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독립운동가의 초상

지식의 힘으로
독립을 이루고자

지식의 힘으로<BR />독립을 이루고자


    

글 김정인 춘천교육대학교 교수


지식의 힘으로

독립을 이루고자




독립을 위해선 군인과 무력만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교육자는 미래 독립 세대를 양성하려는 염원으로 큰 배움을 위한 대학을 만들고자 했다. 언론인들은 조선총독부의 언론 탄압을 고발하며 식민지배의 부당함에 항거했다. 조선총독부는 무엇보다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빚어내는 말과 글을 지키려 한 국어학자들을 두려워했다. 결국 조선총독부는 조선어학회 사건을 조작해 그들을 탄압했다. 지식인들도 펜을 들고 단체를 조직하고 집회를 열어 식민지배에 저항하며 독립을 꿈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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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립대학기성회 창립총회 기념사진 (1923.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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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제국대학(1924)



민립대학기성회: 큰 배움이 독립의 힘이다


1919년에 부임한 사이토 총독은 1922년 2월 「조선교육령」을 개정했다. 여기에는 대학 설립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큰 배움이 독립의 힘이 될 거라 생각한 지식인들은 조선교육령 개정이 기정사실화되자 곧바로 민립대학설립운동에 들어갔다.

조선교육협회 주도로 이상재를 비롯한 각계 인사 47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해 조선민립대학기성준비회를 조직했다. 1922년 3월 29일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창립총회가 열릴 때까지 서울을 비롯한 전국 170여 군에서 1,000여 명의 유지들이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설립계획서’에 따르면 조선민립대학기성회가 추진한 민립대학은 종합대학을 지향했다. 처음에는 400만 원을 모금해 법과, 문과, 경제과, 이과 등 4개 학과와 대학예과를 개설할 예정이었다. 다음으로 300만 원을 모금해 공과를, 다시 300만 원을 모금해 의과와 농과를 설치하고자 했다.

이상재를 위원장으로 선출한 조선민립대학기성회는 1,000만 원 모금을 목표로 ‘한민족 1,000만이 한 사람에 2원씩’이라는 구호를 내세웠다. 그런데 기금을 바로 내는 것이 아니라 먼저 문서로 약정을 하는 방식이라 실제 돈을 모으는 일은 쉽지 않았다. 게다가 1923년 여름에는 물난리가 났고, 가을에는 일본의 간토(關東) 대지진의 여파로 인한 경제공황이 닥쳤다. 이듬해에도 남부 지방은 가뭄을, 북부 지방은 홍수를 겪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금 모금을 추진하기 어려웠다. 여기에 조선총독부 당국이 기금 출연자에 대한 협박과 감시에 나서면서 민립대학 설립운동은 기세가 꺾이고 말았다. 조선총독부는 민립대학설립운동에 자극받아 관립대학인 경성제국대학의 문을 서둘러 열었다. 이로써 해방이 될 때까지 조선에 대학은 단 하나, 경성제국대학만이 존립했고 우리 손으로 대학을 세워 지식인을 길러내고자 한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언론집회압박탄핵회: 자유를 위한 연대


조선총독부는 한글 신문과 잡지를 엄격히 검열하고 통제했다. 더 나아가 언론인 탄압도 불사했다. 1922년 8월 마루야마 쓰루키치(丸山鶴吉) 경무국장은 언론사 대표들을 소집해 불온한 언론에 대해서는 사법처리하겠다고 경고했다. 얼마 후 잡지 『신생활』과 『신천지』를 만드는 언론인들이 사회주의 사상과 반일사상을 고취했다는 이유로 검거되어 재판을 받았다. 명백한 언론 탄압에 언론인들은 펜을 들어 ‘문화가 발달한 곳에서는 언론이 존중되고 문화가 유치하면 언론을 학대한다’며 조선총독부가 내세우는 ‘문화정치’의 기만성을 폭로했다.  
1922년의 『신생활』과 『신천지』 필화사건에 이어 1924년에는 조선총독부와 언론인들이 정면충돌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해 4월 박춘금이 주도하는 친일단체 각파유지연맹이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와 이사인 김성수를 협박한 일이 벌어졌다. 조선총독부는 각파유지연맹을 비호했다. 이어 각파유지연맹이 일본으로 건너가려는 노동자들에게 돈을 갈취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조선노농총동맹과 조선청년총동맹은 이를 규탄하는 집회를 열고자 했으나 조선총독부가 이번에도 금지시켰다. 이에 분노한 언론인들은 노동운동, 청년운동 지도자들과 함께 언론과 집회의 자유를 주장하며 연대했다. 
마침내 1924년 6월 7일 언론인은 물론 청년단체·노동단체·여성단체·교육단체·형평단체 등 31개 단체 대표 100여 명이 연대해 언론집회압박탄핵회(이하, 탄핵회)를 결성하고 조선총독부의 언론과 집회 탄압에 “적극적으로 항거”할 것을 결의했다. 탄핵회는 다음날 곧바로 5명의 탄핵실행조사위원을 선정하고 언론 및 집회 관련 압박에 대한 실태 조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실태 조사를 바탕으로 6월 20일 천도교당에서 언론집회압박탄핵대회를 갖고자 했다. 경찰은 또다시 집회 금지를 통보했고 이 사실을 모르고 대회장에 몰려온 사람들은 거세게 항의했다. 탄핵회는 6월 28일 대표자 회의를 열어 언론 및 집회에 대한 압박사례 실태 조사 결과를 보고받고 국내외에서 7월 20일을 기해 일제히 언론 집회 압박을 탄핵하기 위한 연설회와 시위를 벌일 것을 결정했다. 그날 다음과 같은 결의문이 채택되었다.  


언론은 생존의 표현이요 집회는 그 충동이라. 우리의 생명이 여기에 있고, 우리의 향상이 여기에 있다. 만일 우리의 언론과 집회를 압박하는 자 있다 하면 그것은 우리의 생존권을 박해하는 자이다. 현하의 조선총독부는 직접적으로 우리의 언론을 압박하며 집회를 억제한다. 그러므로 우리 민중은 우리의 생존을 위하여 당국의 이러한 횡포를 탄핵한다.


하지만 7월 20일 연설회 및 시위 역시 경찰의 금지로 무산되었다. 이처럼 언론인들은 조선총독부의 최우선 감시대상인 지식인들이었다. 하지만 언론인들은 펜으로 저항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회운동 세력과 연대해 언론과 집회의 자유를 요구하는 행동을 감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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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학회 사건 수난자 동지회(1949.06.12.)

     



조선어학회 사건: 말과 글의 힘을 두려워한 식민권력


우리의 말과 글을 스스로 지켜내야 했던 식민지 지배하에서 1921년 국어를 연구할 목적으로 장지영, 김윤경, 이윤재, 이극로, 최현배, 이병기 등이 조선어연구회를 창립했다. 조선어연구회는 1927년부터 기관지인 『한글』을 발간했고, 1929년부터는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를 조직하여 사전 편찬을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1931년에는 이름을 조선어학회로 바꾸었으며 1933년에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했다.

중일전쟁에 이어 아시아태평양전쟁이 일어날 무렵 조선총독부는 황국신민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인을 일본화하는 교육을 강제했다. 그들에게 우리말을 닦고 가다듬는 조선어학회는 눈엣가시였다. 1942년 9월 5일 함경남도 함흥에 자리한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 정태진이 검거된 사건을 계기로 조선총독부는 조선어학회 사건을 조작했다. 함경남도 홍원경찰서는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여학생의 일기장에서 “국어를 상용하는 자를 처벌했다”는 구절을 발견하고 이는 곧 일본어를 쓰면 처벌한다는 뜻이라며 반국가행위로 몰아갔다. 이 과정에서 한때 이 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조선어사전 편찬 작업을 하던 정태진이 걸려들었다. 홍원경찰서는 정태진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해 고문을 가했다. 결국 강요에 못 이긴 정태진은 그들 요구대로 자백서를 썼다. 이 허위자백을 토대로 홍원경찰서는 조선어학회 관련자 검거에 나섰다. 33명이 체포되어 그중 29명이 구속되었다.

조선어학회 관련자들은 처음부터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치안유지법 위반 증거가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홍원경찰서는 사회 명망가들을 일망타진하여 체포한 만큼 성과를 내야 했다. 홍원경찰서에는 농민조합사건을 다루며 무자비한 고문으로 여러 청년을 죽음으로 몰아가서, 사람 백정으로 불리던 형사들이 있었다. 이들은 4개월 동안 고문을 자행했다. 강요에 의한 허위자백의 내용이 제각각이니 고문은 계속되었다. 1년이 지난 1943년 9월 검찰은 16명을 “겉으로는 문화운동의 가면을 쓰고 조선 독립을 목적한 실력배양 단체”에서 활동했다는 이유로 치안유지법과 내란죄 위반으로 예심에 회부했다. 예심이 종료된 것은 1944년 9월 30일로 체포로부터 2년 가까운 시일이 걸렸다. 그동안 이윤재와 한징이 옥사했다. 1944년 12월 21일부터 1945년 1월 16일까지 진행된 재판의 결과 장현식을 제외하고는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 중 6명은 집행유예로 석방되었고, 실형을 언도받은 사람들은 고등법원에 상고했으나 해방 이틀 전인 1945년 8월 13일에 기각되었다. 결국 그들은 독립이 되고서야 감옥 밖 햇볕을 쬘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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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맞춤법 통일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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