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립운동가

독립을 위한 하나 된 외침 

당진 대호지·정미 3·1운동

이인정, 송재만, 한운석

이달의 독립운동가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



3·1운동은 국내외 각지에서 조선인 모두가 참여해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배를 부정하고 독립을 선언한 전 민족적인 독립운동이었다. 그중 당진 대호지·정미 3·1운동은 대호지면사무소 직원들이 주도하고 지역 유생을 포함한 군중 1,000여 명이 하나 되어 참여한 만세운동이자, 대호지면에서 정미면까지 면 경계를 넘어 전개되었다는 특징을 지닌다. 여기서 이인정·송재만·한운석은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실무를 주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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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송재만(宋在萬)1891~1951 충청남도 서산건국훈장 애족장(1990)

이인정(李寅正)1859~1934 충청남도 서산건국훈장 애족장(1990)

한운석(韓雲錫)1884~1950 충청남도 서산건국훈장 애족장(1990)


당진 대호지·정미 3·1운동을 위한 준비

당진 대호지·정미 3·1운동은 광무황제 국장에 참여하고 돌아온 도호의숙(桃湖義塾) 출신의 대호지 유생들이 서울의 3·1운동을 전하고 대호지면에서의 독립운동을 구상하면서 시작하였다. 대호지면사무소 직원을 중심으로 준비가 진행되는 가운데, 직원 송재만은 ‘도로 보수를 위한 협조 요청’ 공문을 마을구장¹에게 전달하고 마을 주민들이 시위 장소로 모이도록 하였다. 또 도호의숙 훈장 한운석에게 애국가 제작을 요청하였다. 송재만의 제안을 받은 한운석은 독립운동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독립의지를 굳건히 하는 내용의 ‘애국가(愛國歌)’를 만들었다. 


4월 4일 지역을 넘은 독립만세 행진

시위 당일인 4월 4일, 대호지면사무소 앞에 마을 주민 400~ 500여 명이 결집하였다. 면장 이인정은 마을 주민들에게 집합 이유가 사실 도로 수선이 아닌 독립운동을 위함이라 말하고 정미면 천의장터로 나아가자고 연설하였다. 이어 “조선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며 군중들을 지휘하였다. 송재만은 전날 광목천 3척으로 제작한 태극기를 흔들며 이인정과 함께 약 7km 정도 떨어진 정미면 천의장터를 향해 만세 행진을 이끌었다. 천의장터에 도착하자 장터에 모인 사람들도 합세하여 약 1,000여 명의 군중들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1) 구장(區長) 일제강점기 지금의 마을 이장을 불렀던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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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지(各地)의 소요(騷擾), 충청남도 서산(瑞山) 천의장에서 소요」, 『매일신보』(1919. 4. 14.)_국립중앙도서관 제공(왼쪽)

당진 대호지·정미 3·1운동 참여자 경성복심법원 판결문_국가기록원 제공(오른쪽)

여러분을 모이게 한 것은 도로를 

수선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조선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모이게 한 것이다.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정미면 

천의시장으로 향해 나아가자.

4월 4일, 면장 이인정이 대호지면사무소 앞에 모인 

군중들에게 했던 연설 중에서

「경성복심법원 판결문」(1919. 12. 24.)


일제의 비인도적 탄압에 맞선 저항

만세군중들의 위세에 눌려 관망하던 일제 경찰은 만세운동을 마치고 귀가하는 민중들의 태극기 탈취를 시도하였다. 여기에 저항하는 군중들에게 당진 경찰서 순사 니미야(二宮)가 권총을 발포하였다. 일제의 비인도적 탄압에 분노한 송재만과 한운석 등은 일제 경찰에 강력히 저항하였다. 일제 경찰은 다음 날인 4월 5일부터 본격적으로 관련자를 탄압하거나 체포하기 시작하였고, 그 과정에서 이인정·송재만·한운석은 일경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90년 정부는 당진 대호지·정미 3·1운동을 주도한 이인정·송재만·한운석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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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소요범인(瑞山騷擾犯人) 불복항소(不服抗訴), 송재만 등 오십이인」, 『매일신보』(1919. 11. 19.)_국립중앙도서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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