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4·19혁명일에 

독립운동가를 생각하다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글 이계형(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대한민국헌법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 이념을 계승하고…”라고 시작한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는 것을 헌법에 명시한 것이다. 이에 60여 년 전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첫 신호탄을 쏘아 올린 4월, 독립운동의 숭고한 정신으로 민주화운동을 이어나갔던 인물들을 통해 헌법의 가치를 되새기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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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숙(좌) / 조아라(우)


해방 후 독립운동가들은 다양한 형태의 삶을 살았다. 대부분은 평범한 삶을 이어갔는데, 몇몇은 종교인·교육가·여성운동가 등으로 활동하였고, 어떤 이들은 이승만과 박정희 독재정권에 협력하였지만 이에 항거한 이들도 있었다. 1945년 8월 해방을 맞이한 지 불과 15년 만에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일제의 가혹한 식민통치에 맞서 불태웠던 민족정신이 한국의 민주주의 정신으로 되살아난 것이다. 그 중심에 독립운동가 김창숙·최천택·김성숙·함석헌·양일동·조아라·장준하·계훈제 등이 있었다. 이들의 민주화운동 활약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그분들을 조명하고자 한다. 

김창숙(1879~1962)은 3·1운동 당시 유림이 작성한 독립청원서 파리장서(巴里長書)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였고, 그 뒤 중국으로 망명하여 서로군정서 군사선전위원장을 거쳐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그는 중국 상하이 공공조계지 내 영국인 병원에서 일본 영사관원에게 붙잡혀 본국으로 압송되었고 14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대전형무소에서 복역 중에 옥중 투쟁과 일본 경찰의 고문에 두 다리가 마비되어 하반신 불구가 된 채로 형 집행정지로 출옥하였다. 이에 ‘김우(金愚) 벽옹(?翁)’이란 별명을 얻었다. ‘어리석은 앉은뱅이 늙은이’란 뜻이다. 그렇지만 그는 창씨개명에 반대하는 등 항일의 자세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해방 후 그는 성균관대학을 설립하였고, 김구와 함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였다. 이승만 정권 때는 독재와 부패를 막기 위한 투쟁을 벌이다가 부산형무소에 40일간 갇혀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최천택(1896~1961)은 부산 출신으로 1920년대에 의열단을 지원하고 부산지역 청년회 활동을 주도하였다. 신간회 부산 지회장으로서 활동하면서 수십 차례 구금되어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에는 경남지역 반탁운동을 이끄는가 하면, 4·19혁명 이후에는 진보적인 혁신동지총연맹 최고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1961년 5월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정권하에서 부산 육군형무소에서 수개월간 구금되기도 하였다. 이후 후유증으로 그는 1961년 11월에 생을 마감하였다. 

김성숙(1898~1969)은 대처승으로 3·1운동에 참여한 뒤 중국 베이징으로 유학가 의열단에 가담하는 등 중국 각지를 돌며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해방 후에 환국 한 그는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였고 이승만 정권에 항거하다가 갖은 탄압을 받았다. 그는 이승만을 독부(獨夫)라 불렀는데, 이는 독재자보다 더 포악하고 구제받을 수 없는 가련한 인물이란 뜻이다. 6·25전쟁 중에 김성숙의 세 아들이 중국에서 그를 찾아왔지만, 이승만은 부자 상봉을 허락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들들을 중국으로 추방해버렸다. 그는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자 ‘참다운 민주혁명’을 내걸고 사회대중당을 창당하여 활동하였지만, 1961년 5·16군사정변 후 이른바 ‘통일사회당사건’으로 10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함석헌(1901~1989)은 3·1운동 당시 전단을 배포하고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27년 『성서조선(聖書朝鮮)』을 발간하거나 「성서로 본 조선역사」 등을 기고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고, 1942년 3월 「조와(弔蝸:개구리의 죽음을 슬퍼함)」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1년 가까이 옥고를 치렀다. 해방 이후 그는 1945년 11월 ‘신의주학생의거’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소련군에 고문을 당하였다. 1947년 단신으로 월남하여 종교활동에 전념하면서 『사상계』 주필로서 사회비평 글을 발표하거나 이승만 독재정권을 통렬히 비판하여 투옥되었다. 5·16군사정변 직후부터는 박정희 정권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한일협정 반대와 3선 개헌 반대 투쟁 등을 주도하였고, 명동사건(1976), YWCA 위장결혼식 사건(1979)에 연루되어 재판에 회부되는 등 탄압을 받았다. 1980년 7월에는 전두환에 의해 그가 창간한 『씨알의 소리』가 강제 폐간되기도 하였다.

양일동(1912~1980)은 1930년 광주학생운동이 서울로 확산하자 중동학교 학생으로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퇴학을 당한 후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무정부주의자가 되었다. 이후 일본으로 옮겨가 반파쇼·반제·반실업(反失業) 등의 활동을 펼치며 <뉴으스> 발행인으로 항일의식을 고취하다가 2년 8개월 동안 투옥되기도 하였다. 해방 후 그는 야당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이승만 정권에 항거하였으며, 박정희 정권 시기인 1967년에는 「정치정화법」·「반공법」 등의 위반으로 투옥되었고,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 때에는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조아라(1912~2003)는 광주 출신으로 1931년 이일학교 교사로 있던 중,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한 백인청년단사건에 연루되어 1년간 감옥에 갇혔다. 1936년에는 수피아여학교가 신사참배·창씨개명을 거부해 폐교될 때 동창회장이라는 이유로 다시금 1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그는 해방 후에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광주부인회를 출범시키고 오랫동안 광주 YWCA를 이끌었다. 박정희 정권하에서는 3선 개헌 반대투쟁을 벌였으며,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때는 수습대책위원으로 활동하다 계엄군에 끌려가 생애 세 번째로 옥고를 치렀다. 그는 ‘민주화운동의 대모’, ‘광주의 어머니’로 불린다. 

장준하(1918~1975)는 1944년 학병으로 일본군에 징집되어 중국 쑤저우(徐州)에 배속되었으나 탈출해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았고 한국광복군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1945년 8월 국내진공작전인 ‘독수리작전’에 투입되었으나 갑작스러운 일본의 항복에 중단되고 말았다. 해방 후 그는 환국하여 『사상계』를 창간하여 이승만 정권에 저항하는가 하면, 박정희 정권 당시에는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전개하여 10여 차례 투옥되기도 하였다.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군에 있는 약사봉에서 등산하다가 의문의 사고로 사망하였다.

계훈제(1921~1999)는 경성제국대학 재학 중 학병징집을 거부한 후 강제징용을 당하여 노역하던 중 비밀리에 ‘민족해방협동당’에 입당하여 독립운동을 펼쳤다. 이후로 그는 평생 자유와 평등을 실천하며 살았다. 해방 후 그는 반탁운동과 남북협상을 지지하는가 하면, 4·19혁명 후에는 교원노조운동에 참여하였고, 5·16군사정변 후 군사독재와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투쟁과 자유언론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제5공화국 시절 내내 민주화 투쟁을 이끌었다. 이분들의 삶은 오롯이 독립운동에서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다. 이제는 통일운동이 그 뒤를 이어야 한다. 얼마 전에 생을 마감한 백기완 선생을 기리며 묵묵히 활동하는 통일운동가들을 응원한다. 이는 역사적 사명이다. 역사는 정의를 실천하는 이들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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