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숨결

가을이 머무는 곳

강원도 정선

가을이 머무는 곳 강원도 정선



글·사진 임운석 여행작가


가을이 머무는 곳

강원도 정선


 




바람의 세미한 노랫소리를 들어보았는가? 바람에 나부끼는 형언할 수 없는 억새의 찬란한 몸짓을 보았는가? 정선은 첩첩산중 굽이굽이마다 아리랑의 운율이 함께 흐른다. 자동차도 힘겨워 ‘부릉부릉’ 용트림을 하듯 산 능선을 넘는다. 바람을 가르다 가도 어느 순간 바람과 함께 날아오른다. 무르익어가는 가을과 벗할 수 있는 곳. 주체할 수 없는 이끌림에 의해 가을이 머무는 곳, 정선 땅을 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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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둥산 정상부에 펼쳐진 억새평원의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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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사이 산책로를 걷는 것만으로도 충만한 가을을 느낄 수 있다



대한민국 억새 1번지, 민둥산


고속도로에서 빠져나온 지 1시간가량이 지났다. 그제야 비로소 민둥산 들머리에 닿을 수 있었다. 그나마 길이 좋은 요즘이니 1시간이지 호랑이 담배 피우던 그 시절이라면 ‘세월아 네월아’ 걷고 또 걸어야 도착했을 법하다. 도로가 지금처럼 구석구석 놓이지 않았을 때 정선은 강원도의 대표적인 오지였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달리다 보면 자동차 핸들 꺾는 재미가 있다. 첩첩산중 정선 여행의 묘미다.
정선의 대표적인 민요인 정선아리랑이 불리기 시작한 것은 고려 왕조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하던 때다. 고려왕조를 섬기던 정치 세력이 조선 개국 세력에 밀려 정선으로 숨어든 것이다. 그들은 지난날의 권력을 회상하며 가족과 고향을 그리워한 심정을 한시로 읊었는데 그것이 정선아리랑의 노랫말이 되었다 한다. 노랫말에 지은이의 심정이 묻어 있다.


타관객리 외로이 난사람 괄세를 마라
옛일을 추억하고 시름없이 있노라니
눈앞에 왼갖 것이 모두 시름뿐이라


어느덧 민둥산(1,117m) 들머리인 증산초등학교 앞에 도착한다.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민둥산의 옛 이름은 ‘한치뒷산’이다. 정선아리랑에도 ‘한치뒷산’이 등장한다. 정선군 남면에 한치마을이 있는데 마을 뒷산이 민둥산이었다. 그래서 한치뒷산이라 불렀다.
민둥산 등산을 위해서는 왕복 9km를 4시간 정도 쉼 없이 걸어야 한다. 짧은 코스는 아니지만 등산로가 잘 놓여 있어 무난하다. 무엇보다 억새를 벗 삼아 걷기 때문에 고되거나 길게 느껴지지 않는다. 2019년 민둥산억새꽃축제는 11월 10일까지 민둥산 일원에서 열린다.
민둥산 통제소를 지나 갈림길 앞에 등산객을 맞이하듯 쉼터가 기다리고 있다.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나무 벤치에 앉는다. 산뜻한 가을 공기 맛이 예사롭지 않다. 자세를 가다듬고 깊이 숨을 들이쉰다. 맑은 공기 속에 생명의 기운이 담긴 것일까, 온몸이 후끈하다. 도시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깨끗한 공기.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몸이 먼저 느끼는 것을 보면 몸은 자연을 향해있는 듯하다.
산길을 걷는 동안 거미줄처럼 엉켰던 몸과 마음이 질서정연하게 교통정리를 시작한다. 왜 현대인들이 갈급한 마음으로 산을 찾는지 이유를 알법하다. 생명 안에 답이 있음을 알기에 생명의 근원을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닐까. 정상부까지 등산로가 잘 놓여 있어 평소에 잊고 살았던 삶의 파편들을 한 조각씩 모으고 정리하기 그만이다. 걷기 좋은 만큼 가족 단위 탐방객들이 많이 눈에 띈다. 초등학생 꼬마부터 할머니까지,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며 산길을 걷는 모습이 정겹다. 40분 정도 오르자 바람결이 강하다. 주위는 막힘이 없다. 하늘을 가리고 있던 울창한 숲길이 끝난 것이다. 덕분에 파란 하늘을 마주한다. 곧이어 정상부에 도착한다. 정상에는 새로운 세상이 기다리고 있다. 거친 숨을 토하며 자박자박 걸어오는 등산객들을 어머니처럼 넉넉한 품으로 맞아준다. 그리고 그들을 품는다.
민둥산은 대한민국 억새 1번지임에 분명하다. 산 전체가 온통 억새로 뒤덮여 억새의 향연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단풍이 뇌쇄적인 색채의 아름다움이라면 억새는 바람과 함께 상처 난 곳을 매만져주는 어머니의 손길처럼 아늑하다. 화려하게 치장한 미인은 아니지만 청초한 민낯처럼 순수하다. 산 전체가 은빛 억새로 화사하게 변할 때 바람과 함께 춤이라도 춘다면, 지나친 상상일까. 그런들 어떠랴. 민둥산 억새가 이미 내 마음속에 들어온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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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섬을 향해 날고 있는 짚와이어 체험자들

  





아찔함의 최고봉 정선아리힐스 짚라인


짚와이어는 패러글라이딩처럼 하늘을 난다는 점과 번지점프처럼 줄에 매달려 뛰어내린다는 점이 비슷하다. 무엇보다 안전성이 보장되어 키 134cm 이상이면 누구나 도전해 볼 수 있다는 것이 최대 장점이다. 덕분에 정선에서 꼭 체험해볼 만한 액티비티로 인기를 얻고 있다. 짚와이어 체험을 하려면 출발지점인 병방산 정상에 위치한 아리힐스를 찾아야 한다. 이곳에는 짚와이어 외에도 ‘하늘을 걷는다’는 뜻의 스카이워크가 설치되어 있다. 583m의 절벽 끝에 길이 11m의 U자형 철골 투명 유리 구조물을 벼랑 밖으로 돌출 시켜 놓았다. 바닥은 투명 안전유리로 마감했다. 유리를 밟고 서면 발아래에 낭떠러지가 내려다보인다. 아찔하다. 태곳적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듯한 밤섬과 그것을 휘감아 도는 동강이 흐른다.

스카이워크보다 더 높은 곳에 짚와이어 체험장이 있다. 우선 높이에 압도당한다. 아래 착지점까지 325.5m,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설치된 짚와이어다. 바람을 막아주는 시설이 없다 보니 체감 높이는 더 높게 느껴진다. 출발대에 올라 안전장비를 착용하면 극도의 긴장감이 찾아온다. 아찔한 높이에서 외줄에 의지한 채 날아갈 생각에 오금이 저리고 머릿속이 흰 도화지처럼 하얗게 변한다. 드디어 낙하할 준비가 끝났다. ‘출발’ 구호와 함께 체험자가 비명을 지른다. 그리곤 공중에 매달린다. 비명은 메아리가 되어 병방산 주변을 공허하게 맴돈다. 순간적으로 유체이탈이라도 경험한 듯 정신이 몽롱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 숨 막히는 긴장감은 출발 순간에 최고점을 찍는다. 이후부터는 하늘을 나는 특별한 체험 시간이다. 한 마리 새가 된 기분이다. 한반도를 닮은 밤섬이 목젖처럼 대롱대롱 매달린 것처럼 보인다. 개미보다 작게만 느껴졌던 사람들이 조금씩 커지면서 체험은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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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들녘을 달리는 레일바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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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치의 꿈 카페와 어름치 카페를 오가는 풍경열차



레일을 따라 달리며 느끼는 정선의 진수


레일바이크는 폐철로를 달리며 정선의 아름다움을 오롯이 즐길 수 있는 여행이다. 정선에선 필수 여행 코스로 통한다. 우리나라 곳곳에 레일바이크가 운영되고 있지만, 그 원조는 정선이다. 구절리역에서 아우라지역까지 7.2km를 시속 15~30km의 속도로 운행한다. 가을옷으로 한껏 멋을 낸 정선의 산과 들녘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동강을 따라 이어진 철길은 평온함과 아찔함이 반복된다.

바이크가 ‘싱싱싱’ 바람을 가른다. 속도감에 기분마저 상쾌하다. 힘껏 페달을 밟자 다리에 묵직한 힘이 전달된다. 그때쯤 어두운 터널로 빨려든다. 음산한 기운이 몸을 덮치지만 잠시 후 화려한 조명이 눈에 들어온다. 별천지가 따로 없다. 터널엔 천연 에코(echo) 음향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정선아아아아~ 사랑해해해해’하며 목청 놓아 사랑을 고백하는 연인도 있고, 구성진 정선아리랑을 멋들어지게 한가락씩 뽑아내는 어르신도 있다. 어떤 소리든 누구의 말이든 소리의 끝자락은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온다. 터널을 벗어나자 화려한 조명 쇼도 막을 내린다. 이후부터는 힘들이지 않아도 손쉽게 달릴 수 있는 내리막 구간이다. 다리가 가벼우니 몸도 한결 수월하다.

1시간 남짓 힘차게 페달을 밟다 보니 다리가 무겁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마음은 한결 가볍다.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아우라지역에 도착한다. 출발한 곳으로 되돌아가려면 풍경열차를 이용하면 된다.

레일바이크는 인터넷으로 예약해야 기다리지 않고 바로 탑승할 수 있다. 출발역에는 ‘여치의 꿈’ 카페가 도착역에는 ‘어름치 카페’가 운영 중이다.

정선엔 먹거리도 풍성하다. 토속음식을 맛보고 싶다면 정선 5일장을 찾아보길 권한다. 잎사귀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마치 술 취한 사람이 좌우로 흔들리는 것처럼 보인다 하여 이름 붙여진 곤드레나물을 비롯해 각종 산나물이 시장 골목마다 가득하다. ‘후루룩’ 빨리 먹다가 콧등을 쳤다는 콧등치기 국수, 올챙이를 꼭 닮은 올챙이국수, 구수한 메밀전과 수수부꾸미도 맛나다. 2일, 7일에 장이 서면 정선아리랑 공연을 비롯해 볼거리도 많다. 상설시장도 함께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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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사람들의 애환이 깃든 곤드레 나물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