕 등 식민지 주요 도시들이 영국군에 점령당하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새로운 민병대의 보충과 프랑스의 도움 등으로 1781년 요크타운 전투에서 대대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워싱턴은 모든 권력을 가진 군인으로서 왕이나 황제가 될 수 있었음에도, 대륙회의에 자신의 칼과 총을 반납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시간이 흐른 후 인류 최초의 공화국이 탄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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