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삼일절 기념 역사와 

3·1정신의 시대정신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글 이계형(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올해로 102번째 삼일절을 맞이하였다. 삼일절은 1949년 10월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따라 국경일로 정해졌다. 이는 제헌절·광복절·개천절·한글날 등 여느 국경일과는 의미가 다르다. 3·1운동은 ‘민족적 재생 운동’이자 ‘민족 부흥의 출발점’이라는 역사적 의미로, 35년간 일제의 식민통치 하에서 전개된 수많은 독립운동 중에서 유일하게 국경일로 기리고 있기 때문이다. 100여 년 동안 이어져 온 삼일절의 의미를 살펴보고, 앞으로 우리가 펼쳐가야 할 시대적 사명도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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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올림픽 대극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3·1독립선언 1주년 기념식


3·1운동을 어떻게 기념할 것인가

일제강점기에 3월이 되면 국내외 각지에서는 주어진 상황에 따라 크고 작은 3·1운동 기념식이 치러지거나 기념 시위가 전개되었다. 일본에서는 유학생이나 한인들이 시위 형태의 기념행사를 하는가 하면,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한이 부활한 성일(聖日)’이라며 기념일로 정하여 그날을 축하하였다. 임시정부는 중일전쟁 이후 일본군에게 쫓기는 상황에서도 선상(船上)에서 기념식을 열었다. 그뿐만 아니라 더러는 이념을 달리하면서 경쟁 관계에 있던 독립운동 단체도 삼일절만큼은 그 의미를 함께 새기며 행사를 치르기도 하였다. 

하지만 해방 이후 처음 맞는 삼일절에 좌익은 남산에서 우익은 서울운동장에서 각기 기념식을 열었다. 중립적인 태도를 보인 단체는 창경원(현 창경궁)이나 덕수궁에서 삼일절 기념식을 각기 진행하였다. 이는 모스크바삼상회의에 따라 찬탁과 반탁으로 갈려 서로 반목하며 이념 대립을 극복하지 못한 결과였다. 급기야 1947년에는 유혈사태로까지 번졌다. 이는 3·1운동을 어떻게 기념할 것인지를 두고 인식이 달랐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세력은 비폭력적인 3·1운동의 한계점을 지적하며 실천적인 기념 투쟁 방식을 띠었지만, 민족주의 세력은 행사 자체에 더 의미를 두었다. 이는 역사의 정통성을 서로 차지하려는 갈등에서 비롯한 것이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어떻게 삼일절을 기리고 3·1정신을 구현하고자 하였을까? 먼저 정부가 수립된 뒤 몇 차례 헌법이 개정되었지만, 3·1운동은 빠짐없이 전문에 담겼다. 제헌헌법(1948. 7.)에는 “대한민국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였다”라고 명시하였다. 5차 개헌(1962. 12.)에서는 “대한국민은 3·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한다”는 문구로 바뀌었다. 그 뒤 한동안 변함이 없다가, 6월 항쟁 이후 9차 개헌(1987. 10.)에서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다”고 고쳐 역사의 정통성을 강조하였다. 자구는 조금씩 바뀌었지만, 대한민국 정부가 3·1운동의 정신을 잇는다는 기본정신은 같았다. 하지만 삼일절 행사는 각 정권에 따라 방식이나 규모가 달랐고 표방하는 3·1정신 또한 차이점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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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운동장에서 거행된 우익의 삼일절 기념대회(1947)(왼쪽) / 남산에서 거행된 좌익의 삼일절 기념대회(1947)(오른쪽)


삼일절 기념행사의 변천사

1949년 첫 삼일절 행사는 ‘기미독립선언기념일’로 명명되어, 서울운동장에 11만여 명의 군중을 동원한 가운데 중앙청 기념대회가 열렸다. 당시 정부는 삼일절을 계기로 “3·1정신으로 ‘남북통일’을 완수하자”며 전 민족의 총궐기를 주문하였다. 1950년에는 ‘반공통일’이 강조되었고, 한국전쟁 중에는 ‘반공 북진통일’이 제창되었다. 하지만 1959~1960년에는 정치 파동에 정부 차원의 기념행사는 열지 못하였다. 1962년 박정희 군사정권 이후 첫 삼일절에는 독립유공자를 처음으로 포상하기도 하였지만, 기념식은 축소되었고 3·1정신은 ‘조국 근대화’, ‘평화통일’로 귀결되었다. 전두환 정부도 정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국민화합’과 ‘민족통일’을 강조하였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에는 권위주의적인 행사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노태우·김영삼 정권은 이전과 같이 ‘민족통일’을 강조하면서도 ‘자유민주주의’를 부각하였다. 또 3·1정신을 정치·경제 부패와의 전쟁, 노사갈등과 경기침체 극복 등 현실 정치·경제적 과제와 결합하였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1998년 이후에는 진보정권과 보수정권이 표방한 삼일절 메시지가 극명하게 갈렸다. 진보정권 하에서는 남북 화해와 한반도 평화, 과거사 청산에 방점이 찍혔지만, 보수정권에서는 대북 제제와 실용적 한일 관계 노선 및 나라 사랑 등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런데 보수정권에서는 3·1정신이 한 발 후퇴했을 뿐 아니라 3·1운동이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2008년 8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 광복절·건국절 논쟁이 불거졌을 때, ‘대한민국 3·1회’는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기념행사에 남동순 의사를 참석시켰다. 유관순 열사의 친구로서 3·1운동에 함께 참여했던 남동순 의사를 통해 자신들의 정당성을 내보이려는 의도였다. 2014~2015년 박근혜 정부 때는 “올바른 역사 교과서를 만들겠다”며, 국정 역사 교과서로 회귀하고자 기존 검정 교과서에 유관순 관련 내용이 빠져 있다고 문제 삼기도 하였다. 이는 3·1운동의 절대가치를 정권 유지 차원에서 훼손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3·1운동은 식민통치 10년을 경험한 민중들이 일제 치하에 당당하게 맞선 거국적인 운동이었고, 우리 민족을 하나로 결속시켰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이에 삼일절에는 진보와 보수 이념을 떠나 하나같이 남북 분단의 현실 앞에서 통일을 말해왔고, 제국주의의 강압적인 식민통치를 비판하며 미래 발전적인 관계를 추구하였다. 이제 102년 전 남녀노소 계층과 신분을 넘어 모두 하나의 목소리로 외쳤던 그날의 만세를 다시 되새기면서, 3·1정신을 남북의 화해와 통일을 넘어 세계 평화로 승화시켜야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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