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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전반기 한민족의 

항일무장투쟁-독립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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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장세윤(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


2020년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일명 청산리독립전쟁, 청산리대첩)로 대표되는 ‘독립전쟁’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연구는 이제 시작이라고 할 만큼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 1910년 전후부터 독립사상의 큰 조류는 일제와의 독립전쟁을 전개하여 일제를 몰아내고 민족의 해방과 나라의 독립을 회복해야 한다는 ‘독립전쟁론’이었다. 이에 ‘독립전쟁’ 101주년을 맞이하는 시점에 20세기 전반에 전개되었던 한민족의 항일무장투쟁, 독립전쟁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항일무장투쟁의 주요 흐름과 단체

1910년대 일제의 한국 지배는 무력 수단을 동원한 폭압적 무단통치 방식이었다. 한민족의 구국운동인 의병전쟁(1895~1910)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데 성공한 일제는 강점 직전인 1910년 8월 25일 「집회 취체(取締)에 관한 건」을 공포하여 한민족의 기본권을 완전히 부정하였다. 이 시기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을 대표하는 것은 토지조사사업이었는데, 이는 한국을 식민지 지배체제로 전환시키기 위한 총력적 침략정책이었다.

한편 1910년 12월 이른바 ‘안악사건’과 1911년 1월 ‘데라우치 조선총독 암살 미수사건’ 등을 조작하며 독립운동을 탄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폭압적 무단통치에도 국내외에서 한민족의 독립운동은 계속되었다. 독립운동의 체제 정비와 만주(중국 동북지방)와 러시아 극동 연해주 등에서 해외 독립군기지 개척운동이 전개되었고, 일제강점기 최대의 독립운동인 3·1운동으로 결실을 맺었다. 또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1920년대 일제의 식민지 통치는 한민족의 계층 분화를 촉진하고 민족 내부의 갈등을 증폭시켰다. 특히 1920년 6월과 10월에 중국 연변지역(북간도)에서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등 ‘독립전쟁’이 전개되었다. 또 만주 지린에서 김원봉 등의 의열단이 창립되어 1930년대 중반까지 국내외에서 치열한 의열투쟁(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1920년대 중후반 사회주의 사상이 확산되고, 계급적으로 각성한 노동자·농민들이 민족해방운동의 주체로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써 다양한 이념과 방법론에 따라 독립운동의 대중적 전선 확대와 적극적 대일항쟁이 전개되었다. 한편 1920년대 중반부터는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사이에 협동전선 구축을 위한 노력이 나타났는데, 민족유일당운동과 신간회운동이 그 사례이다. 1929년 11월에는 전국적 항일운동인 광주학생독립운동이 발발하였다. 1930년대 일제의 식민지 통치방식의 변화, 즉 군국주의적 지배의 강화와 중국 동북지방 침략은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일제의 만주 침략으로 이 지역에서 한국인들이 중국인들과 함께 힘을 합쳐 일본의 침략에 항거하게 되었다. 민족주의 계열의 한국독립군과 조선혁명군, 중국공산당 계열의 동북항일연합군 내 한인들의 활동이 바로 대표적 사례이다.

그러나 1932년 초 일제의 조종을 받는 ‘만주국’ 성립 이후 만주지방에서는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면서 이곳에서 활동하던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본토(관내 지방)로 이동하게 되었다. 또한 1932년 상하이에서의 윤봉길 의거는 침체된 중국 관내 지방 독립운동을 활성화하는 계기가 되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고난의 유랑길에 올랐다. 국내에서는 신간회 해체 이후 독립운동의 중심이 학생운동과 노동자·농민운동으로 계승되었으며, 적색 노농조합운동이 격화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을 도발한 일제는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하여 전시동원체제로 돌입하고, 전시 수탈을 강화하였다. 이 시기 황민화 정책은 1944년 징병제 실시 이후 절정에 달했다. 이러한 일제의 전쟁 동원과 극심한 탄압으로 한국인들은 매우 큰 고통을 겪어야 했으며, 고유의 전통과 정신문화를 유린당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한민족은 중국과 러시아 연해주, 미주지역 등에서 독립운동을 끈질기게 지속하여 결국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및 일본의 패망과 함께 독립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 무렵 활동했던 주요 독립운동 세력은 중국 본토의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 중국공산당과 함께 활동했던 화북조선독립동맹, 러시아 연해주의 동북항일연군 교도려(소련 적군 제88여단) 내 한인들, 국내의 조선건국동맹 등이 있었다. 이들 조직은 나름대로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한민족의 독립과 무장투쟁, 근대적 민족국가 수립을 구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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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독립군 홍범도 유고문(1919. 11.)

독립전쟁의 의미와 시사점

독립운동이란 식민지 상태로 전락한 식민지 피압박 약소민족이 자주국가의 수립과 자립경제의 실현을 위하여 제국주의 종주국의 지배와 침략 상태를 전복하기 위해 노력·투쟁하는 근대의 민족저항운동을 말한다. 독립운동은 피압박·피지배 약소민족이 현실에서 모순되고 있는 식민지 종주국의 지배와 침략, 수탈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개하는 다양한 형태의 저항운동을 총칭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모순에 찬 현실을 변혁하기 위한 현실변혁운동으로서의 조직적 무력투쟁은 물론, 여러 가지 사회운동이나 농민·노동·문화운동 등 다양한 대중운동이나 조직운동의 형태로 전개되기도 한다. 특히 무장투쟁은 가장 어려우면서도 가장 효과적인 독립운동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사적으로 볼 때 피압박 약소민족 스스로 독립운동을 통해서 독립한 나라는 18세기 말 이후에는 거의 없었다고 할 만큼 어려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은 세계 각지에서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하여 직·간접적으로 독립을 쟁취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과 의미가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시각은 하루빨리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 한국 사회에서 우리 선열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헌신하며 치열하게 앞장섰던 만주 독립전쟁이나 의열단의 무장투쟁 등에 관한 이야기는 과거의 기억으로 점차 잊혀가고 있는 것 같다. 어떤 면에서는 장엄하고 비장한, 어쩌면 슬프고도 아름다운 독립전쟁의 거대한 서사시, 한편의 멋진 대하드라마와 같은 ‘무궁무진한 이야기의 보고’가 희미해져가고 있는 것이다. 이 장대한 한편의 서사극에 등장한 영웅들이 있는가 하면, 아무런 이름도 명예도 가족도 남기지 못하고 이름 없이 스러져간 무명의 의사·열사·지사·용사들은 또 얼마나 많았는가? 우리는 잊힌 단체와 인물, 크고 작은 독립운동(사건), 특히 의인과 영웅, 열사, 지사들을 더 많이 찾아 알리고 기억하며 기념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엄청난 국제화와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자주와 독립, 그리고 주체적 관점과 실천의지의 소중한 가치를 재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도저히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되는 매우 어려운 조건을 무릅쓰고 결사 항전의 각오로 ‘무에서 유를 창조한 백절불굴의 투쟁정신과 독립정신’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소중한 가치와 삶의 자세로 귀중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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