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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스포츠의 선구자 

여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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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손 환(중앙대학교 교수)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말은 1941년 여운형이 일본 고마신사를 방문했을 때 민족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남긴 글이다. 여운형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치며 헌신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였으며 스포츠맨이었다. 일제강점기에 그는 운동선수로서, 각종 스포츠 단체의 임원으로서, 언론사 사장으로서 각종 경기대회를 개최하였다. 더불어 일장기말소사건을 주도했으며, 광복 후에는 한국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자주 국가로서 올림픽대회에 참가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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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


한국의 스포츠맨 여운형

여운형은 1914년 중국 난징의 진링대학에 입학해 국내에서 익혔던 운동 실력을 발휘하였다. 야구와 육상 선수로 활동하며 교내외에 이름을 떨치고 학비를 면제받았다. 여운형의 운동 실력은 상당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실력을 인정받은 여운형은 수료 후 푸단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체육을 지도하였다. 

한편 중국체육회의 종신회원이 되어 축구부를 이끌고 동남아시아에 원정을 가기도 했는데, 필리핀에서 연설을 한 것이 문제가 되어 미국 관헌에게 여행권을 빼앗긴 적이 있었다. 당시 일본 영사관에서 체포하려고 하자 비밀리에 중국 상하이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러나 여운형은 상하이 대마로 경마장에서 열린 규슈제국대학과 상하이 구락부의 야구경기를 구경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이 일로 3년의 형기를 마치고 1932년 석방된 여운형은 자택에서 몸을 추스른 후 1933년 2월 조선중앙일보사 사장에 취임하였다.  

사장에 취임한 여운형은 그해 3월 조선연무관 고문을 시작으로 각종 스포츠 단체의 고문 및 이사장, 회장, 이사로 추대되었다. 언론사 사장으로서 사회적인 위치도 있지만, 평소 스포츠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조선여자체육장려회 고문, 경성축구단 이사장, 조선체육회 이사, 1934년에는 조선축구협회 회장, 조선농구협회 회장, 서울육상경기연맹 회장, 1935년에는 조선유도유단자회 고문, 동양권투회 회장, 스포츠여성구락부 고문, 1936년에는 고려탁구연맹 회장에 추대되었다. 여운형은 각종 경기대회를 개최하고 강연을 하며 한국의 스포츠 발전을 위해 많은 공헌을 했다. 특히 조선축구협회 회장 시절에는 베를린올림픽대회 축구 대표 선발에 한국인 선수를 차별하는 부당한 처사에 정면으로 맞서 항의를 한 일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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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1936. 8. 13.)


여운형과 일장기말소사건

1936년 8월 9일 베를린올림픽대회 마라톤에서 손기정이 우승하자 조선중앙일보사 사장이었던 여운형은 라디오를 통해 소식을 듣고 감격하며 즉시 호외를 발행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러고 나서 8월 13일자 『조선중앙일보』에 손기정 가슴에 일장기가 지워진 채 보도되었는데, 이것이 일장기말소사건의 첫 보도였다. 이 보도 내용을 보면 “머리에 빛나는 월계관, 손에 굳게 잡힌 견묘목, 올림픽 최고 영예의 표창을 받은 손 선수”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당시 신문의 사진 상태가 좋지 않아서인지 일장기가 지워져 있던 것을 모른 채 조선총독부의 검열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이어서 『동아일보』가 8월 25일자 신문에 손기정 가슴의 일장기를 지우고 보도했는데, 이것이 우리들이 알고 있는 그 유명한 일장기말소사건이다. 『동아일보』의 보도로 경기도 경찰부가 일장기말소사건의 수사에 착수하면서 『조선중앙일보』의 일장기말소 건도 같이 조사를 받게 되었다.

당시 『조선중앙일보』에 일장기를 지우고 게재했던 유해붕 기자는 조선의 유사 이래 처음으로 세계를 제패한 손기정의 우승을 대대적으로 보도해 우리 민족의 자부심과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했다. 당시 여운형 사장도 “붓대가 꺾어질 때까지 마음껏 민족의식을 주입할 것이며 그놈들의 주의를 들을 필요는 없다”고 격려해주었다. 그리고 “일장기 말소에 대해 우월감을 가진 일은 없었으며, 조선인이라면 누구나 일장기를 말소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이로 인해 여운형은 사표를 제출하였고 『조선중앙일보』는 9월 4일 자진 휴간을 했으나, 결국 폐간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여운형과 올림픽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광복을 맞이한 한국은 조선체육회의 재건을 위해 조선체육동지회를 설립하였다. 조선체육동지회는 1945년 9월 27일 일제강점기 조선체육회를 비롯한 각 스포츠 단체의 임원과 올림픽대회에 출전한 엘리트선수 등 스포츠계의 권위자를 총망라해 이상백을 위원장으로 추대하고 새로운 스포츠 활동을 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였다. 조선체육동지회는 그해 11월 12일 YMCA에서 총회를 열고 만장일치로 여운형을 조선체육회 회장에 추대하였다.

조선체육회 회장에 취임한 여운형은 1946년 10월 16일 서울운동장에서 조선올림픽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서 여운형은 1948년 런던올림픽대회를 앞두고 한국의 젊은 선수가 모든 역량을 발휘하는 무대에서 최선을 다해 좋은 기록을 남겨야 한다고 전했다. 그리고 ‘조선올림픽의 노래’를 제정·발표하고 이날을 축복하는 동시에 노래의 보급을 위해 악보 3만 장을 일반 관람객에게 나누어주었다. 또한 1947년 보스턴마라톤대회에서 서윤복이 우승을 차지하자 그의 위대한 공적을 찬양하기 위해 우승 축하회를 개최하였다. 이 자리에서 여운형은 “그동안 나라 잃은 서러움이 있었으나 앞으로 우리 민족의 의기와 기백을 살려 하나가 되어 전진하자”고 말하며, 다가올 올림픽대회에서도 우리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과시하고자 하였다.

한편 조선체육회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전 반드시 런던올림픽대회에 참가하기 위한 대책 마련에 몰두하였다. 이유는 런던올림픽대회가 신생 독립국인 한국을 국제사회에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1947년 5월 9일 조선체육회 산하단체가 YMCA에 모여 여운형, 유억겸, 전경무, 이상백, 정범환, 하경덕, 이병학, 이법용, 민원식 등을 조선올림픽위원으로 선출하고, 5월 12일 제1차 위원회를 개최해 위원장과 부위원장은 조선체육회 회장과 부회장이 겸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렇게 해서 당시 조선체육회 회장인 여운형이 초대 조선올림픽위원회(현,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운형은 한국이 ‘KOREA’라는 국호로 런던올림픽대회에 참가하는 모습을 보지도 못하고 1947년 7월 19일 괴한의 습격을 받아 62세의 나이로 안타깝게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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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런던올림픽(좌) / 런던올림픽 대한민국 선수단


스포츠 조선의 건설

여운형은 스포츠 조선의 건설을 위해 엘리트스포츠뿐만 아니라 생활스포츠의 보급, 그리고 스포츠계에 만연하고 있는 승리 지상주의의 정화, 스포츠의 과학적 지도와 조직의 필요성 등 한국 스포츠계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 해결 방안을 제안했다. 또한 심신일원론적 입장에서 스포츠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스포츠 활동은 위생과 장수는 물론 판단력·책임감·단결력을 키워주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그밖에 여성 스포츠의 필요성과 경기에서의 페어플레이 정신도 강조하였다. 

여운형은 어린 시절 몸이 허약해 병이 많았으나 철봉운동을 통해 많은 효과를 보며 건강을 유지했는데, 본인의 경험을 기반으로 철봉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국민들의 건강을 위해 국민체육에 활용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일제강점기 세계 정상에 선 서정권의 선전을 계기로 권투조선의 기상을 전 세계에 알리며 한국인의 저력을 보여주자고 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광복 후에도 볼 수 있는데, 보스턴마라톤대회에서 서윤복이 우승하자 전 민족적으로 환영한다고 하면서 이번 기회에 전 민족이 하나로 뭉쳐 한국인의 우수성을 발휘하자고 역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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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철봉운동법』, 한성도서주식회사(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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