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산책

미국의 산업의학을 

선도한 여성

앨리스 해밀턴

세계 산책

글 송성수(부산대학교 교양교육원 교수)



앨리스 해밀턴(Alice Hamilton)은 미국 산업의학의 개척자이자 하버드 대학에서 교편을 잡은 최초의 여성이다. 당시 의과대학에 입학한 여성들의 경우 산부인과에 편중되어 공부를 이어가던 반면 그는 다양한 의학 분야의 연구를 이어나갔다. 남성과 여성의 경계를 허물고 본인의 소신을 이어간 앨리스 해밀턴의 삶을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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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해밀턴(왼쪽) /  미국 빈민운동의 산실로 불리는 헐 하우스(오른쪽)


의사의 길을 선택한 이유

앨리스 해밀턴은 1869년 미국 뉴욕의 중산층 집안에서 둘째 딸로 태어났다. 앨리스에게는 언니 한 명과 여동생 두 명이 있었는데, 네 자매의 나이 차이가 6살밖에 되지 않았다. 덕분에 해밀턴 자매는 어렸을 때부터 아주 친하게 지낼 수 있었다. 앨리스의 어머니는 매우 당찬 여성이었다.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단다. 한 부류는 ‘누군가 나서서 어떻게든 그 일을 해야 해. 그런데 왜 내가 나서야만 하지?’ 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또 다른 부류는 ‘누군가 나서서 어떻게든 그 일을 해야 해. 그런데 내가 하면 왜 안 되는 거지?’ 하고 말하는 사람이란다.”

앨리스 해밀턴은 학창 시절에 큰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자신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였다. 당시 여성들에게 열려 있는 직업은 교사·간호사·의사 정도였는데, 해밀턴은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의학을 선택하였다. 의사가 되면 어디에 가든 분명히 쓸모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으리라 확신하였다. 선생님처럼 학교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고, 간호사처럼 상급자의 지시를 받지 않아도 되며, 온갖 부류의 사람들과 여러 가지 삶의 조건을 경험해 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해밀턴은 1891년 포트웨인 의과대학에 입학하였고, 이듬해에는 미시건 의과대학으로 옮겼다. 1893년에는 보스턴 뉴잉글랜드 병원으로 갔는데, 산부인과만 고집하는 여성 의사들을 만나 배움의 열의가 식고 말았다. 그는 1895년에 다시 미시건 의과대학으로 돌아와 1년간 세균학을 공부한 뒤 이듬해에 독일 유학의 길을 선택하였다. 

1897년에 미국으로 돌아온 해밀턴은 시카고에 있는 노스웨스턴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이어 같은 해에 사회개혁가인 제인 애덤스(Jane Adams, 1931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가 시카고의 빈민지역에 설립한 헐 하우스(Hull House)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해밀턴은 헐 하우스에서 22년 동안이나 무료로 봉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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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밀턴 자매들의 어린 시절(왼쪽에서 두번째 앨리스)


미국 산업의학의 선구적 연구자

1908년, 해밀턴은 자신의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분야를 찾았다. 그것은 ‘산업의학’이었다. 산업의학은 유럽에서 19세기부터 발전해왔지만, 미국에서는 매우 생소한 분야였다. 당시 미국의 사업주와 노동자들은 산업재해나 직업병의 위험성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산업의학 전문가가 거의 없는 미국에서 새로운 영역을 선구적으로 탐험하는 일에 흥미와 보람을 느꼈다. 

해밀턴은 성냥 공장들의 청결하지 못한 작업 환경을 고발하여 주목을 받았다. 1910년에는 일리노이 주지사가 해밀턴을 직업병 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녀는 납중독 연구를 특별 과제로 선택하여, 젊은 의사와 의과대학생 그리고 사회봉사자의 도움을 받아 활발히 활동하였다. 그녀는 수많은 공장들을 방문하였고, 노동자 및 그들의 가족들과 직접 대화를 나누었으며, 약국과 병원의 환자 기록을 검토하였다.  

당시에 산업의학은 과격한 사회주의나 나약한 감상주의에 빠진 사람들이나 하는 분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해밀턴은 여성의 감수성을 적극 활용하여 산업의학에 대한 이미지를 좋은 방향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것은 남성들의 활동에 반감을 가지면서 여성 특유의 분야만을 고집하는 ‘전투적 페미니즘’과 달랐고, 여성이 남성과 다를 바 없으므로 기존의 분야에서 남성과 동일한 성취를 이루어야 한다는 ‘이상주의적 페미니즘’과도 달랐다. 1919년에 해밀턴은 하버드 대학교 최초의 여성 교수가 되었다. 그녀는 <산업 위생학 저널>의 편집장을 지냈고, 『미국의 산업 독극물』과 『산업 독성학』을 발간하였다. 해밀턴은 애덤스가 사망한 1935년에 교편을 놓고 헐 하우스의 운영을 책임졌다. 하버드 대학교는 보건학 교실에 앨리스 해밀턴 기금을 설립하였고, 미국의 공중위생국은 해밀턴에게 라스카 상을 수여하였다. 의학 연구와 사회 개혁이 조화된 삶을 실천한 해밀턴은 101세까지 장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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