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만든 사람

겨레의 정신과 생명
우리말을 지킨 최현배

겨레의 정신과 생명<BR />우리말을 지킨 최현배


글 임영대 역사작가


겨레의 정신과 생명

우리말을 지킨 최현배




최현배는 1894년 경상남도 울산에서 태어났다. 서울 한성고등학교,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 교토제국대학 및 동 대학교 대학원을 거쳐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하였으나 흥업구락부 사건과 조선어학회 사건을 겪으면서 해임, 투옥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문교부 편수국장, 연희대학교 교수, 한글학회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교과서 제정과 한글 전용 운동 등에 진력하였다.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수여 하였으며 1970년에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alt

최현배

1894.10.19.~1970.03.23.

경상남도 울산건국훈장 독립장(1962)



  

등 뒤엔 반만년 역사를 지고,

앞에는 무궁한 장래를 가진 조선겨레의 한 사람으로서


1910년대에 일본 유학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최현배는 그 어려운 일본 유학을 관비로 다녀왔고, 일본 최고의 명문대학인 교토제국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여 대학원까지 졸업했다. 이만한 학력이면 일본에서도 최상위 지식인에 해당했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최현배는 갓 설립된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의 교수로 취임했다. 최현배가 담당한 강의 과목은 철학과 조선어였다. 이는 한성고등학교 재학 시절 주시경이 직접 운영하던 조선어학강습원을 다니면서 국어학과 문법을 이수한 데서 비롯되었다.
제국대학 유학생 출신에 교수까지 되었으니 얼마든지 일본에 협력하면서 평안한 삶을 누릴 수 있었지만, 최현배는 우리말과 글을 지키는 힘든 길을 자처했다.


말은 그 겨레의 정신이요 생명이라, 정신이 없는 몸뚱이가 살아갈 수 없으며, 흥해갈 수 없음도, 또한 당연의 사세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는 말이 쇠함을 따라 그 임자인 겨레가 쇠하며, 말이 망함을 따라 그 임자인 겨레가 또한 망함을 나타내는 실례가 없지 아니하니, 만주 말과 만주 겨레가 곧 그것이다.


주시경에게 우리말을 지켜야 할 이유를 배운 최현배를 비롯한 제자들은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일제가 3·1운동의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시작한 이른바 ‘문화통치’를 계기로, 이들은 본격적인 한글 운동을 전개하였다.



우리말에 조선심이 있고, 조선혼이 있다


한글운동의 시초는 1921년에 문을 연 ‘조선어연구회’였다. 최현배는 귀국 직후인 1926년부터 이 모임에 참여하였고, 1929년에는 조선어사전 편찬위원회 준비위원과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1930년에는 연구회 간사로도 선정되었다. 다음 해에 조선어연구회는 조선어학회로 개명한다. 이후 최현배는 적극적으로 우리말의 체계화와 이를 통한 민족의식의 고취에 주력했다. 언어는 곧 민족의 상징이며, 자신의 말을 가지고 있는 한 민족은 절대로 소멸하지 않는다는 게 그의 신념이었다.


혈통·생활 근거지·언어·민족 특질·역사가 다르기 때문에 민족의 구별이 생긴 것이며, 민족이 소멸할 이(理)가 없다.


이 시기 최현배는 정력적인 집필활동을 펼쳤다. 동래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잠시 재직하던 1920년부터 짓기 시작한 『우리말본』(1929)을 정리하여 낸 것을 시작으로, 『중등 조선말본』(1934), 『한글의 바른 길』(1937) 등이 그 결과물이다.
이게 전부가 아니다. 최현배는 1931년부터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심의위원을 맡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1935년부터는 조선어 표준말 사정위원 및 수정위원으로도 활동했다.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하는 회의가 총 123회에 걸쳐 열렸고, 433시간이 소요되었는데, 최현배는 이렇게 많은 회의에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슬프게도 최현배와 조선어학회가 우리말에 숨을 불어넣던 시기는 일제가 허울뿐인 문화통치를 폐기하고 ‘조선어’와 ‘조선 민족’을 말살하는 민족말살정책을 본격화하면서 끝이 났다. 일제는 최현배를 비롯한 조선어학회에서 활동하는 학자들이 ‘조선어 교육을 통해 독립의식을 고취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총 33인에 달하는 학자들을 투옥했다. 이것이 바로 1942년에 벌어진 ‘조선어학회 사건’이다.
최현배는 다른 독립운동 사건인 흥업구락부 사건에 연루된 탓에 1938년에 이미 연희전문학교 교수 자리를 내려놓은 상태였다. 여기에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으면서 해방이 되는 날까지 갇혀 있게 된다.
해방이 오자 우리말을 살리려는 최현배의 움직임에도 자유가 왔다. 조선어학회는 한글학회가 되었고, 최현배는 미군정청 편수국장이 되어 국어 교과서 제작 관련 행정을 담당하였다. 전쟁 때문에 정부가 부산으로 피난 갔을 때도 문교부(교육부) 편수국장을 맡았다. 최현배의 연구 성과가 교과서 제작에만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한글을 로마자로 표기하는 법, 외래어를 한글로 표기하는 법도 모두 최현배의 이론을 따랐다.
전쟁이 끝나고 연희대학교(연세대학교) 교수로 복직한 뒤에도 한글을 위한 최현배의 노력은 끝나지 않았다. 1953년에 한글학회 이사장을 맡아 1970년에 사망할 때까지 중심을 지켰으며, 가로쓰기 체계를 확립하고 일본어 잔재를 청산하면서 우리말을 되찾는 데 공헌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우리말을 사용할 수 있는 데는 세종대왕 못지않게 최현배의 역할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