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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인들의 투옥과 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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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무수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지울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많은 영웅들이 있었다.그들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하면서까지 지키고 싶었던 신념과 가치,무엇으로 대체할 수 없는 그 기록들은 값진 유산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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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논설위원 장덕준              


동포의 학살 참극 취재하려다 순직한 장덕준

우리나라 최초의 순직 기자는 『동아일보』의 장덕준(張德俊, 1892~1920)이다. 총독부는 1920년 9월 25일 『동아일보』에 무기 정간 처분을 통보하였다. 9월 24일과 25일자 연속 사설 「제사(祭祀) 문제를 재론하노라」에서 일제가 신념의 중추로 삼는 이른바 3종의 ‘신기(神器)’인 거울, 구슬, 칼 등을 비하함으로써 결국 황실의 존엄을 모독했다는 이유였다. 이 논설만이 아니라 8월 30일부터 9월 25일까지 14회 연재한 「대영(大英)과 인도(印度)」라는 시리즈 기사도 문제였다. 이 연재 글이 20세기 인도에서 영국이 저지른 악정을 논하면서 암암리에 이를 조선과 대비하였다는 사실도 『동아일보』 정간 이유의 하나였다.

총독부는 정간 이유에 대해 이렇게 주장하였다. “『동아일보』는 창간 후 여러 차례 발매 금지 처분을 받았으며, 총독부가 주의를 환기했을 뿐 아니라 8월에는 발행인을 소환하여 최후의 경고를 한 바 있었다. 그런데도 로마의 흥망을 논하면서 조선의 부흥을 말하며 이집트의 독립, 아일랜드 독립 문제를 보도하면서 조선의 인심을 자극하고 영국의 반역자를 찬양하여 일본에 대한 반역심을 자극하는 등 하나하나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총독 정치를 부정하여 일반의 오해를 심절(深切)하게 함에 노력하였다.” 

『조선일보』는 이보다 먼저 정간 처분을 받아 발행이 중단된 상태였으므로 『동아일보』의 정간으로 두 신문이 동시에 나오지 못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이 무렵, 만주의 훈춘(琿春)에서는 일본군이 조선 동포를 무차별 학살한 사건이 일어났다. 청산리에서 독립군에 패한 보복으로 주민 5천여 명을 어른 아이 가리지 않고 학살한다는 소식을 들은 장덕준 기자는 분연히 현지로 달려갔다. 취재를 해도 『동아일보』가 정간 중이었으니 보도할 지면도 없었고, 자신은 폐병에 걸려 혈담까지 토하는 건강 상태였다. 그러나 열정적 성격이었던 그는 단신 죽음의 땅으로 뛰어들었다. 장덕준이 기차를 타고 서울을 떠난 때는 10월 중순이었다. 그는 두만강에 접한 함경북도 회령을 거쳐 간도로 건너갔다. 11월 6일 무사히 간도에 도착했다는 전보가 있은 후에 “빨간 핏덩이만 가지고 나의 동포를 해하는 자가 누구인지 쫓아보니 우리가 상상하던 바와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라며 살풍경이 일어나 공포의 기운이 가득한 간도 일대에는 죄가 있고 없고 간에 남녀노소가 살육의 난을 당하고 있는 광경 등 일본군의 만행을 취재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이른 아침, 장덕준은 일제 경찰 두세 명에게 불리어 나간 후로 소식이 끊어지고 말았다. 이리하여 그는 우리 언론 사상 첫 순직 기자가 되었다. 나이는 29세, 위험을 무릅쓰고 취재를 나섰다가 참변을 당했으니 기자정신의 표본이었다. 장덕준의 동생은 『동아일보』의 창간 주필인 장덕수였다. 장덕수도 해방 후에 암살당하였으니 두 형제가 비명에 목숨을 잃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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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사장 및 3·1운동 민족대표 48인 중 한 명인 송진우와 송진우의 일제 감시 대상 인물 카드        

 

민족대표 48인,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

송진우(宋鎭禹, 1890~1945)는 독립운동가, 언론인, 교육자, 정치가로 활동한 민족진영의 거목이었다. 3·1운동 민족대표 48인 중 한 사람으로 투옥되어 2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동아일보』 창간 당시에는 옥중에 있었으나, 1920년 11월 1일에 석방되어 이듬해 9월 『동아일보』가 주식회사로 발족되면서 사장에 취임했다. 31세의 혈기 넘치는 청년이었다. 이로부터 25년 동안 세 차례에 걸쳐 『동아일보』의 사장 또는 주필을 맡아 민족 언론을 이끄는 실질적인 견인차였으며 민중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총독부는 기사 삭제, 지면 압수, 정간 처분을 비롯하여 투옥 등 여러 수단을 동원하여 탄압을 자행하였으나, 신문사는 항일 민족진영의 본거지였고 송진우는 그 울타리가 되었다. 『동아일보』 주필을 맡고 있던 1926년 3월에는 소련 국제농민회 본부가 3·1운동 7주년을 맞아 조선 농민들에게 전해 달라고 보내온 전보문을 게재하였는데, 총독부는 이를 빌미로 정간을 통보하였다. 송진우는 재판에 회부하여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에 처하여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1936년의 일장기 말소사건도 송진우 사장 때의 일이었다. 1945년 해방 정국의 정계에 투신하여 한국민주당을 창당하고 수석총무로 활약하면서 이해 12월 1일 『동아일보』 복간 사장에 취임했으나, 한 달 후인 12월 31일 서울 원서동 자택에서 괴한의 흉탄에 쓰러졌다. 정부는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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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조선일보』 주필에 취임하여 사장까지 역임한 안재홍과 안재홍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1936)        


투옥의 연속 안재홍

안재홍(安在鴻, 1891~1965)은 일제 강점기의 언론인이자 역사학자이다. 항일운동을 전개하는 동안 필화와 여러 사건에 연루되어 아홉 차례나 투옥되어 모두 7년 3개월에 걸친 복역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일제하 최대 민족운동 단체였던 신간회 총무간사를 역임했으며, 광복 후에는 미군정 민정장관, 제2대 국회의원으로 민족의 발전과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언론 활동으로는 1924년 3월 31일 최남선이 『시대일보』를 창간했을 때 논설위원과 정치부장을 겸하다가 같은 해 11월 『조선일보』로 옮겨 주필 겸 이사를 맡았다. 1925년 4월에 열린 전조선기자대회에서 부의장에 선출되었고, 1926년 9월부터는 『조선일보』 주필로 발행인을 겸했다. 1928년 1월 21일에 이관구가 집필한 「보석(保釋)지연의 희생, 공산당사건의 실례(實例)를 견(見)하라」는 사설이 문제 되어 금고(禁錮) 4개월 형을 선고받았는데, 곧이어 5월 9일 일본군의 소위 산둥(山東) 출병을 비판한 사설 「제남(濟南)사변의 벽상관(壁上觀)」을 썼다가 『조선일보』는 정간 당하고 안재홍은 금고 8개월의 형을 받았다. 복역 후 1928년 9월 29일에 출옥하여 이듬해 1월에는 『조선일보』 부사장이 되었는데, 이해에 일어난 광주학생사건 진상보고 민중대회 건으로 구속되었다가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1931년 5월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했으나, 이듬해 3월에는 만주동포구호 의연금을 유용하였다는 혐의로 영업국장 이승복과 함께 구속되어 옥중에서 『조선일보』 사장직을 사임했다. 1932년 11월에 출옥하여 1935년 5월부터 『조선일보』 객원으로 「민세필담」을 연재하였다. 1936년 6월 중국 남경에 있던 군관학교에 청년 두 사람을 추천하였다는 혐의로 또다시 구속되어 이듬해 2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38년 5월에는 흥업구락부사건으로 서대문경찰서에 검거되어 3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1942년 12월에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함경도 홍원경찰서에 3개월 동안 수감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그 후로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거의 칩거 상태에 있다가 광복 후 미 군정기에는 민정장관에 임명되었다가 1946년 2월 26일에는 한성일보를 창간하였다. 1950년에는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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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일의지를 담은 작품을 쓰며 언론 활동을 이어간 심훈과 『동아일보』에 실린 심훈의 상록수 공모 당선 기사(1935. 8. 13.)          


애국 문인 언론인 심훈 

소설가이자 시인으로 더 잘 알려진 심훈(沈熏, 1901~1936) 또한 기억해야 할 언론인이다. 1919년 경성 제일고보(경기중학교) 재학 중 3·1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복역하였다. 이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가 1923년에 귀국하여, 1924년 10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동아일보』 기자를 비롯하여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기자로 있으면서 소설을 집필하였다. 1935년 농촌계몽소설 「상록수」가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현상소설에 당선되자 상금으로 상록학원을 설립하였다. 1936년 8월 10일 새벽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우승하였다는 소식에 감격하여 호외의 뒷면에다 ‘오오 조선의 남아여’라는 즉흥시를 쓴 것이 마지막 작품이다. 이 시는 8월 11일자 조선중앙일보 조간에 실렸다. 그는 이 즉흥시를 발표한지 얼마 뒤 장티푸스에 걸려 9월 16일에 사망하였다. 대전국립묘지 국가유공자 묘역에 안장된 손기정의 묘비에도 이 시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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