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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거와

파시즘의 시대

윤봉길 의거와 파시즘의 시대



글 강응천 기획집단 문사철 대표, 역사저술가


윤봉길 의거와

파시즘의 시대




1930년대는 대공황과 함께 시작됐다. 경제 대공황은 정치와 사회의 공황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유럽에서는 인권과 민주주의를 통째로 부정하는 무시무시한 정치 세력이 등장했다.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는 국수주의와 인종주의를 정면으로 내걸었고, 독일 나치스도 전쟁 배상금에 지친 국민을 유혹하기 시작했다. 아시아에는 일본 군국주의의 그림자가 점점 더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은 국공합작이 깨진 뒤 사활을 건 대결을 벌이고 있었지만, 다가오는 일본군 앞에서는 더 이상 그럴 여유가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중국을 무대로 펼쳐지던 한국의 독립운동 세력도 풍전등화의 처지로 몰렸다. 바로 그때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항일 의지를 재확인하는 폭탄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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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공원 폭탄투척 의거 대판조일신문 호외(1932.04.29.)

  





일제를 폭파시킨 한국 청년


1932년 4월 29일 오전 11시 50분경, 20대 청년 윤봉길이 중국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열린 일본 천황 생일과 전승을 축하하는 기념식장에 폭탄을 투척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기념식장에 일본 국가가 울려 퍼지는 순간 윤봉길이 단상을 향해 물통 폭탄을 던지면서 중국 주둔 일본군 총사령관인 시라카와 대장과 상하이 일본인 거류단장 가와바타가 즉사하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제9사단장 우에다 등 일본인 10여 명이 다쳤다. 사건 직후 윤봉길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윤봉길은 1931년 김구가 상하이에서 조직한 한인애국단 소속이었다. 1932년 1월에는 역시 한인애국단 소속의 이봉창이 도쿄에서 천황을 향해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로 끝났다. 당시 중국 언론은 이봉창의 거사실패에 아쉬움을 표했다. 일본은 이를 구실삼아 무력으로 상하이를 점령한 다음 훙커우공원에서 기념식을 진행하다 윤봉길의 폭탄을 받았던 것이다.
일본의 만주와 상하이 침략으로 일본에 적대감을 갖고 있던 중국 언론은 윤봉길의 의거에 일제히 환호를 보냈다. 중국국민당의 지도자 장제스는 중국의 4억 인구가 하지 못한 일을 한국 청년 한 명이 해냈다며 한국에 대한 연대와 지지를 표명했다.
일본이 만주를 무력 점령해 허수아비인 만주국을 수립한 것은 대공황 위기를 대륙 침략으로 타개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한 일본의 야욕에 맞서 중국인과 한국인의 연대 투쟁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상황에서 윤봉길 의거가 갖는 의미는 매우 컸다. 장제스의 말처럼 이후 일본에 맞서는 중국인과 한국인의 연대 투쟁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파시즘이란 무엇인가


독일의 나치즘, 일본의 군국주의 같은 전체주의의 원조는 이탈리아의 파시즘이었다. 이탈리아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 프랑스, 미국의 연합군 편에 가담해 참전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이탈리아에 떨어진 승전의 결과물은 미미했다. 거기에 경기 불황이 닥치자 점차 국민의 불만이 쌓여 갔다. 바로 그때 무솔리니라는 정치인이 나타나 국민들에게 부강했던 옛 로마의 추억을 자극하며 선동 정치를 시작했다. 1922년 10월 검은셔츠단을 이끌고 로마로 진군해 수상 자리에 오른 무솔리니는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을 무력으로 탄압하고 전체주의 통치를 시작했다. 무솔리니 세력을 가리키는 파시스트는 ‘묶음’을 뜻하는 ‘파쇼’라는 말에서 왔다.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진 사회 계층을 하나로 묶는다는 전체주의 이념을 잘 표현하는 말이다.
파시스트의 진가는 1923년 토리노의 노동운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다. 피아트 자동차 공장을 비롯해 30여 개의 대기업이 밀집해 있는 토리노의 노동자들은 부도덕한 자본가들을 몰아내고 자신들이 공장을 직접 경영하겠다고 나섰다. 피아트에서는 실제로 노동자들이 스스로 경영하며 자체 생산을 시작하기도 했다. 그러자 기업가들과 중산층은 급진적인 노동운동에 맞서 무솔리니의 선동에 귀 기울이게 되었다. 바로 그때 무솔리니 수상의 지령을 받은 검은셔츠단이 피아트 공장을 습격해 노동자들을 닥치는 대로 끌어냈다.
이처럼 파시즘은 경기 불황에 대한 기업가와 중산층의 불안에 편승해 권력을 잡고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에 대한 공격으로 세력을 불려 나갔다. 파시즘의 민족주의적 선동 아래 인권과 민주주의는 설 자리를 잃어 갔다. 독일, 일본으로 퍼져 나간 파시즘이 유럽과 아시아를 향해 침략의 이빨을 드러내면서 인류는 그들과 생존을 건 싸움을 각오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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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경례를 하고 있는 히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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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독일 아우토반. 아우토반은 히틀러의 경제 부흥 계획 중 일부였다



나치의 등장과 유럽의 위기


독일판 파시스트인 나치스가 권력을 잡은 것은 1934년의 일이었다. 나치스의 지도자 히틀러는 1933년 독일 수상의 자리에 오른 뒤 얼마 안 돼 민주적인 바이마르공화국을 폐지했다. 그는 제3제국을 선언하고 스스로 총통 자리에 올라 강력한 독재 권력을 구축했다.

국가주의 정당인 나치스를 이끄는 히틀러가 총통에 취임하자 독일 국민은 열띤 환호를 보냈다. 히틀러는 세계대전 이후 독일이 국제사회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아왔다며 이를 바로잡겠다고 공언했다. 그뿐 아니라 1929년 미국 뉴욕에서 시작돼 전 세계를 덮친 경제대공황으로 허덕이고 있는 기업과 국민에게 신속한 경제 부흥을 약속해 열광적인 호응을 끌어냈다. 그는 군용 자동차와 탱크 등 중장비 군수공업에 집중적으로 투자해, 실업자를 흡수하고 국가 경제를 빠른 시일 안에 호황으로 이끌겠다고 장담했다. 또한 튼튼하고 값싼 국민차를 생산해 1가구당 1대씩 소유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약속으로 박탈감에 빠졌던 독일 국민의 기대를 부풀렸다. 히틀러가 비상대권을 부여받고 착공시킨 라이히스 아우토반(독일제국 자동차도로) 역시 히틀러 표 경제 부흥 계획의 중요한 일부였다. 히틀러는 이 건설 사업으로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 경제를 살린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거기에는 재군비를 앞두고 군대를 신속히 이동시킬 도로를 마련한다는 속셈도 있었다.

이 같은 국가 주도형 경제 부흥의 추진과 국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히틀러는 베르사유조약을 파기하고 재군비를 선언했다. 베르사유조약은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에 대해 엄격한 군비 제한을 규정하고 있었다. 나치스가 이를 정면으로 위배하고 나서면서 유럽은 또다시 대규모 전쟁에 휘말릴 수도 있는 위기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생학, 나치스 정책의 기반이 되다


배타적 인종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는 나치스의 집권은 유사 과학인 우생학을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히틀러는 1935년 9월 15일 뉘른베르크의 나치 전당대회에서 승인한 법률에 따라 유대인의 시민권을 박탈했다. 이 같은 정치적 광기에 편승해 인종주의 정책의 바탕이 되는 우생학도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우생학의 선구자는 19세기 영국 과학자 골턴이었다. 그는 『유전적 천재』(1869)에서 명사(名士)인 남성과 부유한 여성이 결혼하면 천부적 재능을 지닌 종족을 만들 수 있다고 제안했다. 이후 다윈의 진화론을 이용해 우생학에 과학의 외피를 씌운 사회진화론이 등장했다.
이러한 우생학은 20세기 초반부터 대부분 국가에서 공식 채택됐다. 특히 미국에서는 간질 환자, 저능아, 정신박약자의 결혼을 금지한 결혼규제법(1896), 범죄자와 정신병자에 대해 생식 기능을 제거하는 단종법(1907), 유럽인의 이민을 저지하기 위한 이민법(1924) 등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1926년에 설립된 미국 우생학회는 상류계급이 우월한 유전적 재능을 가졌기 때문에 부와 사회적 지위를 갖게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독일의 나치스는 바로 이러한 우생학을 근거로 인종위생연구소를 세워 유대인, 집시 등 소수 민족과 동성애자, 장애인 등을 격리하고 박해했다. 
이토록 반인륜적인 우생학이 주목받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유전이 인간의 사회적 행동을 결정한다고 전제하면, 하층민을 생물학적 열등자로 몰아 사회악의 모든 책임을 그들에게 전가해 상류층의 기득권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공황 이후 미국에서는 우생학의 근거가 흔들리고 있었다. 백인 상류층이 하류층 이민자들과 함께 공짜로 빵을 배급받으려는 상황에서 특정 인종이 생물학적으로 우월하다는 주장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 독일에서는 나치스의 비호를 받으며 우생학이 점점 더 영향력을 넓혀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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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스 정권 수립 이후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잇따른 지식인의 망명


나치스의 광기 어린 인종주의는 독일의 수많은 지식인을 나라 밖으로 내몰았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원리를 발견해 현대 과학의 신천지를 개척하고 1921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천재 과학자였다. 그가 1934년 독일을 떠났다. 과학 연구 때문이 아니라 출신 민족과 사회사상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은 유대인으로서 유대인 민족주의인 시오니즘을 지지해 왔다. 그런데 나치스 정권이 들어서 유대인을 박해하기 시작하자 독일을 떠나 미국의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교수로 취임해 통일장 이론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미국의 청신하고 개방적인 분위기는 그의 과학 연구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막스 호르크하이머는 1930년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에 사회연구소를 설립해 마르크스주의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결합한 사회 이론을 연구하던 젊은 사회학자였다. 그도 조국인 독일을 떠났다. 그는 유대인이 아니지만 그의 학문은 나치 독일과 화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를 모두 이단시하는 나치즘 때문에 호르크하이머는 정든 교정을 떠나 스위스로 이주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그도 아인슈타인처럼 미국에 정착했다. 호르크하이머의 학문적 동지인 헤르베르트 마르쿠제도 그를 좇아 스위스 제네바로 망명했다. 그들과 함께 이른바 프랑크푸르트학파를 형성하고 있던 테오도르 아도르노도 곧 나치스의 압박을 견뎌내지 못하고 조국을 등졌다. 그들은 몸으로 경험한 나치의 인종주의에 대한 깊은 성찰에다 개방적인 미국 사회학의 세례를 받아 새로운 사회 이론을 내놓게 된다.
나치스의 독일은 국수주의적인 정책으로 단시일 내에 국민의 지지를 이끌어내고 국력을 키우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바로 그와 같은 국수주의와 연결된 전체주의와 인종주의로 말미암아 최고의 두뇌들을 유출시킴으로써 다가오는 세계대전에서 패배할 이유를 스스로 만들어 가고 있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