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관

일제강점기 해외 동포들이 

써 내려간  항일 민족시가 

국민회와 서간도

인문학관

글 김동수(백제예술대학교 명예교수·시인)



일제강점기 중국 상하이, 만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미주 등지 해외에서 발표된 망명인사들의 항일 민족시가들이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있다. 아래 소개할 시가들은 1907년부터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한 『공립신보』(1909년 『신한민보』로 통합)에 게재된 작품들이다. 당시 언론 통제 아래 친일 문학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던 국내 문학과는 다르게, 해외 동포들의 망명문학에서는 민족사의 정맥을 지켜 민족혼을 불태우고 있었다. 


미주 독립운동의 거점, 국민회

‘국민회’는 1909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 단체이다. 1908년 장인환과 전명운 등이 통감부의 외교 고문인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를 샌프란시스코에서 권총으로 처단한 사건이 발생하자, 미국에 살고 있던 교포들의 항일 애국열이 고조되었다. 그해 7월에는 박용만·이승만·안창호 등이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개최한 애국동지대표대회에서 미국에 흩어져 있던 애국 단체를 규합하여 통합 단체를 결성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어 1908년 10월 30일 하와이 ‘합성협회’ 대표 7인과 본토의 ‘공립협회’ 대표 6인이 모여, 1909년 2월 1일 ‘국민회’가 창립되었다. 

국민회는 총회와 지방회의 두 종류의 조직체로 구성되었다. 미국 본토에는 북미 지방총회를 두고, 하와이에는 하와이 지방총회를 두었다. 북미 지방총회는 공립협회의 기관지인 『공립신보』를 1909년 2월 10일 『신한민보』로 개칭하였고, 하와이 지방총회는 합성협회 기관지 『합성신보』를 『신한국보』로 고쳐 항일 애국사상과 교포들의 단결심 배양에 힘썼다.

국민회는 1910년 2월 다시 ‘대동보국회’와 합동하여 ‘대한인국민회’로 개칭하였다. 1911년에는 샌프란시스코에 중앙총회를 설치하고, 북미·하와이·시베리아·만주 등 4개 지역에 지방총회를 설치하였으며, 이들 각 지방총회 밑에 각기 10여 개의 지방회를 거느리는 큰 단체로 성장하였다. 멕시코·쿠바에도 지방회가 설치되어 재외한인 교포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기관으로 활동하였다. 이와 같이 국민회는 교포들의 친목 단결을 도모하는 한편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등 1910년대 해외 민족 운동가의 최고 지도 기관으로서 항일운동을 주도해나갔다.

관련 축시는 국민회 창립 6주년을 맞이하여 북미 지방에서 보내온 축사이다. 국민회의 창립 목적에 대하여 실업 진발, 교육 장려, 명예 존중, 평등 제창, 독립 광복이라 밝히고 있다.


우리회 창립이 / 지금에 육년이라

이월 초할우는 / 백셰에 영원 긔념

목적이 크도다 / 교육 실업과 평등

죵지가 크도다 / 조국의 독립 광복

미쥬와 하와이 / 대동단결한 후에

멕스코 원동은 / 동셔에 셩셰련락

우리의 휘쟝은 / 무궁화 쳔츄무궁

사해가 우러러 / 일례로 좃난도다

이 회 안이 드면 / 의관을 엇지 보존

비노니 샹텬이 / 항상 권고하쇼셔

「축사 북미총회」, 1915. 2. 4.  『신한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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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회(왼쪽) /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지점(오른쪽)


독립지사들의 대표 망명지, 서간도

서간도(남만주) 지역은 백두산 서쪽의 압록강 지류인 혼강 일대로, 일제의 무리한 수탈에 고향을 등지고 이곳으로 이주하는 조선인이 많았다. 일제의 세력이 깊이 미치지 못했던 이곳도 독립지사들의 망명이 이어지면서, 1909년부터는 일제의 관리·통제를 받기 시작하였다. 

아래 시에 등장하는 ‘척식사’는 1908년 일제 통감부가 한국의 토지와 자원을 독점하고 수탈할 목적으로 설립한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말한다. 당시 통감부는 조선인들의 땅을 강제로 빼앗아 5할이나 되는 무리한 소작료를 받았는데, 이 때문에 많은 조선인이 고향을 등지고 만주와 연해주 벌판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경상도에서 쫓겨 온 서간도 벌목군도 ‘열두 겨리 암소는 왜놈이 부리고 / 백목경뎐 답은 척식샤에 갓도다’라며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한편 ‘내가 이곳에 온 사정 심각하니 / 옷밥이 그리워 온 것이 아니로다’ 등의 내용과 작자 미상인 것을 보아, 이 벌목가의 경우 호구지책보다는 독립운동과 관련된 반일 인사에 가까운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독기를 메고 문압에 나서니 / 풀으고 검은 돌이 겹겹이 싸였다. 

이돌 뎌돌 순서로 밟으니 / 싸리집신 바닥이 철철 미거진다. 

머리 숙이고 심경을 생각하니 / 일보일보에 자연한 심회발한다. 

내가 이곳에 온 사정 심각하니 / 옷밥이 그리워 온 것이 아니로다. 

경상도 본가를 곰곰이 생각하니 / 량젼옥답에 오곡이 흐즈려졌다. 

문압헤 말매든 수양을 싱각하니 / 풀은닙 일만가지 차례로 디럿다. 

열두겨리 암소는 왜놈이 부리고 / 백목경뎐답은 척식샤에 갓도다. 

(후략)

「서간도 벌목가-서간도에서 나무 찍는 노래」, 1913. 11. 7.  『신한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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