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인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임청각 주인 

이상룡과 김우락 부부

아름다운 인연

글 김형목(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이상룡은 나라가 망하자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펼치기로 결심한다. 그의 부인 김우락도 남편의 뜻을 따라 망명 준비에 나섰다. 이상룡은 이듬해 정월 명절을 쇠고 만주로 걸음을 옮겼다. 망명 사실이 드러날 것을 우려한 그는 홀로 길을 나섰다. 예상한 대로 그가 떠난 뒤 가족들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그렇게 이상룡 일가가 모두 서간도에 모이기까지는 꼬박 3개월이 걸렸다.


임청각 일가를 새롭게 조명하자

임청각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건축물 중 하나로, 선비문화 하면 임청각을 떠올릴 만큼 친근하게 다가온다. 중종 14년(1519)에 지은 임청각 공간은 사당과 별당형인 군자정, 본채인 안채·중채·사랑채·행랑채 등이 주위의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조화로운 배치로 신비함과 아늑함을 풍긴다. 외형과 달리 일제는 집 앞으로 중앙선 철도를 만들었다. 이때 집의 부속 건물 등이 헐려 나가 현재는 60여 칸만 남아 있다. 온전히 보존되지 않아 아쉬움은 있으나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이곳 주인들은 만주벌과 중국 관내 지역에서 조국 광복을 위해 고단한 삶을 마다하지 않았다. 독립운동 성지인 임청각은 이상룡과 김우락 부부를 포함해 이상동, 이봉희, 이준형, 이형국, 이운형, 이광민, 이병화, 허은 등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하였다. 시대적인 소명에 온 가족이 몸을 던지는 눈물겨운 삶에도 서로에게 의지하고 배려하였다.

임청각의 주인인 종손 이항증은 “남들은 대단한 독립운동가 집안이라고 하지만 정작 나는 고아원에서 자랐다. 광복 후 친일파를 제대로 청산했다면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고아원을 전전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뒤늦게나마 임청각에 대한 대통령과 국민적 관심에 감사할 따름이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 일제에 의해 철저히 망가지고 훼손된 독립운동가의 본거지인 임청각이 다시 제 모습을 찾게 되었으면 한다”고 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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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 이상룡

이상룡, 망명길에 오르다

이상룡은 1858년 11월 24일 경북 안동군 부내면 신세동(현 안동시 법흥동) 임청각에서 아버지 이승목(李承穆)과 어머니 안동 권씨 사이에서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고성, 자는 만초(萬初), 호는 석주(石洲), 다른 이름은 계원(啓元)이다. 한학을 수학하다가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선산이 있는 도곡마을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군사학을 연구하고 무기를 고안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11월 단발령 반포, 을사늑약에 반발하여 두 차례에 걸쳐 의병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두 번의 의병운동을 일으켰으나 성공하지 못하자 새로운 국권 회복을 모색하였다. 유인식·김동삼 등과 근대교육기관인 협동학교 운영은 시대 변화에 부응하려는 일환이었다. 대한협회의 안동지회 조직도 마찬가지였다. 나라가 망하자 국사 저술에 몰두하는 한편 만주를 무대로 국권 회복을 위한 독립군기지 건설 계획을 세웠다. 남아 있을 가족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집안에서 거느리던 노비를 해방시켰다. 이어 만주를 향해 출발하여 목적지인 서간도 삼원보 추가가에 도착하였다. 


독립군기지 개척으로 독립전쟁을 이끌다

이곳에서 먼저와 있던 신민회 회원 이동녕과 이회영 등과 독립군기지 개척에 앞장섰다. 자치기관인 경학사와 부민단을 설립하고 사장과 단장도 각각 맡았다. 경학사 지도부와 함께 한인 2세들 교육과 독립군 양성을 위한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였다. 수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백서농장 병영도 마련하였다. 한인 청년들은 이곳에서 인근 야산을 개발해 농사를 짓고 군사훈련에 참여하는 등 독립전쟁을 준비하였다.

국내 3·1운동에 자극을 받아 한인사회 지도자들과 합의하여 서간도 독립군기지를 체계적으로 이끌어 갈 한족회를 조직하였다. 이어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의 군사기관인 서로군정서를 조직하였다. 서로군정서는 북로군정서와 함께 임시정부 산하 양대 군사기관이 되었다.

신흥무관학교를 통해 독립군 병사를 충당함과 함께 무기 확보에도 전력을 기울였다. 서로군정서가 독립군단 체계를 갖추자 본격적인 무장활동을 개시하여 일제 경찰서와 면사무소 등을 습격하였다. 일제 추격에 서로군정서를 비롯한 독립군단을 일본군이 쫓아오자 이들을 상대로 벌인 전투가 바로 청산리전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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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청각 사랑채


임시정부 국무령으로 취임하다

1925년 5월에는 임시정부 내무총장 이유필과 법무총장 오영선이 만주로 왔다. 이들은 북만주 신민부와 정의부의 대표들을 만나 임시정부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정의부에서 천거하는 인물을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에 선임하자는 안을 제시하였고, 이에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갔다. 임시정부 인사들과 협의를 마치고 9월 24일 삼일당에서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하였다. 각계 인사들과 협의해 이탁 등 9명을 국무위원으로 임명하였다. 만주에서 무장투쟁 경험을 갖춘 인물들이 임시정부의 주축이 되었다. 그런데 이들 대부분은 취임을 거부하였다. 중앙의회가 정의부 인물을 의회의 의결을 거치지 않고 행정위원회 독단으로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천거를 문제로 삼았다. 

이런 일이 벌어지자 자신이 치밀하지 못하였음을 반성하고, 1926년 2월 만주로 돌아오고 말았다. ‘괴뢰 만주국’ 설립 이후 일제의 마수가 점차 강화·확대되었다. 젊은 동지들의 힘을 의지해 각지를 전전하던 중 1932년 5월 12일 만 74세의 나이로 지린성 쉬란현 소고전자에서 운명하였다. “국토를 회복하기 전까지는 내 유골을 고국에 싣고 가지 말고 우선 이곳에 묻어 두고서 기다려라”라는 유언에 따라 소고전자에 가묘를 썼다. 석주의 유해는 1990년 10월 중국에서 대전의 국립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가, 1996년 5월 서울 동작구의 국립현충원 임시정부 요인 묘역에 안장되었다.

“석주 선생이 보여주셨던 지행합일의 의지와 포용적 태도, 변화를 거듭했던 탄력적인 모습은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더구나 선생은 그 길을 혼자 가신 것이 아니라 만주의 한인 동포들을 아우르며 가셨습니다. 선생의 위대성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라는 평가는 삶의 여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자화상이다.


김우락, 일가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다

김우락은 경북 안동 임하면 천전리 즉 내앞마을의 의성김씨 집성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진린과 어머니 박씨 사이에 4남 3녀 중 맏딸로 태어났다. 내앞마을은 33명의 독립유공자를 낳은 독립운동 성지임에 틀림없다. 중심인물인 김우락의 오빠 백하 김대락은 사재를 털어 국권회복운동에 참가하였다. 1911년 가족 전체를 이끌고 만주로 망명한 뒤 이상룡 일가와 함께 경학사 등을 조직한 독립운동가다. 김대락에게는 김효락, 김소락, 김정락 3명의 남동생과 김우락, 김순락, 김락 등 3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김우락은 명망 있는 부잣집 가문 출신의 남편인 이상룡과 혼인하여 99칸 저택인 임청각의 안주인이 되었다. 일제 침략이 없었더라면 훌륭한 저택의 마나님으로 남부러울 것이 없이 살았을 터였다. 운명은 국망을 전후로 완전히 달라졌다. 대한제국기 최대 비밀결사의 신민회원이었던 남편이 중국으로 망명을 떠날 때 비통한 심정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삭풍은 칼보다 날카로워 나의 살을 에는데 살은 

깎이어도 오히려 참을 수 있고 창자는 끊어져도 

차라리 슬프지 않다. 그러나 이미 내 저택을 빼앗고 

또다시 나의 처자를 해치려 하니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지만 무릎 꿇어 종이 되게 할 수는 없다.”


망명길을 떠난 남편의 뒤를 따라 가시밭길로 뛰어들어야 하는 운명이었다. 낯선 이국땅으로 망명을 감행한 남편과 함께 김우락은 독립운동의 최일선에 나섰다.


내방가사로 독립운동가들 심정을 노래하다

안동의 양반 가문 출신인 김우락은 영남규방가사로 험난한 망명생활 등을 표현하였다. 사선을 넘는 와중에도 ‘해도교거사’, ‘정화가’, ‘정화답가’, ‘조선별서’, ‘간운사’ 등 주옥같은 가사를 남겼다. 지사는 ‘간운사’에서 독립운동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아쉬움을 토로하였다. “이 몸이 남자라면 세계 각국 두루 놀아 천하 사업 다할 것을 무용(無用)한 여자라 애달프다’라고 읊었다. 시대적인 제약으로 직접 독립운동에 나서지 못하는 자신을 책망하는 구절이기도 하다. 반면 독립운동은 자신 스스로가 헤쳐 나가야 할 사회적인 책무임을 강하게 암시한다. 


슬프다 우리 한국

이 좋은 호강산을

헌신같이 버리고서

그 어디로 가잔 말고

곡이야 천운이여

강산아 잘 있거라

다시 와서 반기리라. 


김우락 「해도교거사(海島僑居辭)」 중


일가는 99칸 대저택인 임청각 등 재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 등을 세워 조국 독립에 온몸을 내던졌다. 그런 만큼 김우락의 삶이 평탄했을 리가 없다. 아들 이준형은 만주와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다 자결하였다. 손자 이병화는 만주에서 무장투쟁에 힘썼다. 독립운동가의 여동생이자 부인, 어머니이자 할머니로서 인생 여정은 항상 긴장된 나날이었다. 남성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은 이처럼 후방기지 역할을 한 공동체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독립운동을 위해 독립운동 자금은 물론 먹고사는 문제와 같은 사소한 일상사를 도맡아 하는 사람도 필요했다. 모든 역할을 여성들이 해냈다.김우락은 결혼 후 남편·아들·손자·손부며느리 등 일가친척이 모두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상황을 맞았다. 군자금을 마련하고 연락책이 되기를 자원한 다른 독립운동가처럼 의복을 만들고 회합 장소를 제공하는 믿음직한 지원자였다. 배고픔을 이겨내면서 남편의 독립운동을 지원한 여성들의 헌신은 조력자 차원을 넘어 동지이자 동반자로서 길이었다.

김우락은 1932년 6월에 남편이 지린성에서 숨지자 남편을 만주 땅에 묻고 가족들과 고국으로 돌아왔다. 꿈에도 그리던 고국에서 이듬해 4월에 81세의 일기로 한 많은 삶의 대단원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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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학사 취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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