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인연

한중 국제연대의 중요성을 

온몸으로 실천한  

김성숙과 두쥔훼이

아름다운 인연

글 김형목(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김성숙과 두쥔훼이는 1929년 중국 상하이에서 결혼하였다. 부부는 1935년 12월 12일 중국 좌익작가 연맹 및 문화계 인사들과 함께 「상해 문화계 구국운동 선언」을 발표하고 함께 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 중국 여성계의 항일구국운동에도 참여하였다.  부부는 국적을 초월해 일제 침략을 타도하려는 한·중 연합 항일투쟁의 모범적인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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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숙(좌) / 김성숙 환국 후 임정요인과 함께(경교장, 1945. 12. 3.)(우)         


‘붉은 승려’ 김성숙으로 알려지다

김성숙은 1898년 3월 10일(음력) 평북 철산군 서림면 강암동에서 김문환(金文煥)과 임천 조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이 김성암인 성숙은 승려가 되면서 얻은 법명이다. 본관은 상산으로 호는 운암, 법명은 태허·성숙, 다른 이름으로 충창·창숙·성암 등이 있다. 서당에서 한문을 배운 뒤 학교에 입학했으나 강제 합병 후 식민지교육에 반감을 느끼고 중퇴하였다. 

1916년 봄에는 ‘독립군 양성 요람지’인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려고 집을 나섰으나 일본군의 삼엄한 경비로 실패하였다.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어 고민에 빠져 있던 중 함경남도 원산 서강사에서 신원 스님을 만나 출가를 결심하였다. 경기도 양평 용문사에서 사미계를 받고 남양주 봉선사에서 월초 스님을 은사로 비구계를 받았다. 그는 김산(본명 장지락)의 사상적 스승으로서 ‘금강산의 붉은 승려’ 김충창이란 이름으로 『아리랑』에 등장한다.

3·1운동의 불길이 타오르자 경기도 양주와 포천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돼 옥고를 치른 후 불교 개혁운동과 조선노동공제회·무산자동맹회 등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불교뿐만 아니라 철학과 사회과학 서적을 두루 읽는 한편 월초 스님과 가깝던 손병희·한용운·김법린 등과 교류하였다. 


문필로 한인사회에 민족의식을 일깨우다 

1923년 초 김봉환 등 5명과 베이징으로 망명하여 민국대학 정치경제학과에 재학하면서 사회주의에 관한 지식과 이론을 앞세워 존재감을 확보해갔다. 재학 중 공산주의 잡지 『혁명』, 베이징불교유학생회 기관지 『황야』, 고려유학생회 기관지 『해외순보』 등의 발간을 주도하며 필명을 날리고 의열단에도 가입하였다. 일제의 감시망이 좁혀오자 1925년 활동무대를 광저우로 옮겼다. 이듬해 중산대에 입학해 김원봉·김산 등과 유월한국혁명동지회를 조직하고 기관지 『혁명운동』 주필을 맡았다.

이곳에서 중국인 여학생 두쥔훼이(杜君慧)와 운명적 사랑에 빠졌다. 한국에 부인과 1남 1녀를 둔 상태였으나, 1929년 중국 상하이에서 결혼하였다. 1938년 김원봉 등과 조선의용대를 창설하고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임시정부는 김구 등 우파가 주도하고 있었으나 조국 해방을 위해서는 민족 단결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태평양전쟁 발발 즈음에 모든 독립운동단체를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통일지휘 하에 집중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선전위원, 외교위원, 내무차장을 거쳐 국무위원에 뽑혔다. 한중문화협회 이사와 한국구제총회 감사도 맡는 등 한중 연대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통일정부 수립에 매진하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 소식에 김성숙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도 “임정과 민족의 앞길은 먹구름 같은 외세에 가로막혀 캄캄하게 됐다”고 우려하였다. 1945년 12월에는 부인과 세 아들을 중국에 남겨둔 채 미군 수송기를 타고 귀국하였다. 환국 후에는 여운형·김규식 등과 좌우 합작운동에 참여했으나 남북연석회의에는 불참하였다. 6·25 때는 미처 피란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았다가 남로당 간부의 협조 요청을 거절하였다. 이후 혁신계 인사들과 함께 반독재 투쟁을 전개하다가 이승만 정권의 탄압을 받았다.

4·19혁명 후 사회대중당에 참가해 정치활동을 재개했으나 5·16 군사정변으로 투옥되었다. 중립화 평화통일론을 주장해 북한을 이롭게 하였다는 혐의였다. 독립유공자 표창 소식을 듣고 김성숙은 “우리나라가 아직도 독립되지 못하고 외국 세력 하에서 신음하고 있으므로 독립운동을 계속해야 한다. 아직은 논공행상할 때가 아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후 통일사회당·신한당·신민당 등에 몸담고 반독재 노선을 걷다가 1969년 4월 12일 71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장례식은 서울 조계사에서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경기도 파주에 묻혔다가 2004년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 묘역으로 이장하였다. 2008년 4월에는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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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쥔훼이           


중국 신여성 두쥔훼이로 거듭나다

두쥔훼이는 1904년경 중국 광둥성 광저우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과자점 점원으로 부유하지는 않았으나 어느 정도 경제력을 가졌다.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너무나 좋아하였다. 특히 역사적인 인물들을 존경하면서 이들의 인생역정은 자신의 롤모델로 삼을 만큼 자신감에 차 있었다. 어린 시절에 어머니와 함께 집 앞에서 우연히 혁명가들이 청나라 군인들에 의해 끌려가는 현장을 목격하였다. 어머니는 이러한 광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저 혁명가들은 다 훌륭한 분들이야. 피 흘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진짜 사나이들이란다.”

7세에는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탄생하는 역사적인 순간을 맞았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삼촌의 변발을 잘랐을 만큼 시세 변화에 부응하였다. 이후 아버지를 도우면서 틈틈이 학업에 정진하였다. 시대 변화에 따라 광둥대는 처음으로 여학생 입학을 결정하였다. 곧바로 입학시험에 응시해 합격함으로 광둥성 최초의 여대생이 되었다. 재학 중 외국인 한 청년으로부터 일본어 과외를 받았다. 주인공은 바로 김성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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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고 행복한 새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분투하자’는 김성숙의 유묵(1945)(좌) / 김성숙, 두쥔훼이 가족과 박건웅       


운명적인 만남으로 혁명동지가 되다

님 웨일즈의 『아리랑』 주인공 김산은 이들 만남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김성숙은 1927년 늦여름부터 두쥔훼이를 열렬히 사랑하였다. 그는 매일같이 두쥔훼이를 데리고 ‘72열사의 광장’이 있는 공원을 찾았다. 친구들은 그가 ‘연애병’을 버리고 공산주의 활동에 전념하기를 충고했으나 소귀에 경 읽기였다. 그녀도 이방인 김성숙을 열렬히 사랑하여 오히려 두 사람의 애정은 더욱 깊어졌다. 중산대학에 재학 중 김성숙에게 일본어를 배우면서 혁명사상 등에 큰 영향을 받아 혁명에 투신하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광저우 폭동에 참여해 연결책 지도원인 김성숙은 두쥔훼이의 집에 찾아와 친필로 쓴 한국어 공책을 주면서 안전한 곳에 보관해달라고 했다. 주요 내용은 광저우 폭동에 대한 상세한 경과 보고서였다. 아울러 대학 기숙사 안에서 위기에 처한 학우들에게 피신하라는 전언을 부탁하였다. 두쥔훼이는 김성숙을 도와주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그와 함께 길을 떠났다. 두 사람은 기숙사로 가는 도중에 유혈이 낭자하고 시체가 즐비한 끔찍한 광경을 목격하였다. 두쥔훼이는 커다란 충격과 아울러 당국의 가혹한 탄압에 분노를 느꼈다. 무사히 기숙사에 도착하여 학우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켰다. 

1928년 초에 두쥔훼이는 일본으로 유학을 가기로 결심한 후 도쿄에 이르렀다. 그녀는 그곳에서 3개월간 학업에 전념하였다가 6월에 귀국해 상하이에서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녀는 김성숙과 함께 좌익작가연맹에 가입해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선전하고 국민당 정부의 부패상을 비판하였다. 두 사람은 『사회과학사전』과 『교육사』를 함께 번역하였다. 일본인들이 레닌의 『국가와 혁명』에 기반을 두고 집필한 『국가와 계급』을 번역하는 등 사회주의이념 확산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929년에 두 사람은 마침내 결혼하여 3명의 아들 두간(金杜甘)·두젠(金杜建)·두렌(金杜連) 등을 두었다. 이후 그녀는 김성숙과 함께 중국창작비평위원회에 가입했고, 1935년 12월 12일 중국좌익작가연맹 및 문화계 인사들과 일제의 화북 지역 침탈을 성토하는 내용의 「상하이 문화계 구국공동선언」을 발표하고 남편과 함께 서명서에 서명하였다. 또한 그녀는 상하이 여성구국회에 가입해 중국 여성계의 항일구국운동에도 참여하였다. 

독립운동에 전념하는 남편을 따라가며 가정을 보살피던 두쥔훼이는 1943년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 부원과 외무부 외사과 과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녀는 외무부 정보과 과원과 안정근이 회장을 맡고 있던 한국구제총회의 이사로 활동하였다. 광복을 눈앞에 둔 1945년 7월 미국에서 발행되는 잡지 『독립』 기고문에서 ‘조선의 딸’을 자처하고 “나는 늘 조선 부녀들의 일을 나의 일로 생각하고 어떻게 해야 우리 조선 부녀 동포들이 전 민족의 해방을 위해 공헌할 수 있을 것인가 늘 생각하고 있다”며 절절한 독립의 염원을 토로한 바 있다. 이처럼 한국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며 한중 우호를 다지는 등 지속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한편 그녀는 ‘트로츠키파’와 일본의 스파이로 몰려 고초를 겪은 김산과 가깝다는 이유로 1936년부터 10년간 공산당 당적을 박탈당하는 시련도 겪었다. 당적은 저우언라이(周恩來) 부인인 덩잉차오(鄧潁超) 도움으로 다행히 회복될 수 있었다.


국경을 초월한 인생항로가 다시 조명되기를

두쥔훼이는 광복 이후 한국으로 가는 교통편을 마련하지 못해 남편이 홀로 한국으로 떠나는 걸 지켜봐야 하는 운명이었다. 결국 세 아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아버지와 생이별한 중국의 세 아들은 어머니 성을 따라 호적에 올렸다. 첫째 두간은 광둥성교향악단 지휘자로 이름을 날린 음악가다. 줄리아드음악원 출신의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두닝우(杜寧武)가 그의 아들이다. 둘째 두젠은 화가이자 베이징중앙미술대 교수이고, 셋째 두롄은 국가발전개혁위원회 고문을 맡았다. 1950년대에 아들들은 아버지를 찾아 인천에 들어왔지만, 자유당 정권은 그들을 인천 월미도에 있는 수용소에 감금하였다가 중국으로 추방하였다. 김성숙은 이 일로 실의와 좌절에 빠져 동지들과 만나 밤을 새워가며 폭주를 한 탓에 건강이 몹시 악화되었다.

두쥔훼이는 이후 육재학교(育才学校) 주임 교사로서 인재 육성에 앞장섰다. 1949년 2월에 베이징으로 가서 제1차 전국여성대표대회와 9월에 제1회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에 참석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엔 베이징여2중학교 교장을 맡았다. 베이징 제6중학교 당지부 서기 겸 교장을 역임했고, 중공 제8차 전국대표대회에 참석하였다. 그녀는 1981년에 고향에서 사망하였다. 정부는 2016년 두쥔훼이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아들은 “어머니의 머릿속에는 조선의 일과 중국의 일은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동북아 지역의 조선민족과 중화민족은 공동의 운명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조선(한국)과 중국이 결합해 공동으로 투쟁하는 것은 역사적 필연이었습니다”라고 회고하였다. 운암김성숙기념사업회는 애틋한 사랑이 싹튼 중국 중산대에 김성숙·두쥔훼이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아련한 두 분 인생역정이 한중 선린우호에 새로운 전기로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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