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태극기는 어떻게 만들어졌고 

되새겨야 할까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글 이계형(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한 국가의 국호·국기·국가·연호 등은 한 민족·국가·정부·국민의 모든 것을 상징하는 것이고, 그 시대성과 정치 내용 형태 등을 집약적으로 표현할 뿐 아니라 국민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대외적인 영향도 적지 않다. 대한제국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을 맞아 민주주의 국가가 탄생하였지만, 제헌국회에서는 국호만을 결정하였을 뿐 국기·국가·연호 등은 명확히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국가의 상징성이 가장 큰 국기는 어떻게 만들어져 지금에 이르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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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 8괘도              


국기의 탄생 배경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국기의 의미를 알게 된 것은 1875년 운요호 사건 때문이었다. 당시 조선군 수비병 35명이 전사하였고 일본군은 2명의 경상자만 발생했음에도 일본은 전권대사를 파견하여 책임을 추궁하였다. 일본은 “우리는 대일본제국의 국기인 일장기를 달고 조선을 방문하였는데 귀국 수병들이 무차별 포격을 하였다”며 트집을 잡았다. 이에 조선은 “우리는 일장기가 무엇이며 국기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우리나라 수병들에게 가르친 적도 없다”고 항변하였다. 사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직후에 부산 왜관을 통해 일장기 사본을 조선에 보내 준 바 있었으나 그 의미를 몰라 무시해버렸다. 

국기 문제는 조일 간 강화도 회담이 진행되는 와중에 다시 제기되었다. 일본이 조선에 속히 국기를 만들어 보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때 조선은 국기 사용에 대한 의미를 알게 되었지만, 국기가 국제 외교에서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정도에 그쳤다. 

그 뒤 1880년 청의 외교관 황쭌센(黃遵憲)은 조선의 국기로서 ‘용이 그려진 깃발(용기, 龍旗)’를 제안하였다. 이는 청의 국기였던 ‘대청황룡기’를 본떠 만들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외국과의 교류가 없었던 조선은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여 국기 도안 문제는 더 논의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882년 5월 조미조약 체결 당시에 미국은 성조기를 걸었으나 조선은 마땅한 것이 없어 급히 ‘태극도형기(흰 바탕에 청홍 태극 문양)’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이의 바탕색은 백성의 옷, 홍색은 왕의 옷, 파랑은 신하의 옷을 상징했다고 한다. 이에 청 외교관 마젠중(馬建忠)은 태극도형기와 일본 국기가 너무 닮아 멀리서 보면 식별이 어렵다며, 조선국은 ‘대청황룡기’를 사용하되 속국답게 용의 발톱 한 개를 줄이고 청운(靑雲)을 홍운(紅雲)으로 그려서 사용하도록 권하였다. 이를 담당했던 김홍집은 그의 제안을 정중히 사양하고 ‘태극 8괘도’ 도안을 내놓았다. 이는 그 후 조선 국기의 근거가 되었다. 여기에 고종의 홍룡포를 하늘의 태양(太陽)에다 배치하고 신하의 관복인 파란색을 태음(太陰)으로 삼은 태극 문양을 추가하였다. 

1882년 여름, 임오군란 이후 수신사 박영효가 일본 여객선 메이지마루(明治丸)를 타고 현해탄을 건너는 중에 영국인 선장의 조언을 받아 대각선에 있는 4괘만 남기고 나머지는 없앤 국기를 만들었다. 박영효는 이 국기를 일본에 도착한 뒤에 처음으로 숙소인 니시무라 여관에 내걸었다. 이때 각국의 외교관들이 박영효가 묵고 있는 숙소로 찾아와 조선 국기를 그려갔다고 한다. 1883년 1월 고종은 이를 조선 국기라 공식 인정하고 전국에 알렸다. 그 뒤 대한제국이 성립한 이후에 ‘태극기’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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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박영효가 제작한 최초의 원형 태극기(좌) / 1949년 10월 문교부가  공표한 대한민국 국기(우)     


태극기의 변천사

그러나 1910년 8월 경술국치로 인해 대한제국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더는 태극기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나라 잃은 국민들의 마음속에 단 하루도 태극기를 내린 적이 없었다. 때문에 1919년 3·1운동 당시 전국 각지에서 만세운동을 벌이면서, 제각기 모양은 다르지만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나섰다. 태극기는 35년 동안 일제의 압제를 당하였던 한국인들에게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독립운동가들은 언제나 태극기를 내걸고 독립을 염원하였고, 태극기를 통해 독립된 나라를 꿈꾸었다.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자 국민들은 모두가 한뜻으로 태극기를 그려서 들고 나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비록 모양은 제각각이었지만 모두의 한마음을 담은 태극기였다. 그해 12월 환국 직후 임시정부 내무부장 신익희가 태극기의 양식과 만드는 법을 알렸지만, 역시 통일되지 못하여 행사마다 다른 모양의 태극기가 사용되곤 했다. 그러다가 1948년 7월 제헌국회에서 헌법을 제정하면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자는 데 일단 의견 일치를 봤는데, 헌법에 태극기를 국기로 정하는 내용을 포함하자는 의견은 부결되었다. 그래서였는지 그해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국민 축하식’ 당시 두 개의 태극기가 다르게 내걸리는 불상사도 일어났다. 또 그때까지만 해도 태극기를 사용했던 북한이 그해 9월 인공기로 바꿨다. 이때 『한성일보』 사설란에 “각양각색으로 혼동 난용(亂用) 되고 있는 것은 자못 민족적으로 치욕스러운 일이다”라면서 “8괘의 방위 등이 안정되지 못한 폐”가 있다며 정부의 시정을 촉구하였다. 

이러한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 1949년 1월, 해가 바뀐 뒤에서야 국회 내에 국기제정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다만, 이는 국기를 바꾸자는 것이 아니라 태극기의 색채와 위치를 통일하는 데 있었다. 이에 국기시정위원회(國旗是正委員會)로 개칭되어 열린 회의에서 새로운 국기의 제정은 통일 이후로 미루기로 하고 태극기의 표준을 세우기로 하였다. 몇 개월 동안 여러 의견을 논의한 끝에 당시의 국기를 그대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다만 감(坎)과 리(離)의 위치를 서로 바꾸고 깃봉의 연꽃 봉우리를 금빛 무궁화 봉오리로 변경하였다. 이를 토대로 1949년 10월에 비로소 정부가 현재 모습의 태극기를 정식 국기로 제정하였다.

태극기는 한말 왕조 체제에서 만들어졌지만, 독립운동 당시에도 국가의 상징으로 존엄하게 여기고 숭앙(崇仰)하였다. 3·1운동 때나 해방 직후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태극기를 들고 나왔던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이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어도 태극기가 우리나라의 국기로 자리매김하였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태극기에는 고난과 희망의 역사가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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