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인연

파주지역 만세운동에 불을 지핀 

임명애와 염규호 부부

아름다운 인연

글 김형목(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독립운동은 파주지역에도 번졌다. 1919년 3월 10일 파주 교하리 공립보통학교 운동장에서 100여 명의 학생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촉발한 가운데 선두로 나선 사람은 구세군신도인 임명애 부교였다. 남편인 염규호 정교는 만세운동의 확산을 결심하며 ‘3월 28일 모두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는 내용의 격문을 배부하였다. 


여성독립운동가들이 역사무대에 나오다 

서울·평양·정주·원산 등지에서 울려진 3·1만세운동 소식은 철도 연선을 따라 전국 각지로 삽시간에 파급되었다. 서울의 만세 현장에 참여한 학생들이나 광무황제 인산일에 참석하기 위해 상경한 인사들은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각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들은 만세운동을 지역사회에 알려는 전령사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파주는 서울과 개성의 중간에 위치하여 이러한 소식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3·1운동을 이야기할 때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3·1운동의 아이콘 유관순이다. 하지만 사회적인 민주화 진전과 더불어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발굴이 진전되면서 이와 같은 인식은 점차 변화되고 있다. 역사무대에서 사라지고 우리의 기억에서 오랫동안 잊힌 여성들에 대한 올바른 자리매김은 분명 환영할 일이다. 암울한 현실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던 의연한 활약상은 신선한 자극제로 우리에게 성큼성큼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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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명애 수형 사진_서대문형무소역사관 제공(왼쪽) / 염규호 수형 사진_구세군역사박물관 제공(오른쪽)


임명애·염규호 부부로서 인연을 맺다 

이들 부부에 관한 기록은 매우 소략하여 인생역정을 밝히는 데 많은 한계가 있다. 지금까지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임명애(林明愛)는 1886년 3월 25일 파주군 와석면 교하리 578번지에서 출생하였다. 남편은 1880년 3월 23일 같은 주소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판결문에 근거한 것으로 만세운동 당시 상황을 반영한 주소로 판단된다. 손자 증언에 의하면 염규호는 숯 공장을 운영한 사업가였다고 한다. 이들이 언제 결혼을 하였으며 구세군에 입교하였는지도 파악할 수 없다. 구세군의 문산포 중앙영문은 1909년 3월에 개영식을 가졌다. 이 영문은 1934년 폐영되었는데, 1916년 당시 파주군 구세군 전도관은 천현면 법의리, 임진면 문산리, 천현면 법의리 등 세 곳을 운영하였다. 이들은 파주영문 신도로 생각된다.

“문산포역에서 한 정거장을 지나 금촌이라 하는 정거장에서 한 7리에 있는 ‘교하’라 하는 구읍이 있는데, 그곳에 기거하는 염규호와 그의 부인은 구세군을 심히 사랑하여 구세군영을 그곳에 설립하기를 심히 원하는지라. 고로 문산포 정교 조춘호와 그의 부인, 서기 이한근과 소관 사관 부위 장기영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재정을 아끼지 아니하고 차비와 식비를 부담하여 2~3일 동안 볼일을 전폐하고 주를 위하여 교하에 가서 염규호와 더불어 열심 전도한 결과에 새로 구원받은 남녀의 수가 십여 명에 달하였는데, 정교 조춘호와 서기 이한근은 그곳에 새로 설립되는 교회를 힘써 돕기로 결심하였다 하니 이는 참 그리스도의  병정이오, 남 사랑하기를 제 몸과 같이하는 사람들이라 하노라.”

열성적인 활동과 깊은 신앙심으로 지역사회에 상당한 신망을 받는 인물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들은 이를 바탕으로 주민들에게 신뢰감을 심어줌으로써 3·1운동 주역으로 거듭 태어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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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하초등학교에 세워진 3·1운동 100주년 기념 임명애 공적 안내판_구세군역사박물관 제공(왼쪽)
교하초등학교에 건립된 3·1운동 100주년 기념비_구세군역사박물관 제공(오른쪽)


경기도 파주에 독립만세 소리가 울려 퍼지다 

러일전쟁을 원활하게 수행하려는 일제는 경의선 부설에 박차를 가하였다. 철도 부설권을 장악한 저들은 파주군·교하군·고양군 등지에서 강제로 역부를 징발하였다. 주민들은 이에 반발하여 저항하는 등 일제 침략에 정면으로 맞섰다. 일제 헌병과 경찰은 마을을 다니며 강제적인 징발을 서슴지 않았다. 특히 임진강 일대를 중심으로 전개되던 의병전쟁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야만성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강제병합 이후에는 토지조사사업과 더불어 특산물인 농산물 중 ‘콩’을 수탈하는 데 혈안이었다. 그런 만큼 항일의식은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였다. 

억압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드디어 1919년 3월 10일 교하리 공립보통학교 교정에서 100여 명의 학생들은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를 주도한 인물은 인근에 사는 가정부인 임명애였다. 그녀가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학생들은 일제히 호응함으로써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시위 행렬은 운동장을 돌면서 자신들의 정당한 요구를 주민들에게 알렸다. 임명애의 주도로 만세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배경 중 하나는 구세군에서 운영한 주일학교와 관련성을 추정할 수 있다. 평화적인 시위는 바야흐로 파주지역 독립만세운동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소식은 관내로 파급되는 가운데 주민들 사이에도 조국독립을 위한 항일의식이 점차 확산을 거듭하였다.

평화적인 시위가 있은 후 파주지역은 보름 동안 비교적 평온한 분위기로 소강상태였다. 각지에서 전개된 소식은 여러 경로를 통하여 이곳에 전해지고 있었다. 주민들을 동원한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위한 ‘준비 단계’였다. 판결문에 따르면, 3월 25일경(실제는 이보다 이른 시기)에 학생 김수덕(16세)과 농민 김선명(24세) 등은 그녀 집을 찾아와 “조선독립운동에 관한 의논을 하고자 하니 방을 빌려 달라”고 요청하였다. 임명애는 남편 염규호와 함께 이들과 효율적인 독립운동을 위한 격문 인쇄·배포가 필수적이라고 판단하여 그렇게 하자고 결정하였다. 

곧바로 염규호는 격문의 원고를 작성하였다. “오는 28일 마을주민 일동은 모두 윤환산으로 집합하라. 만약에 불응하면 방화한다”는 내용이었다. 만세시위에 주민들을 참여시키는 강력한 행동 방침이나 마찬가지였다. 김수덕은 등사판을 빌려와 60여 매를 등사하였고 김창실은 와석면 구당리·당하리 등지에 배부하였다. 그런데 일제 경찰과 헌병의 감시는 점점 삼엄하게 다가왔다.

만세시위는 격문에 있는 바와 달리 이틀 앞당겨 26일에 전개하였다. 이들 부부를 비롯한 주동자는 70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가두시위를 벌였다. 그녀는 선두에 서서 이들을 지휘하여 교하면사무소로 향했다. 면사무소에 도착한 시위대는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뜨리고 면서기 2명에게 업무 중단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이를 목격한 주민들은 시위행렬에 가담하여 1,5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시위대를 이끌고 헌병주재소로 향해 나아가자 기세에 눌린 헌병들은 아무 대응도 하지 못한 채 파주헌병분소에 병력을 요청하였다. 지원 병력에 용기를 얻은 저들은 시위대를 향하여 무차별로 발포하여 당하리의 최홍주는 현장에서 사망했다. 시위군중은 일단 해산하였다.

이를 계기로 청석면 주민 수백 명도 심학산에 모여 면사무소를 향해 나아갔다. 보통학교 학생들은 태극기를 손에 쥐고 선두에 나섰다. 이들은 면사무소 앞뜰에서 “면장은 나와 만세를 부르라”고 외쳤다. 면장은 처음에 해산을 종용하다가 결국 시위 행렬에 가담하였다.

28일 봉일천 장날(공릉장)에는 장꾼과 광탄면 주민 등이 합세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여기에는 고양군 주민 등도 참여함으로 지역적인 한계를 뛰어넘는 연합시위로 이루어졌다. 일제 헌병은 시위대를 향하여 무차별적인 발포로 현장에서 6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을 당했다. 대규모 만세시위는 피로 얼룩진 역사 현장으로 기억되고 있다.

시위를 주도한 임명애 부부를 비롯한 김수덕·김창실 등은 검거되어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임명애는 징역 1년 6개월, 나머지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그녀는 서대문형무소 8호 감방에 수감되어 옥고를 치렀다. 남편도 수감됨으로 부부가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감방에서 투쟁을 멈추지 않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임명애는 8호 감방에 배정되었다. 여자 감옥인 8호방은 개성지역 3·1운동 주역 어윤희·권애라·심명철, 3·1운동 아이콘 유관순 열사, 수원 기생 김향화 등이 함께 수형생활을 했던 곳이다. 임명애는 당시 만삭의 몸이었다. 출산을 위해 임시 출소하였다가 아이를 낳고 12월에 갓난아이를 품에 안고 재수감되었다. 남편도 1년형으로 복역 중으로 온 가족이 모두 수형생활을 하는 고난의 시절을 보냈다. 혹독한 겨울을 맞이하며 차디찬 감방에서 산후조리는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맡 언니 격인 어윤희는 어려운 여건에도 편의를 제공하는 데 헌신을 다하였다. 아이의 기저귀는 물론 산모 건강을 위해 조언과 세심한 보살핌을 잊지 않았다. 이러한 고난 끝에 임명애는 1920년 9월에 만기 출소하면서 먼저 출소한 남편이 있는 파주 교하리 고향에 돌아왔다.

수감 중에도 이들은 희망의 끈을 일순간마저 버리지 않았다.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하여 전통적인 창가를 가사한 노래를 불렀다. 현재 남아 있는 창가는 모두 두 곡으로, 심명철이 생전에 아들 문수일에게 구술하였는데 ‘선죽 교 피다리’와 ‘대한이 살았다’이다. 두 노래는 『선죽교 피다리』(1991, 장수복 저)라는 소책자에 실리면서 본격적으로 대중에게 알려졌다. 


진중이 일곱이 진흙 색 일복 입고

두 무릎 꿇고 앉아 주님께 기도할 때

접시 두 개 콩밥덩이 창문 열고 던져줄 때

피눈물로 기도했네 피눈물로 기도했네

피눈물로 기도했네

- 선죽교 피다리


대한이 살았다 대한이 살았다

산천이 동하고 바다가 끓는다

에헤이 데헤이 에헤이 데헤이

대한이 살았다 대한이 살았다

- 대한이 살았다


선죽교 피다리의 ‘피눈물로 기도했네’라는 부분은 너무나 참기 힘든 옥중생활을 사실적으로 알려준다. 두 번째 가사는 전국에 확산된 3·1운동의 기운을 ‘대한이 살았다’로 독립을 바라는 의지와 염원을 보여준다. 3·1운동 한돌을 맞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전개된 옥중투쟁은 이러한 사실과 무관하지 않았다.

가사는 누가 지었는지 알 수 없으나 권애라가 아닐까 추정한다. 그녀는 음악적인 재능이 아주 뛰어난 신여성이었다. 김향화는 수원을 대표하는 명창으로 창가를 듣고 권애라가 이를 시대 상황에 맞게 정리하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짐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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