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인연

제암리학살사건에서 순국한

홍원식과 부인 김씨

INPUT SUBJECT

글 김형목(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집단살해 및 대량학살을 뜻하는 제노사이드(genocide)는 원래 ‘인종’, ‘민족’ 등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genos’와 ‘살해’를 뜻하는 라틴어 ‘cide’에서 유래하였다. 세계사적으로 일어난 대표적인 대량학살은 너무나 잘 알려진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유대인에 대한 학살사건이다. 안타깝게도 자유에 반하는 집단학살은 아직도 지구촌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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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암리 방화학살로 파괴된 민가(좌) / 제암리 희생자 유족(우)              

  

한국판 제노사이드의 상징, 제암리학살사건

2021년 4월 15일은 제암리학살사건이 일어난 지 102주년을 맞는 가슴 아픈 날이다. 3·1운동 당시 일본 군인이나 경찰은 평화적인 시위에 대해 끔찍한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바로 화성시 제암리, 고주리, 수촌리 일대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집단학살이 대표적이다. 이는 일제의 야만적인 식민지배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준다. 세계인들 공분을 자아내는 충격적인 사건에 대해 일본은 현재까지도 잘못된 과거사를 반성하기는커녕 인정조차도 하지 않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화성시 만세길’에 얽힌 사연은 역사적인 아픈 기억으로 다가온다. 1982년 8월 4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전동례 할머니의 증언은 그날의 참혹함을 생생하게 살아나게 한다. 

“마을에서는 아직도 꺼지지 않은 불꽃이 밤하늘을 밝혔으며 곡식 타는 냄새, 시체 타는 냄새가 밤새 바람에 실려 왔고 서까래가 내려앉고 기둥이 쿵쿵 넘어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 나는 죽어서 하늘나라에 계신 남편과 다시 만날 때까지 몸서리치는 그날의 악몽을 잊지 못할 것이다. 요즘도 채소를 갈기 위해 마당 모퉁이를 뒤엎다 보면 그날 검게 탄 쌀알이 나온다.”


화성지역에 독립만세운동이 확산되다

화성의 종교계 인사나 유지 등은 서울 만세운동에 참가하고 귀향한 후 주민들에게 소식을 널리 전하였다. 『매일신보』에도 각지에서 전개된 3·1운동에 관한 기사가 보도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수원 읍내에서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은 3월 중순 화성지역으로 파급되었다. 당시는 대중화 단계에 접어들면서 평화적인 만세운동이 폭력적인 양상으로 점차 전환하는 분위기였다. 거사일은 주민들이 많이 모이는 장날로 결정되었다.

3월 31일 정오경에 발안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만세운동은 팔탄면 가재리의 유학자 이정근, 장안면 수촌리의 천도교 지도자 백낙렬, 향남면 제암리의 안정옥(천도교), 고주리의 천도교 지도자 김흥렬 등이 제암리교회 김교철 전도사와 홍원식 교인 등과 함께 준비하였다. 이날 이정근이 장터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함으로 만세운동 신호탄을 알렸다. 장터에 모인 천여 명의 함성은 천지를 진동하였다. 당황한 일제 경찰의 위협 사격과 시위군중의 투석전으로 이어졌다. 시위대는 인근 일본인 소학교에도 불을 질렀다.

일본군 수비대는 주재소로 다가서는 군중들에게 칼을 휘두르기 시작하였다. 만세운동을 이끌던 이정근은 현장에서 칼에 맞아 사망하고 부상자도 속출하였다. 홍원식·안종후·안진순·안봉순·김정헌·강태성(제암리 기독교인), 김성렬(천도교인) 등이 수비대에 붙잡혀 고문을 받고 풀려났다. 흥분한 시위군중은 일본인 가옥이나 학교 등을 방화·파괴하였다. 정미업자 사사카(佐佐坂) 등은 3리 밖으로 피신하는 일이 벌어졌다. 사사카는 보복으로 4월 15일 제암리학살사건 당시 일본군의 길 안내를 맡았다. 4월 1일 발안 인근 마을 주민들은 발안장 주변 산에 봉화를 올렸다. 

4월 3일 수촌리 이장 백낙렬, 수촌 제암리교회 김교철 전도사, 석포리 이장 차병한, 주곡리 차희식 등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다시 일어났다. 우정면과 장안면 주민 2천여 명은 각각 면사무소를 부수고 화수리경찰관주재소로 몰려가 단숨에 불태웠다. 이를 저지하는 일본인 순사 가와바타(川端豊太郞)를 처단하는 등 극도로 긴장된 상황이었다. 이에 앞서 3월 28일 송산면 만세시위는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시위대를 향해 해산을 종용하던 순사부장 노구치 고조(野口廣三)는 총을 발포하였다. 잠시 정적이 흐른 후 시위군중은 일본순사를 죽이라고 외쳤다. 기세에 억압당한 노구치는 자전거를 타고 남양만 방향으로 도망치다가 돌에 맞아 쓰러졌다. 군중들은 몰려가 돌과 곤봉으로 때려 처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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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필드 박사와 제암리 학살 희생자 유가족          


학살만행이 기획되다 

일제는 4월 2일에 가장 격렬한 시위가 일어난 수원과 안성 지역에 대한 제1회 검거반을 구성하였다. 이어 4월 9일에 제2회 검거반도 편성하였다. 말이 검거반이지 실상은 격렬한 만세시위에 대한 악의적인 비방과 악랄한 방화·살륙이었다. 4월 14일까지 64개 마을에 대한 무자비한 검거로 약 800명이나 체포되었다. 검거과정에서 사상자 19명이 발생하고 17개소에서 278호가 불태워졌다. 발안 장터와 고주리 만세운동을 주도한 제암리 사람들에 대한 진압은 집단학살로 이어졌다. 4월 13일 육군 보병 제20사단 79연대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 중위가 지휘하는 수비대 11명이 발안에 도착하였다. 저들의 임무는 토벌 작전이 끝난 발안 지역의 치안 유지였다. 그때까지 발안 시위를 주도했던 제암리 주모자들은 체포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을 안 아리타는 제암리를 토벌할 계획을 세운다. 제암리는 두렁바위로 순흥 안씨가 모여 사는 집성촌으로 일찍부터 천도교의 교세로 민족정신이 고양되었고, 제암리교회를 통해 문맹 퇴치와 신문화운동이 이루어졌다. 

4월 15일 오후 2시경에 아리타는 부하를 인솔하고 일본인 순사 1명과 제암리에 살았던 순사보 조희창, 정미소 주인 사사카의 안내로 제암리로 향했다. 아리타는 “만세운동을 진압하며 너무 심한 매질을 한 것을 사과하려고 왔다”고 속이며 주민들 중 15세 이상 남자들을 제암리교회 안에 모이게 하였다. 주민들이 모이자 수비대는 교회 출입구와 창문을 봉쇄하고 일제히 사격한 후 불을 질렀다. 

불이 난 것을 보고 달려 온 강태성의 아내 김씨(19세)는 군인에게 살해당했다. 홍원식의 부인 김씨도 군인들의 총을 맞고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저들은 인근 고주리로 가서 시위의 주모자인 천도교 김흥렬 일가 6명도 학살하였다.우정면·장안면의 만세운동으로 수촌리교회와 마을의 피해 소식을 듣고 스코필드 박사(석호필)가 현장을 찾아가던 중 제암리 마을의 참상을 보고 국제사회에 알리게 되었다. 그가 출간한 『끌 수 없는 불꽃(Unquenchable Fire)』은 국제사회에 일제 만행을 알리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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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필드(석호필, 1889~1970)           


의병장으로 활동하다

홍원식(洪元植)은 1877년 10월 13일 경기도 화성유수부 공향면 제암동 넘말(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넘말)에서 아버지 홍순화(洪淳華)와 어머니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제암리에서 한학을 공부한 후 한성부 주둔 대한제국군 시위대 제11대대 군인으로 서소문 병영에서 근무하였다. 정미7조약으로 대한제국군이 해산되자, 정미의병에 참여하여 충남 당진·서산 일대에서 일본군과 맞섰다. 홍원식이 지휘하는 소난지도 의병은 면천성을 공격하여 전과를 올리는 등 활발히 투쟁하였다. 소난지도 의병은 1908년 3월 일본 경찰대의 공격을 받고 소난지도의 해안 끝까지 밀리면서 화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1백여 명이 전사하거나 행방불명되는 희생을 치렀다.

난지도는 활빈당의 일종인 수적(水賊)의 근거지 중 한 곳이었다. 1905년 이후 의병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수적이 의병으로 전환하면서 소난지도는 의병의 근거지로 탈바꿈하였다. 의병들은 소난지도를 중심으로 배를 이용하여 경기도 남양만 일대와 충남 당진 일대를 오가며 맹렬하게 활동하였다. 

1908년 들어 당진 일대에 의병 활동이 극렬하였다. 3월 9일에는 의병들이 당진 읍내에 들어와 박사원을 붙잡아 주민들 앞에서 밀정이라 하여 총살시킨 일이 있었다. 홍성경찰분서는 이 보고를 받고 3월 13일 일본인 순사 7명과 한인 순사 8명 등 15명으로 구성된 토벌대를 편성해 아가츠마 다카하치(上妻孝八)의 인솔하에 당진으로 파견하였다. 무려 9시간에 걸친 전투 끝에 탄약이 떨어진 의병대는 동쪽의 해안 끝까지 밀렸으며 그곳에서 36명의 희생자를 냈다. 섬의 북쪽에 있는 동굴 속에 있던 의병 5명도 살해되었다. 바다에 빠지는 등 행방불명된 의병도 50여 명에 달하였다.

소난지도에서 일본 토벌대의 의병에 대한 공격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잔인하였다. 심지어는 선원과 부상당한 의병까지 살육하는 학살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소난지도 의병의 피해 소식은 곧장 수원에 있는 의병부대에 전달되었다. 3월 19일 저녁 9시 수원지역 의병이 10척이나 되는 배를 타고 당진군 내맹면 고항포(현 석문면 장고항)에 들어와 밀고자를 색출하였다. 소난지도 의병 항쟁 소식은 『황성신문』에도 보도가 될 만큼 크나큰 사건이었다. 

1906년부터 1910년까지 당진이라는 지리적 이점을 최대한 이용하면서 홍원식은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초기에는 아산만을 사이에 두고 당진·서산 지역과 경기도 화성 등지에서 선박으로 이동하면서 수적과 함께 활동하였다. 수적을 의병에 영입함으로써 의병의 전투력은 향상되었다. 의병의 한계인 신분 간의 차이로 인한 문제를 극복하였음을 볼 수 있다. 또한 현지 출신만이 아닌 경기도 출신의 의병들까지 서로 연합하여 활동한 점 역시 주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1914년 3월 29일 고향으로 돌아온 홍원식은 기독교 권사가 되어 학교를 세웠다. 제암리교회의 안종후와 천도교인 김성렬(金聖烈) 등과 함께 구국동지회를 결성하였다. 그러다가 일본 헌병 2명이 그를 감찰하러 오자 총으로 쏴 죽이고 몇 년 동안 숨어지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새로운 독립운동을 계획 중이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지도자로서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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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암리 3·1운동 순국 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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