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산책

나라의 흥망을 

결정하는 세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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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안계환 역사작가



교회의 십일조(十一條) 문화는 구약시대 유대인의 관습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재산이나 수입의 10분의 1을 바쳤는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전리품의 10분의 1을 바친 것에서 유래하였다. 그의 손자 야곱은 야훼가 주신 모든 것의 10분의 1을 바치겠다고 천명하였고, 이는 성전 봉사를 담당하는 레위인에게 지불된 뒤 제사·제물·성전 보수·빈민 구제·제사장의 생계비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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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도시에서 발굴된 우르크시의 행정문서 점토판                   

  

서양 세금의 원조 10% 룰

기독교 교회가 사실상 국가 기능을 담당한 중세시대가 되면서 십일조는 10%의 교회세로 이어졌다. 근세에 이르러 교회세는 폐지되었지만 종교 활동을 위한 기부금으로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유대인의 문화가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된 것처럼 10%의 세금 문화도 그곳에서 출발한 것이다. 농업혁명으로 잉여생산물이 생기자 왕·귀족·사제·군인 등 직접 생산에 종사하지 않는 이들의 비용으로 사용되었다. 

인류의 가장 오래된 직업은 회계사 또는 세금수납원이라 할 수 있을 듯하다. 수메르 고대도시에서 발굴된 점토판에 의하면 우르크시의 행정문서에 ‘쿠심’이라는 이름이 있는데 그가 세금을 거두었을 것이라 추측되니 말이다. 이집트 신전 벽화에는 세금 징수원을 묘사한 그림이 있고, 나폴레옹 원정군이 발견한 로제타스톤에는 신전에 납부할 기부금과 세금 감면 등에 관한 내용이 등장한다. 

로마 공화정에는 직접세가 없었는데 공공에서 필요한 비용이 적었기 때문이다. 집정관 등 행정관은 무보수로 종사했고, 가도나 수로 등 주요 시설들은 리더들이 개인 돈으로 건설하였다. 시민은 소득세를 내지 않는 대신 ‘피의 세금’이라는 병역의무를 졌다. 최소한의 공공경비는 5% 정도로 낮게 매긴 상속세·수출입관세·노예세로 충당하였다. 노예는 2~5%의 매매세가 부과되었으며 노예 해방의 경우에는 5%의 세금을 내야만 했다. 단, 동방에서 수입되는 향신료·보석·진주·비단 등 사치품에 25%의 높은 세율을 매겼다. 속주가 증가하면서 소득에 부과되는 속주세 10%가 탄생했는데 속주민이 보조병으로 군에 입대하면 시민과 같이 면제되었다. 

7세기 중엽에 탄생한 이슬람제국에서는 병역의무가 있는 무슬림에게는 10%의 세율로 ‘자카’라는 이름의 재산세가 있었다. 그 외에 금·은·상품화 가능한 동산·재정기구·주식·채권에는 1년간 보유한 가치의 2.5%를 세금으로 냈다. 동서양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한 몽골인도 점령지에서 조공으로 10%만 받았다. 세금을 더 걷어야 할 때에는 세율 인상 대신 토지·농작물·관세 등을 추가해 물렸다. 이처럼 고대와 중세 유목제국에서 10%라는 비교적 낮은 세율을 적용했는데, 이것이 가능했던 건 정부의 규모가 크지 않았고 과중한 세금이 민심이반을 초래한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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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좌) / 카를 5세의 후계자 펠리페 2세(우)


나라를 망하게 하는 세금

유럽 국왕들의 가장 큰 문제는 교회가 10%의 소득세를 먼저 거두어간다는 사실이었다. 무슬림을 몰아내고 통일제국을 건설한 신앙심 깊은 에스파냐의 군주들은 소비세를 생각해냈다. 오늘날에도 유럽 상당수의 국가가 20%를 넘을 정도로 소비세율이 높기로 유명하다. 

문제는 이 ‘세금’과 ‘종교’가 에스파냐 몰락의 원인이었다는 사실이다. 로마 황제 카를 5세와 그의 후계자 펠리페 2세는 유럽을 통일하고 제국을 건설하려는 욕심에 영국과 네덜란드 등 개신교 제국과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 그러려면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는데, 이 나라의 소비 성향도 지나치게 높았다는 것도 문제였다. 자국에서 쓰는 생활필수품과 식민지에 보낼 물품의 거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였다. 그래서 아메리카에서 들여온 은은 에스파냐에 머물지 않고 네덜란드 무기상인과 이탈리아나 영국의 은행가들에게 넘어갔다. 이 때문에 펠리페 2세는 1557년과 1575년 두 번의 파산선고를 해야 했다. 

그 해결책으로 국왕은 소비세의 세율을 대폭 올렸다. 초기에는 부동산과 일부 상품 거래에만 부과되었고 세율도 5% 정도로 높지 않았다. 징수지역도 국왕이 직접 통치하는 카스티야뿐이었다. 점차 소비세율은 두 배로 올랐고 제국 내로 확대되었다. 덕분에 세수는 증가했지만 지역의 반발을 불러왔다. 대표적인 곳이 네덜란드였다. 당시 네덜란드는 에스파냐의 영토였지만 프로테스탄트 인구가 늘면서 독립 분위기가 무르익던 중이었다. 소비세 세율 인상으로 시작된 네덜란드의 반발은 무장봉기로 이어졌고, 1568년부터 시작해 약 80년간 이어진 독립전쟁 결과 네덜란드가 떨어져 나갔다. 1588년 에스파냐 함대가 영국에 패했고 30년 전쟁에서도 졌다. 1640년에는 포르투갈이 무장봉기를 일으켰으며, 28년 후 에스파냐제국에서 독립하였다.


복지국가에는 높은 세율이 필수

이렇게 낮은 세율로 유지되던 서유럽 국가들은 어떻게 복지사회를 이룰 수 있었을까? 자본주의 발달과 그에 따른 빈부격차의 문제가 극심하게 부각된 까닭이다. 그 과정에 국가가 개입했고 높은 수입에는 높은 소득세율이 따라왔다. 교회세가 폐지되어 이것이 자연스럽게 국세로 이어진 영향도 컸다. 결국 국가가 많이 거두어 국민들이 골고루 혜택을 누릴 수 있는 방향으로 정비되었다. 물론 그 과정이 순탄할 리는 없었다. 많은 투쟁이 있었고 가진 자들의 저항도 극심하였다. 하지만 다수가 행복하게 사는 사회로 가려면 더 많은 소득을 얻고, 더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이 높은 세금을 부담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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