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의 발자취

별처럼 빛난 

여성독립운동가를 

찾아서

독립의 발자취

글·정리 편집실



코로나 바이러스로 힘든 이 시기에 그 옛날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들을 떠올려봅니다. 힘들고 고된 독립의 여정을 견디고 견뎌 광복의 결실을 맺을 수 있었던 이유를 찾는다면 언제나 버팀목이 되어준 어머니들 덕분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어려운 시기에 큰 힘이 되어준 대한의 어머니들을 떠올리며 현재를 견뎌내고 있는 대한의 어머니들을 응원합니다.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진 선열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오늘도 분투를 잊지 않은 이가 있다. 단순 조력자가 아닌 독립투사였던 여성독립운동가를 발굴하고 그들의 삶을 복원하는 것을 일생의 목표로 삼고 있는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의 심옥주 소장을 만나본다.


여성독립운동가를 발굴하고자 결심한 동기가 있나요?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그랬듯이 저 또한 이 일이 우연 아닌 필연처럼 다가왔습니다. 유년시절부터 조부모님께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등 한국의 근현대사 이야기를 들으며 시대여성에 대한 관심이 커졌습니다. 저 또한 두 아이의 어머니로서, 대한의 어머니들이 어떤 삶을 살았고 그 영향이 어디로 이어졌는가에 대해 설명할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여성독립운동가 발굴 작업은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나요?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에서는 주로 현지를 답사해서 지역의 특성을 조사하고 독립운동가의 활동을 추적함으로써 독립운동사에서 여성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습니다. 민간 기관이 정부의 지원 없이 관련 연구와 활동을 이어가는 데는 힘든 점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알려지지 않은 여성독립운동가를 발굴하고 알리는 일이 저의 사명이라 생각하고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의 성과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성과라고 하기엔 부끄럽습니다. 저희는 2009년 3월 1일부터 여성독립운동가 학술세미나 15회를 비롯해 여성독립운동학교 청소년 및 대학생들과 프로젝트 13건, 펀딩 프로젝트 3건, 여성독립운동가 강연 120회, 서적 발간 13권 등의 작업을 이어왔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여성독립운동가의 일생과 활동 특성을 정리한 『여성독립운동가 사전』을 발간한 것입니다. 


여성독립운동가들이 제대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마도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무관심 때문일 것입니다. 독립운동가들은 성별 구분 없이 국가와 후손을 위해 희생한 분들입니다. 이제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경계를 뛰어넘어 독립운동에 헌신한 한국의 어머니들도 기억하고 주목했으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민간 차원에서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정부도 많은 관심을 가져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아직 알려지지 않은 여성독립운동가가 얼마나 있을까요?

지난 2019년 국내 여성독립운동가 유물에 대해 전수조사를 수행한 결과, 1차 조사에서 1,600여 점의 유물이 확인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여성독립운동가가 많이 있습니다. 2020년 국가보훈처 기준으로 독립유공자 중 약 3%만이 여성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장기적으로 발굴 및 조사가 꾸준히 이어질 경우 10%까지 충분히 상향될 수 있다고 내다보고 있습니다. 


정부 및 공공기관의 협조 또는 국민들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늘 재정적 한계에 부딪치면서도 손을 놓지 못했던 이유는 이 일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지난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때에는 많은 분들에게 알릴 수 있는 기회를 갖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00주년 행사 이후 관심은 급격히 줄어들었습니다. 관련 활동이 지속적으로 이어져 나갈 수 있도록 정부나 공공기관의 협조가 있기를 바라며, 국민들의 꾸준한 응원이 함께하길 기원합니다.


3·1운동에 참여한 여성독립운동가 6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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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김영순, 김귀남, 이효덕

서울 3·1운동에서 만세를 부른 교사

김영순(1892-1986)

대한민국애국부인회와 근우회에서 주요 간부로 활동하였다. 1919년 정신여학교의 교사로 재직하던 중 오현주의 제안으로대한민국애국부인회에 가입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는 데 힘썼다. 1927년에는 근우회 창립위원회에서 활동하는 등 여성의 독립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힘썼다.


목포 3·1운동에서 태극기를 운반한 학생

김귀남(1904-1990)

1919년 4월 8일 목포 3·1운동에서 활약하였다. 당시 목포 정명여학교 재학 시절로, 물동이에 태극기를 담아 운반하면서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만세운동 이후 잡혀가서 고문을 당하면서도 “한국 사람은 나라를 사랑할 줄 알아요”라며 함께한 교사들을 보호했다고 전해진다. 


평남 용강 3·1운동에 참여한 교사

이효덕(1895-1978)

평양에서 출생해 숭의여학교 교사로 송죽결사대에 참여하였다. 양무학교 교사로 활동하던 중 3·1운동에 참여한 뒤 체포되어 6개월 형을 받았다. 1921년에는 3·1운동 2주년 기념 시위를 주도하였고, 대한기독교여자절제회연합회 등에서 활동하며 사회 계몽운동 및 여성교육 둥 독립운동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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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나은주, 김응수, 김신희

황해에서 만세를 외친 소녀

나은주(1890-1978)

개성 호수돈여학교에서 비밀결사로 활동하였다.개성 3·1운동과 황해도 3·1운동에 참여하였고, 황해도 송정리의 만세 행진을 주도하였다. 4월 3일 300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전날 체포된 30여 명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주도한 탓에 체포되어 1년 징역형을 받고 평양 모란봉 여감옥에 수감되었다.


부산 3·1운동에 뛰어든 학생

김응수(1901-1979)

1919년 3월 11일 부산의 만세운동은 일신여학교 학생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들은 부산상업학교 고등과 학생들과 비밀리에 연락한 뒤 모였다. 벽장 속에 숨어 태극기 50개를 만들었고, 오후 9시가 되자 준비한 태극기를 들고 좌천동 거리를 누비며 만세를 외쳤다. 현장에서 체포된 이들은 보안법 위반으로 6개월간 투옥되었다. 


전주 3·1운동에서 단식투쟁을 벌인 학생

김신희(1899-1993)

전라북도 전주에서 학생 신분으로 3·1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3일과 14일, 만세운동을 주도한 전주 기전학교 학생과 졸업생들은 지하실에서 태극기를 준비하고 선언서를 등사하여 시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들은 만세운동의 주도자로 체포되어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에서 발간한 『여성독립운동가 사전』에는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일생이 담겨 있다. 

그들의 출생과 성장 과정, 독립운동을 하게 된 계기와 생의 마지막까지. 그동안 기록의 부재로 묻혀있던 많은 여성독립운동가를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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