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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제·압수·정간의 

탄압받은 항일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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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진석(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했던 35년 기간에 한국인이 발행한 ‘민간신문’이 존속했던 시기는 불과 20년에 지나지 않는다. 1910년대 무단통치 10년과 태평양전쟁을 앞둔 1940년 8월에서 일제의 패망으로 광복의 날을 맞았던 1945년 8월까지, 전쟁 기간 5년 사이에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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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창간 기념호(1920. 3. 9)(좌) / 『동아일보』 창간호(1920.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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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잡지 월간  『개벽』  창간호(1920. 6. 25.)(좌) / 1920년 6월 1일부터 10일간 연재해 일제 통치를 비판한 『조선일보』의 기획기사(우)         


3개 민간지와 천도교의『개벽』

1920년에 창간된 『조선일보』·『동아일보』와 1924년에 창간되어 1936년 사이에 『시대일보』-『중외일보』-『중앙일보』로 이름이 바뀌면서 명맥을 이었던 또 하나의 신문을 합친 3개 민간지는 어두운 식민지 조선의 모습을 비추어주고 민족의 수난사를 기록으로 남겼다. 

이들 일간 신문과 함께 놓쳐서는 안 될 잡지도 있다. 열악한 환경에서 짧은 수명으로 나타났다 사라진 수많은 잡지 가운데 천도교 계열의 『개벽』은 대표적인 항일 민족 언론의 하나였다. 김소월은 「진달래꽃」을 비롯하여 30여 편의 시를 발표했고,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1926. 6.)도 『개벽』에 실렸다. 창간 이후 거의 매호 압수당하는 수난을 겪던 중에 1925년 8월 호가 발행 정지(정간)를 당했다. 해외에 망명하여 독립투쟁을 벌이는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특집으로 편집한 내용이 검열에 걸린 것이다. 「이역풍상에 국궁 진체하는 국사! 지사!」라는 제목으로, 독립운동가 12명을 ‘국사(國士)’ 또는 ‘지사’와 같은 극존칭으로 다룬 것이다. 마침내 1926년 8월 일제는 수난의 상처투성이였던 이 잡지에 발행 금지(폐간) 명령을 내렸다. ‘안녕질서를 방해한다’는 이유를 들었지만, 총독부의 누적된 불만과 6·10만세운동 직후 『개벽』의 영향력을 차단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렇다면 항일언론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과연 항일언론이 있기는 했을까’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먼저 던져야 할 정도로 근년에는 언론의 친일적 측면을 강조하는 언론관이 널리 퍼지고 있다. 1930년대 중반 이후 군국주의 환경에서 발행된 지면에서는 친일적인 부분을 확대·강조하면서 항일에 관해서는 외면하는 경향이 일반화되고 있다. 

하지만 엄혹한 총독부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어떻게 이런 신문을 제작했을지’ 새삼 놀라게 되는 지면도 많았다. 하루하루 지면에 담긴 기사와 논설, 글과 사진, 그림에 이르기까지, 총독부의 입장에서는 항일의 증거이자 일본의 조선 통치를 부인하는 자료들이다. 오히려 항일언론의 실상은 총독부가 기록으로 남긴 방대한 자료와 재판기록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다. 


항일 언론에 가한 일제의 탄압들

총독부가 발행한 비밀기록 ‘조선의 출판물 개요’는 1925년부터 해마다 연감 형태로 편찬한 언론의 현황과 탄압을 담은 객관적, 체계적, 종합적인 자료이다. 총독부의 『조선출판경찰월보』에는 신문·잡지·단행본 등 출판물의 현황과 통제 내용이 월별로 기록되어 있다. 항일언론의 실상은 역설적이게도 식민통치의 총본산인 총독부가 빈틈없이 남겨두었던 셈이다. 

『조선일보』는 1920년 3월 5일에 창간되었는데, 3개월이 지나지 않았던 6월 1일부터 10회에 걸쳐 ‘조선 민중의 민족적 불평, 골수에 심각(深刻, 깊이 아로새겨진)된 대 혈한(血恨, 피어린 원한)의 진수(眞髓)’라는 시리즈를 연재하였다. 사회면 머리에 과감하고 자극적인 제목을 쓰고, 강조할 부분은 본문 활자를 키워서 시각적인 효과를 극대화했던 파격적인 편집이었다. 

일본은 “조선 민족 전체를 총과 칼끝으로 주무르려 하였다. 조선 민중은 눈물을 흘리며 벌벌 떨기를 오래 하였다. 우는 어린아이를 달래일 때에 ‘아이고 왜놈 온다’ 하는 것이 오직 한 가지 묘책이었다. (중략) 총과 칼로써 인도와 정의로 삼는 일본의 군국주의는 말할 수 없이 조선민족을 학대하고 조선민족을 멸망케 하려 하였다. 전염병이라도 나서 한꺼번에 다 죽어버리고 일본 사람이 와서 조선을 다 차지할 양으로 조선 사람을 만주에 내여 보낸다.” 

이처럼 직설적으로 총독부와 군국 일본의 강압적인 식민지 정책을 송곳으로 찌르듯이 통렬히 비판하니 총독부가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을 것은 당연했다. 총독부는 마침내 8월 27일자 논설 ‘자연의 화(化)’를 문제 삼아 1주일간의 유기 정간을 명하였다. 걸음마 떼기 시작한 창간 5개월 22일의 어린 신문에 닥친 시련이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굴하지 않았다. 정간이 해제되어 다시 발행한 지 3일 후인 9월 5일자 논설 ‘우열(愚劣)한 총독부 당국자는 하고(何故, 무슨 이유로)로 우리 일보(日報)를 정간시켰나뇨 / 천하의 동정이 오사(吾社, 우리 신문)에 폭주함’이라는 논설로 총독부의 총과 칼에 한 자루 붓으로 정면에서 맞서 싸웠다. 용기와 기개가 돋보이는 논설이었다. 그러나 총독부는 『조선일보』에 ‘무기 정간’이라는 더욱 강한 철퇴를 내리쳤다.

『동아일보』도 같은 때에(1920. 9. 25.) 무기정간 처분을 받았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동시에 발행되지 않는 암흑의 기간에 『동아일보』 논설기자 ‘장덕준’은 만주의 무장독립 투쟁을 취재하러 갔다가 일본군에 끌려가서 살해되는 사건이 있었다. 한국 언론 역사상 최초의 순직 기자였다. 총독부의 언론통제는 날이 갈수록 체계적이고 빈틈없는 그물망처럼 촘촘해졌고 처벌의 수위는 가혹했다. 기사를 검열하여 삭제하고, 인쇄된 지면을 압수하는 사례가 빈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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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에 실린 브나로드운동 참가자 모집 기사(1931. 7. 24.)          


문맹 퇴치를 위한 농촌계몽

운동 상황이 악화되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총독부를 정면에서 비판·공격하는 방식의 초기 항일 논조를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른 ‘문맹 퇴치 농촌계몽운동’은 일제의 탄압을 피하면서 민족의 역량을 키우자는 전략이었다. 불타는 항일 의지만으로는 식민지 상태를 극복할 수 없으니, 우리가 먼저 깨우치고 문맹을 타파하자는 취지였다. 그래서 ‘글 장님 없애기 운동’이 시작되었고,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라는 구호를 내걸게 되었다. 문맹 퇴치와 농촌계몽운동은 한말의 ‘애국계몽운동’과도 맥이 이어진다. 당시 신문은 나라 잃은 민족에게 교육자이자 정부와 같은 존재였다.

『동아일보』는 1928년에 시작할 계획으로 지면에 공포했으나 총독부의 탄압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1931년에 ‘브나로드운동(민중 속으로)’이라는 이름으로, 문자 보급과 농촌계몽을 동시에 진행하며 전국 규모의 운동으로 확대·실시하였다. 『조선일보』도 같은 때에 시작하였다. 두 신문이 전국적인 규모로 1934년까지 계속하였으나 총독부의 금지로 더 이상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이후 문자보급 운동은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7곳)과 만주(27곳)에 거주하는 동포들을 대상으로도 전개되었다.

만주사변(1931)에 이은 중일전쟁(1937)으로 군국주의 서슬이 푸르던 시기의 언론은 점차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군부의 파쇼 통치 아래 일본 내에서조차 언론이 국가적인 통제 하에 놓인 상태여서 식민지 조선에서 항일 논조를 유지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런 가운데도 1936년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는 민족 언론의 저항정신 살아있음을 과시한 사건이었다. 당시 『동아일보』의 이길용 기자는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시상식 장면 중 가슴에 그려진 일장기를 지운 뒤 사진을 실었다, 이로 인해 여러 직원이 총독부의 강요로 퇴사했고, 『동아일보』와 자매지 『신동아』와 『신가정』까지 무기정간의 엄중한 시련을 겪게 되었다. 이듬해 6월 1일에야 『동아일보』는 겨우 정간이 해제되었으나, 두 잡지는 일제 기간에 끝내 속간되지 못했다. 

수많은 기사 삭제와 압수, 네 차례에 걸친 정간 등 언론인 투옥이라는 수난 속에서 숨이 끊어졌다가 살아나기를 거듭하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일제 패망 5년 전인 1940년 8월 10일에 폐간의 비운을 맞았다. 20년 동안 발행된 지면은 『조선일보』 69,923호, 『동아일보』 6,819호였다. 그나마 중간에 두 신문 각각 네 차례 정간 기간에는 발행이 중단되었으니 그 기간에도 발행이 계속되었다면 신문의 나이를 뜻하는 지령(紙齡)은 더 많이 쌓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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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동아일보』에 실린 일장기가 삭제된 손기정 선수의 사진(좌) / 베를린올림픽 당시 일장기를 달고 시상식에 선 손기정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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