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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힘으로 퍼져나간 

대한독립만세

INPUT SUBJECT

톺아보기 속 인물 살펴보기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이 이루어졌고 합류하는 민중이 수만 명에 달했다. 도시 지역에서는 학생과 

지식인의 선도적인 역할로 시민을 동원하였다. 노동자들은 파업을 감행하였고, 학생들은 속속 

동맹휴교에 들어갔다. 상인들은 가게를 닫아버리는 철시 투쟁으로 시위에 동참하였다. 

농촌 지역에서는 농민들이 앞장서 시위운동을 이끌었다. 그렇게 모두가 만세시위의 주역들이었다.


우리는 오늘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한다. 

우리는 이를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가 모두 평등하다는 큰 뜻을 분명히 하고, 우리 

후손이 민족 스스로 살아갈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게 할 것이다. 

3·1독립선언서 중 도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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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일의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을 선언한 3·1독립선언서


비폭력 만세운동으로의 3·1운동

당시의 만세시위 운동은 헌병경찰에게 탄압당한 뒤 무기를 든 항쟁으로 이행하여 갔다. 이런 양상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나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때의 양상과 유사하다. 시위에 참여한 이들은 총독부 헌병경찰들이 자행하는 가혹한 폭력에 맞서기 위해 곤봉·각목·나무창 등의 원시적 무기를 소지하거나 자진해서 투석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3·1운동은 전반적으로 평화적 운동이었지만, 가혹한 폭력 앞에 노출되었을 때 이들은 생존과 방어를 위해 최소한의 폭력을 동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시위대가 상점과 헌병 숙사 등을 습격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물품을 투기하거나 소각할 뿐 절도에 이르지는 않았다. 또 시위는 민란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향촌공동체에 의한 동원 방식으로 참여하지 않은 사람은 처벌당하였다. 화톳불 행진과 산상 봉화가 빈번하게 이루어졌는데, 이것도 민란에서 흔히 등장하던 방법이다. 집단으로 산에 올라가 만세를 외치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것은 민란 과정에서 참가자들이 군수나 현감 등 지방관을 비난하는 산호(山呼)의 전통을 계승하는 것이었다. 

한편 도시락 지참으로 각지의 만세시위 행진에 참가하거나 운동을 북돋는 ‘만세꾼’도 출현하였다. 시위 선두에는 기생과 소년이 서는 경우도 있었고, 농악과 나팔을 연주하거나 농민답게 큰 깃발이 등장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이미 조선은 독립했다고 착각하는 이들도 적지 않아 시위운동은 마치 축제의 양상을 드러내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사람들은 함께 만세를 외침으로써 조선 사람이라는 일체감에 도취하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한국인은 1910년 일제에게 국권을 강탈당하기 이전부터 집회와 정치활동을 금지당하고 있었다. 열광적인 만세 소리는 지금까지 축적된 불만이 일거에 분출되는 순간이었다.


전북지역의 3·1운동 지도자

만세시위 운동은 황해도나 평안도, 전라북도와 같이 천도교와 기독교 세력이 강한 지역에서는 서울의 소요와 국장을 목격한 이들이 귀향하여 그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함으로써 개시되는 경우가 많았다. 전북지역에서 3·1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김영원(金榮遠)과 박준승(朴準承)을 들 수 있다. 모두 임실 출신의 천도교인이다. 

먼저 김영원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과 1919년 3·1운동에 모두 관여한 인물이다. 임실 지역에는 1889년에 동학이 급속도로 전파되었는데, 이때 김영원도 입교하였다. 1893년에는 보은취회에 참여하였고(『임실교사』), 1894년 3월 무장기포 시에는 임실에서 대접주 최봉성 등과 함께 기포하였다. 동학농민혁명 이후에는 천도교에서 활동하였다. 1906년에는 제자이자 33인 지도자 가운데 1인이었던 박준승과 함께 삼화학교(三和學校)를 설립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 그리고 3·1운동이 일어나자 임실지역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2일 정오에 운암면 지천리에 있는 천도교 교구실에서 천도교 전도사인 한준석으로부터 독립선언서 20여 매를 전해 받고, 운암면 내 일대에 게시하였다. 이것이 자극이 되어 3월 12일 임실 장날에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의 정신적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김영원은 곧바로 체포되어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박준승 역시 김영원과 마찬가지로 동학농민혁명과 천도교 그리고 3·1운동에 모두 참여한 인물이다. 1891년에 동학에 입도하여 1897년에 접주가 되었고, 1908년에 수접주(首接主), 1912년에는 전라남도 장성군 천도교 대교구장 겸 전라도 순유위원장을 역임하였다. 3·1운동 당시에는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명이었다. 박준승은 1919년 2월경에 손병희로부터 만세시위 운동에 참여하라는 권유를 받고, 최린·오세창·양한묵 등과 함께 김상규의 집에 모여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검토하고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서명하였다. 3월 1일 만세운동 당일에는 손병희 등과 함께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에, 일본경찰에 자진 검거되어 2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그 후 고문 후유증으로 1927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정부는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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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지역 3·1독립운동에 참여한 김영원(왼쪽) / 전북지역 3·1독립운동에 참여한 박준승(오른쪽)

진정한 3·1운동의 주역들

3·1운동은 일반적으로 비폭력 운동으로 평가되지만 그러한 평가는 주로 33명의 민족대표를 중심으로 한 평가에 의거한 것이다. 3·1운동을 계기로 중국 상하이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어 중국을 비롯하여 해외에 산재하던 민족운동가들이 집결하였는데, 세계 여론에 호소하여 독립을 달성하려는 전략이 기축이 되고 있었다. 이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이 되는 박은식은 그 당시 임시정부 대변인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그는 3·1운동이 얼마나 평화적이었으며 비폭력주의적이었는가를 호소하는 데 힘썼다. 

무엇보다 3·1운동은 식민지 조선 역사상 최대의 민중운동으로 평가되고 있다. 여기에 종교가와 지식인의 역할이 적지 않았지만, 어디까지나 도화선을 끌어와 점화한 데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폭발을 이끌어낸 주역은 노동자와 농민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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