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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으로 쓴 스포츠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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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손 환(중앙대학교 교수)



일제는 식민지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한국인의 스포츠 활동을 통제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스포츠 활동의 통제는 한국인에게 규율을 적용한 집단적 훈련을 통해 신체 활동의 효율을 높이는 데 있었다. 일제는 식민지 통치를 위한 권력 장치로서 한국인의 스포츠 활동을 ‘순종하는 신체’로 만들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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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베를린올림픽대회 마라톤 시상식, 일장기를 가린 손기정과 동메달 남승룡


일제의 스포츠 활동 탄압

1910년 8월 경술국치 이후 실시된 일제의 무단통치정책은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금지시켰을 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스포츠 활동을 통제하였다. 이로 인해 스포츠 활동의 대부분을 일제가 장악하면서 학교, 교육단체, 공공기관을 중심으로 탁구·테니스·스키·럭비·골프 등 각종 스포츠가 도입되었다. 이어 스포츠 단체가 주최하는 각종 경기대회와 강습회 등을 통해 사회에 보급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후에 일제는 이른바 무단통치정책을 문화통치정책으로 바꾸었는데, 그 일환으로 스포츠 활동을 권력 장치로 활용하여 우리 민족을 보다 효율적으로 지배하려 하였다. 1937년에는 중일전쟁을 일으켜 한국을 대륙 침략의 거점으로 삼고, 1941년에는 제2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는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며 민족말살정책을 감행하였다. 

일제는 체력 관리라는 명목으로 한국인에게 스포츠 활동을 장려하였으나, 실상은 전시체제하 체력을 증강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로써 스포츠 활동은 본래의 기능에서 벗어나 일제의 군국주의적 전쟁 수행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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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조선육상경기대회 안내 책자(좌) / 제3회 조선육상경기대회 상장(1928)(우)


한국 스포츠계를 이끈 조선체육회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일제는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정책으로 바꾸게 된다. 이러한 통치정책의 전환은 스포츠계에 활성화를 가져왔다. 기존에 금지한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부분적으로 허용하면서 스포츠 활동도 활발히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그중에서도 조선체육회(현, 대한체육회)의 설립과 활동이 대표적이다. 

조선체육회는 변봉현 기자(동아일보)의 논설인 「체육기관의 필요를 논함」을 통해 한국의 청년들 모두가 스포츠 단체 설립에 힘을 모아 운동가를 양성하고 스포츠를 장려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스포츠 단체의 설립을 위한 구체적인 조건으로 스포츠를 좋아하는 운동가와 유지인사의 단결, 스포츠 단체의 설립에 필요한 재정의 원조와 후원을 강조하였다. 이렇게 조선체육회는 1920년 7월 13일 한국 청년에게 운동 사상을 고취하고 체육의 장려를 목적으로 중앙예배당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조선체육회는 창립 취지서의 발표와 규칙의 제정, 임원의 선정 등을 통해 조직의 체제를 갖추고 전 조선야구대회를 비롯해 각종 경기대회의 개최, 체육 연구 활동, 운동용구 판매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조선체육회가 설립되고 나서 처음으로 개최한 경기대회는 동아일보사의 후원을 받아 배재고보 운동장에서 열린 제1회 전 조선야구대회였다. 이때 전국의 젊은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운동정신을 발휘하며 스포츠계의 신기원을 이루었는데, 이는 오늘날 매년 개최되고 있는 전국체육대회의 효시로서 한국 스포츠사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후 조선체육회는 해마다 축구·정구·육상 등의 종목을 늘리면서 각 종목별 전 조선경기대회를 개최하였다. 1929년에는 조선체육회 창립 10주년을 기념해 전 조선경기대회를 개최했으며, 1934년에는 창립 15주년을 맞이해 전 조선종합경기대회를 개최하며 스포츠계를 이끌어나갔다.

그러나 1937년 7월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켜 전시체제에 돌입하자 조선총독부는 통치정책을 민족말살정책으로 전환하고 우리의 스포츠 단체와 활동을 전면적으로 통제하고 탄압하였다. 이로 인해 한국의 스포츠 발전을 위해 많은 기여를 한 조선체육회는 1938년 일제의 스포츠 단체인 조선체육협회에 흡수되어 강제로 해산당하고 말았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조선체육회는 그해 11월 7년 만에 재건되었으며,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후 명칭을 대한체육회로 바꾸고 한국 스포츠계의 총본산으로 그 역할을 다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민족주의적 스포츠 활동

조국 없는 마라토너, 비운의 스타, 일장기말소사건 등으로 잘 알려져 있는 손기정은 한국 마라톤계의 영웅이자 한국 육상계의 영웅이다. 손기정은 1936년 베를린올림픽대회 마라톤에서 당시 인간의 한계라고 하는 2시간 30분대의 벽을 돌파하고 올림픽 신기록을 수립하며 당당히 우승을 차지하였다. 이때 손기정과 더불어 남승룡은 동메달을 획득하였다. 손기정의 우승과 남승룡의 동메달 획득은 일제강점기 식민지 통치를 받고 있던 우리 민족에게 울분을 토로하고 민족의식을 일깨워주는 계기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우수성과 저력을 전 세계에 과시하였다.

손기정의 우승에 대해 당시 국내의 언론사에서는 호외를 발행하며 대대적으로 보도했는데, 손기정이 인류 최대의 영예인 올림픽대회 마라톤에서 각국의 선수를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해 민족의 영예와 자신감을 심어주었다고 하였다. 손기정의 우승이 전해지자 전국 각지에서 축전이 쇄도하고 학자금 보장, 기념탑 및 체육관 건립, 동상 건립, 구두 제공, 축하 공연 등이 행해졌다.   

한편 손기정은 현지에서 사람들에게 사인을 요청받았을 때 국명을 ‘JAPAN’이 아니라 ‘KOREA’로, 이름도 ‘孫基禎’이 아니라 한글로 ‘손긔졍’이라고 해주었다. 이것은 올림픽대회 후보 선발전에서 국가없는 서러움을 느끼며 분개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손기정은 아무리 좋은 성적을 내더라도 시상대에서 우리의 국가(國歌)를 들을 수 없다는 현실을 생각하며, 스스로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행동하였다. 

손기정의 우승은 당시 미국과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던 민족 지도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또한 손기정은 올림픽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최초의 한국인으로서 일제강점기 식민지 통치를 받고 있던 우리 국민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워주고 무한한 긍지와 자부심을 심어주었다. 

베를린올림픽대회 금메달 획득 후 75년이 지난 2011년, 손기정은 한국 스포츠의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한 체육인들 중에서도 모든 체육인의 귀감이 되고 국민의 존경을 받는 인물로 평가받아 대한체육회의 스포츠 영웅에 선정되었다. 그리고 손기정 탄생 100주년을 맞이한 2012년에는 베를린올림픽대회 우승으로 받은 금메달, 우승 상장, 월계관이 체육사·민족사적 가치가 크다고 평가 받아 문화재로 등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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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조선종합경기대회 메달(1936)(좌) / 손기정 금메달(우)


빼앗긴 들에서 민중의 스포츠 활동

우리 민족 고유의 씨름은 민족정신 고양을 위한 스포츠로서 민중의 지지를 받아 주로 장터나 강변의 모래사장에서 거행되었다. 당시 씨름의 모습을 보면, 고양군 뚝섬에 수천 명의 구경꾼이 모인 가운데 마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였다. 씨름은 전통적으로 국민들 사이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씨름은 3·1운동 후 민중스포츠로서 정착하였다. 『동아일보』에 따르면, 씨름은 민중스포츠의 일종으로서 국민의 보건에 중대한 효과를 보이고 민중에게 질서와 훈련을 가르쳤다고 한다. 또한 씨름은 취미를 겸해 유용한 스포츠라는 것도 강조하였다. 이처럼 씨름은 민중의 오락으로서, 신체를 단련하는 경기로서 행해졌다.

그리고 당시 한국의 스포츠는 엘리트스포츠에 치우쳐 있어 스포츠의 민중화를 도모하기 위한 일환으로 민중보건체육법이 등장하기도 했다. 민중보건체육법은 조선체육연구회가 민중의 보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언제, 어디서, 누구나 손쉽게 할 수 있도록 덴마크의 닐스 북 체조를 연구해 한국인에게 적합한 내용으로 만들었는데, 그 결실이 『정말체조법』의 발행이었다. 조선체육연구회는 전국적으로 활동을 전개하면서 민중보건체육법의 보급에 앞장서며 스포츠의 민중화를 위해 많은 역할을 수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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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체조법』, 삼천리사(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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