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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힌 독립운동가 고평

독립군 참모와 지휘관 그리고 납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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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장세윤(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


일제강점기에 자신은 물론 온 집안이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하여 분골쇄신하며 자유와 평등, 정의와 공공선을 실현하기 위해 희생했음에도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이 많다. 이에 무명의 독립운동가를 소개하여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되새겨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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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평(高平, 본명 고인석)


그는 대종교에 입교하여 중국 연변(북간도)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만주 독립군인 의군부와 고려혁명군, 독립운동 기관인 신민부에서 

항일무장투쟁의 주역과 조역으로 활동하였다. 

귀국 후에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재판관으로 활동했으나, 

6·25전쟁 이후 납북되어 최후를 알 수 없게 되었다.


고평의 생애와 독립운동

고평(高平, 본명 고인석)은  1884년에 전라북도 부안군의 장흥 고씨 전통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장흥 고씨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고경명과 그의 두 아들이 순절하면서 크게 명성을 떨쳤다. 고평은 8세 때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고씨 지파의 종가로 입양되어 8년 동안 한학(漢學)을 수학하였다. 그 후 서울로 가서 보광학교와 관립 법관양성소를 졸업하고 춘천 지방법원의 검사로 한 달간 근무하고 사임한 뒤 고향 부안으로 돌아왔다.

1911년 7월 신흥 민족종교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대종교에 입교하여 주요 직책을 맡았는데, 1907년 장흥 고씨 일족인 고광순 의병장 등의 순절, 대종교 조직과의 연계가 만주지역(중국동북지역)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주요 계기가 되었다. 고평은 1913년 4월 대종교 동도본사의 전강 직책을 맡아 대종교 신도들이 이주하던 중국 지린성 왕청현으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에 종사하게 되었다. 특히 그는 대종교 세력을 대표하여 러시아 연해주와 중국 연변(북간도)을 왕래하면서 연변 지역의 3·1운동이라 할 수 있는 ‘룽징(龍井) 3·13 반일시위운동’의 기획에 참가하여 연변지역 항일독립운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가 노력한 결과 1919년 3월 13일 연변지역의 룽징(龍井)에서는 3만여 명의 한인들이 대거 참가한 ‘3·13 반일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또 1919년에는 연변지역에서 항일무장투쟁 조직인 ‘의군부’가 조직되었을 때 참모장 직책을 맡았는데, 이듬해 8월 하순 항일독립전쟁에 앞장섰다. 1920년 6월의 봉오동전투와 그해 10월의 청산리전투 시기에도 독립군 부대의 무기 구입과 운반, 각 부대의 연합과 후원에 크게 기여하였다. 

1923년에 역시 연변지역에서 1923년 5월 조직된 고려혁명군 독립군 부대의 참모장을 맡아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그는 1920년대 북만주 지방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조직이자 한인 교민 자치조직인 신민부의 과장을 맡아 북만주 지역의 독립운동과 한인 교민 자치운동에 기여하였다.만주지역 독립운동이 어려워진 1930년대와 1940년대 전반기에는 중국 관내(關內) 지역으로 이동하여 중국 국민당정부 관련 조직의 참모장이나 군법처장 등 법관을 맡아 한·중 연대 항일투쟁에 기여하였다. 1945년 4월 귀국하여 대종교 간부로 활동하는 한편, 1949년 후반기에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재판관으로 활동하며 친일 민족반역자의 심판에 앞장섰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1950년 6·25전쟁 때 납북된 뒤 잊히고 말았다. 앞으로 관련 자료를 더 발굴·수집하여 그의 생애를 새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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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관 고평 반민특위 판결문(1949. 4. 19.)

고평의 독립군 부대 통합 노력

고평은 대한제국이 멸망한 3년 뒤인 1913년, 4월 30세 때 부모와 처자를 멀리하고 낯선 만주(북간도)·연해주로 건나갔다. 이후 목숨을 걸고 싸우는 항일무장투쟁에 헌신하여 거의 10여 년을 투쟁하였다. 해외 무장독립운동에 가담하여 험난한 장년기를 보냈다. 특히 중국 연변지역의 3·1운동이라 할 수 있는 룽징(龍井)의 3·13 반일시위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1920년 6월의 봉오동전투 당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군무도독부의 최진동 진영을 중개하여 대규모의 독립군 연합부대를 형성한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의 중개와 독립군 연합부대 형성 노력의 결과로 유명한 독립군의 ‘봉오동전투(봉오동대첩)’ 승첩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또 1920년 10월 하순 김좌진·홍범도·안무 등 독립군 연합부대가 청산리 일대에서 대규모 일본군을 격파하는 ‘청산리전투(일명 청산리대첩)’를 수행 중일 때 연변 동부지방인 훈춘(琿春) 일대에서 치열한 독립전쟁을 벌인 사실도 높이 평가할 만 하다.1945년 8월 광복 당시 그는 62세의 고령이었다. 그는 주로 대종교 활동과 반민특위 재판관으로 활동하며 사실상 제2의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서울 중구에서 거주했는데, 1950년 여름 6·25전쟁 동안에 피난하지 못한 채 서울에 남아 있다가 북한군에게 납북되고 말았다. 그때 이미 67세였으니, 지금 생존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는 명가의 후손으로 편안히 살 수 있었지만, 험난한 삶을 살다가 납북되어 최후를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이와 관련하여 같은 장흥 고씨 일족인 전북 부안군 청림리 출신의 고광설(高光契, 일명 고광계) 역시 고향인 전북 및 호남지방, 함경남도와 중국 동북지방을 왕래하며 대한광복단 교통원으로 활동한 사실이 최근에 밝혀졌다. 따라서 호남지방 장흥 고씨 일족의 의병항쟁과 그 이후의 공화주의 지향 독립운동을 연계하여 조사할 필요성도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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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평 특무대 편성 신문기사 (『동아일보』 1923. 4. 30.)


특무대 사단 편성 

대장 고평 이하의 새로운 활동 · 의열단장과 운동방침을 협의

“종래 중국과 노령에 접한 지방인 니콜리스크와 보크라치나야 등지를 근거로 삼고 고평이란 사람이 중심이 되어 전성환, 허승완, 최태순, 기타의 동지로 더불어 조선독립군 특무대를 조직하여 4년 동안 각처에서 활동하는 중이더니 대장 고평은 금년 음력 이월 중에 동지와 같이 함경남북도 방면에서 비밀리에 들어와 여러 가지 상황을 조사하고 돌아간 후 그전에는 여러 대대로 편성하였던 특무대 독립군을 이번에 사단으로 편성을 고치고 규모를 늘리기로 결정하고 방금 계획을 진행 중인데, 금년도 경비 삼십육만 원 중 이십오만 원은 모처의 원조로 얻게 되었으나, 십일만 원이 오히려 부족하므로 이것을 구처하기 위하여 방금 고심 중이라 하며, 대장 고평은 사단 편성 후 독립운동의 방침을 협의하기 위하여 의열단장 김원봉과 만나보고자 모 방면으로 향하였는데, 오월 상순에 다시 돌아와서 즉시 한편으로는 부족한 군자금을 모집하고 한편으로는 사단 편성을 시작하리라더라(장춘).”


고평이 중국 관내 무장투쟁 조직인 의열단과 연계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적극 강화하려는 시도를 보여주는 『동아일보』 1923년 4월 30일자 기사다. 기사를 보면 고평이 널리 군자금을 모집하여 사단급 독립군을 편성하기 위하여 멀리 중국 남방에 있는 김원봉을 만나러 가는 등 동분서주하였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다만 실제 이 기사의 내용대로 실현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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