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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못할 그날

3·1 독립만세운동의 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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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맹수(원광대학교 교수)


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일제의 식민지배에 저항하여 전 민족이 항일독립운동으로 일어났다.

합류하는 민중이 수만 명에 달했고, 시가지 곳곳에서 독립을 절규하는 연설이 행해졌다.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태극기를 선두로 시가지를 향한 평화적인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가혹하게 탄압받으면서도 민중들의 열기는 식을 줄 몰랐던 그날의 현장 속을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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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


3·1운동 전사로서의 동학농민혁명

고부군수 조병갑의 폭정이 도화선이 되어 일어난 1894년 동학농민혁명은 1년 이상이라는 장기간에 걸쳐 수백만의 민초들이 참여한 가운데 전개되었으며, 동시대에 일어난 세계 민중운동사에서 최대 규모라는 의의를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과 같이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어떻게 해서 수백만이 대규모로, 그것도 1년 이상에 걸쳐 장기적인 항쟁을 지속할 수 있었을까? 여기에는 분명히 어떤 이상(理想)이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동학농민군지도자 홍종식의 증언은 그 이상을 추측하도록 하기에 충분하다. 


첫째, 입도만 하면 사인여천(事人如天)이라는 주의 하에서 상하귀천 남녀존비 할 것 없이 꼭꼭 맞절을 하며 경어를 쓰며 서로 존경하는 데에서 모두 다 심열성복이 되었고, 둘째 죽이고 밥이고 아침이고 저녁이고 도인(道人)이면 서로 도와주고 서로 먹으라는 데에서 모두 집안 식구같이 일심단결이 되었습니다.

 - 홍종식, 『70년 사상의 최대 활극 동학란 실화』, 『신인간』 34호, 1929년 4월호.


이 증언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충청남도 서산에서 농민군지도자로 활약한 홍종식(洪鐘植)이라는 인물이 자신이 왜 동학농민혁명에 가담했는지, 그리고 당시 민초들이 왜 다투어 동학에 뛰어들었는지를 후대에 회고한 것이다. 홍종식의 회고 속에는  “사람이 하늘이니 사람 섬기기를 하늘 섬기듯이 하라”는 동학의 평등주의적 이상을 실감 나게 실천하고 있다. 또 먹을 것을 나누고 가난한 자와 부자가 서로 도와주는 동학의 유무상자(有無相資)의 전통, 즉 초기 동학의 평균주의적 이상 아래 민중들이 단결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요컨대 동학농민혁명은 신분제 해체를 통한 만민평등의 평등 사회 건설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서로 나누고 돕는 유무상자의 평균 사회를 건설하는 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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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당시 시위대에 대응하기 위해 있는 일본 군경


동학농민혁명의 급진화와 그 영향 

동학농민혁명은 한국사는 물론이고 세계사적으로도 흔치 않은 대사건이었다. 500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민초들의 집단 저항운동이자 조선사회를 변혁하려는 일대의 혁명운동이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의 희생자는 30만 명에 달한다. 그 가운데 최소 3만 명 이상이 일본군에게 잔혹하게 학살당하였다. 2013년 8월에 동학농민군 학살에 동원된 일본군 병사의 종군일지가 공개된 적이 있다. 그 종군일지에 의하면 일본군은 몽둥이로 때려죽이고, 칼로 찔러 죽이고, 불태워 죽이고, 근대식 소총으로 쏴 죽이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농민군을 학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동학농민군은 왜 근대식 무기를 휴대하고 근대식 전술훈련을 익힌 일본군 정예부대에게 이렇게까지 비극적인 학살을 당하면서 무력항쟁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일까? 당시의 동학농민군 최고 지도자였던 전봉준은 체포된 뒤 최후 진술에서 “부득이하여 무장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부득이하여 조선 정부군 및 일본군과 접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재차 삼차 역설하였다. 가령 고부농민봉기를 일으키기 전에 고부군수와 전라감사에게 합법적인 청원을 통해 부당한 세금을 감해 줄 것을 호소하였지만 모두 거절당해서 부득이하게 봉기를 일으킬 수밖에 없었고, 황토현과 장성 황룡촌 및 전주성 등지에서 조선 정부군과 혈전을 벌인 것도 정부군이 먼저 공격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접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공주 우금티에서 일본군과 혈전을 벌인 것도 일본군이 먼저 경복궁을 불법으로 침략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하였다. 이 같은 전봉준의 진술에 근거해 볼 때, 동학농민군이 무장을 하고 정예부대인 조선 정부군 및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는 등 저항운동이 급진화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합법적인 방법을 통한 문제 해결이 지배층에 의해 모두 좌절되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즉 농민군의 무장투쟁은 부득이한 정당방위였다. 

동학농민혁명은 19세기 말 세계사에서 유례없는 최대 규모의 민중운동이었으나 지배층의 무능과 일제의 침략, 기득권 수호에 눈먼 보수 지식인들의 탄압 때문에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을 계기로 분출되고 조직화되기 시작한 이들의 새 시대를 향한 열망은 결코 끊이지 않았다. 예컨대 동학농민군이 꿈꾼 만민평등의 이상은 지배층을 각성시켜 신분제를 폐지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또 유무상자(有無相資)로 상징되는 동학의 평균주의적 이상은 「폐정개혁 27개조」로 구체화되어 갑오개혁(1894)과 광무개혁(1896)을 탄생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동학농민혁명 당시 내건 ‘척양척왜(斥洋斥倭)’의 반(反) 침략주의 노선은 한국 근현대 민족·민중운동의 원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으며, 동학농민혁명의 이상은 다시 1919년 3·1운동을 통해 한층 승화된 형태로 표출되기에 이르렀다.


3·1운동의 발단

1919년 1월 22일에 승하한 광무황제의 장례식은 국장(國葬)으로 3월 1일에서 7일까지 거행되었다. 국장 기간 동안 조선인들에게는 일제에 의해 광무황제가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갔다. 이에 전국 각지에서는 애도의 뜻을 표하는 하얀 갓을 쓴 이들이 앞을 다투어 등장하였으며, 망곡식(望哭式)도 전국 각지에서 진행되었다. 전 국토는 눈물바다가 되었고, 국장에 참가하기 위해 경성으로 향하는 이들이 속출하였다. 이 같은 현상의 배경에는 조선왕조로부터 대한제국 시기에 이르기까지 민초들 마음속에 깊게 자리를 하고 있던 일군만민(一君萬民)의 이념이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1910년 국권 피탈 이후 10년에 걸쳐 자행된 일제의 무단통치에 대한 식민지 조선 민중들과 지식인들의 전면적인 반발도 자리하고 있었다. 

이상과 같은 역사적 배경 아래에서 천도교, 기독교, 불교 등의 종교지도자는 독립선언을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33인으로 대표되는 종교지도자들은 독립선언서 말미의 ‘공약 3장’에서 세계만방에 천명(闡明) 하고자 했던 비폭력 평화주의 정신이 훼손될 것을 염려하여, 탑골공원에서 발표하기로 한 독립선언을 취소하고 태화관에 모여 ‘만세삼창’을 한 후 전원 체포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3·1운동은 지도부의 공백 상태 속에서 노동자·농민, 일반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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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골공원의 독립만세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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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대한문 앞 광무황제 장례 행렬


3·1운동의 전국적 확산

탑골공원에서는 학생과 시민 등으로 독립선언이 이루어졌다.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태극기를 선두로 시가지를 향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합류하는 시위대는 수만 명에 달했고, 시가지 곳곳에서 독립연설이 행해졌다. 시위행진은 가혹하게 탄압받았지만, 운동은 왕성하게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도시 지역에서는 학생과 지식인의 선도적인 역할로 <독립선언서>를 비롯한 각종 인쇄물과 태극기, 독립만세기 등을 제작하였다. 『독립신문』, 『국민신문』 등의 신문과 전단(삐라)이 수없이 배포되었다. 또 납세 거부와 일화 불매, 일본인에 대한 상품 불매와 고용 거부 등이 이루어졌다. 노동자들은 파업을 감행하였고, 학생들은 속속 동맹휴교에 들어갔다. 상인들도 왕조시대의 관행을 따라 ‘철시(撤市)’를 함으로써 독립 의지를 표명하였다. 농촌 지역에서도 학생과 지식인들이 수행한 역할이 적지 않았지만 일반적으로는 농민이 주역이었다. 전국에서 체포된 이들 가운데 55.6%가 농민이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웅변한다. 농촌에서는 특히 전통적인 민란 방법에 의한 운동이 전개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양반유생이 민초들에게 추대되어 민란지도자가 되기도 하고 스스로 주도자가 되기도 했는데, 3·1운동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전통적인 양반 거주지로 알려진 동족 마을에서는 일족이 대거 운동에 참가하기도 하였고, 양반 유생이 면장이나 면서기·이장 등을 지휘하여 주민을 동원하기도 하였다. 만세시위 운동은 대부분 장날에 장터에서 시작되었는데, 이것도 전통적인 민란 방법과 동일했다. 지도자의 독립선언에 이은 연설 후에 시위행진이 이루어졌다. 탁주의 취기에 힘입어 참가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시위운동은 적게는 수십 명, 많게는 2만 명에 이르렀는데, 수백 명에서 수천 명 규모가 일반적이었다. 만세시위 집단은 군청이나 면사무소로 쇄도하여 군수나 면장을 끌어내어 ‘독립만세’를 외치도록 강요하는 경우도 있었고, 때로는 경찰서나 주재소를 습격하거나 일본인 상점을 습격하기도 하고, 일본인에게 폭행을 가하기도 했다. 더 나아가서 우편국을 습격한다든지, 전봇대를 넘어뜨리고 교량을 불태우는 등 통신시설을 파괴하여 통신망을 방해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만세시위 운동은 전반적으로 ‘공약 3장’에서 피력한 비폭력 평화주의 운동으로 일관되었다. 

3·1운동 당시 피해 상황은 정확하지 않다. 총독부 당국이 가능한 한 축소하여 보고하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 상하이에 있으면서 조선에서 나온 각종 정보를 수집하여 기록을 남긴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한국 측 피해는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5,961명, 체포된 자 46,948명이었다고 한다. 이에 반해 일본 측 피해는 관헌 사망자 8명, 부상자 158명, 파괴된 관공서는 경찰서 및 경관주재소 87개소, 헌병주재소 72개소, 면사무소 77개소, 우편국 15개소, 기타 27개소로, 총 합계 278개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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