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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사가시오

우리의 잊지 못할 기념물

사진 사가시오 우리의 잊지 못할 기념물



글 김경미 자료부 학예연구관


사진 사가시오우리의 잊지 못할 기념물


안중근 사진엽서


 


엽서는 근대의 새로운 통신수단으로 간편하고 값싸게 이용할 수 있어서 안부나 간단한 용건을 주고받는데 널리 사용됐다. 대중성과 실용성을 지닌 엽서에 사진이 덧붙여진 그림엽서는 그 시각적 효과에 의해 선전·홍보의 도구로 활용되고 상품성도 지녔다. 사진엽서는 1900년을 전후하여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하여, 관제엽서 뿐 아니라 개인이나 단체가 만든 엽서도 활발하게 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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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안중근 단지혈서 엽서

  




안중근 의거와 안중근 엽서의 성행


1910년 3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여순감옥에서 순국하자마자 안중근 사진의 상품적 가치를 감지한 일본인 사진업자들은 발 빠르게 안중근 사진엽서를 대량 제작하여 판매했다. 쇠사슬에 묶여 무릎을 꿇려 앉은 모습에 안중근을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범죄자’로 부각시킨 것이었다. 하지만 엽서를 사려는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몰려들자, 한국통감부는 급히 치안방해라 하여 판매를 금지했다.

이러한 안중근 사진엽서는 일본의 거물급 정치가를 처단한 안중근이 도대체 누구이며,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궁금증과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것이었다. 이후 안중근이 지키고자 했던 나라는 독립을 잃었지만, 안중근 의거와 그 정신을 명확한 이미지로 전달하기 위한 사진엽서가 만들어진다. 그 대표적인 것이 독립기념관에서 유일본으로 소장하고 있는 ‘안중근 단지혈서 엽서’(자료01)이다.

‘대한의사안중근공혈서(大韓義士安重根公血書)’라는 제목을 단 엽서의 한 가운데에는 ‘대한독립(大韓獨立)’ 4자를 혈서로 쓴 태극기가 있고, 그 옆에 단지동맹의 피로 쓴 글이라는 설명이 활자로 인쇄되어 있다. 태극기 아래에는 안중근이 의거에 사용한 권총과 단지한 손가락 사진이 있으며, 엽서의 네 귀에는 4종의 안중근 사진이 수록됐다. 이 엽서는 한 장의 화면에서, 안 의사가 나라를 지키기 위한 최후의 방법으로 의열활동을 선택하고 그 실천에 몸을 바치는 과정을 보여준다.

안중근은 1908년 7월 의병의 국내 진공작전에 실패한 후, 1909년 2월 연해주 연추 하리에서 동지 11명과 함께 왼손 무명지 첫마디를 잘라 단지동맹을 맺고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칠 것을 맹세했다. 이때의 혈서 태극기와 손가락은 안중근이 옥중에서 유언한 대로 동생 안정근이 동맹동지에게서 찾아 보관했다. 혈서 태극기는 이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창간된 『권업신문』의  1914년 8월 23일 자에 그 사진이 실렸으며, 사진은 엽서 속의 것과 같은 것이다.

이토를 처단하기 위해 하얼빈에 도착한 안중근은 1909년 10월 23일 아침에 우덕순, 유동하와 함께 중국인 사진관을 찾아 의거 결행 기념 촬영을 했다.자료02 엽서 왼쪽 위의 안중근 사진은 이 기념사진에서 잘라 낸 것이거나 같은 장소에서 같은 모습으로 촬영된 것으로, 의거 3일 전 몸을 바쳐 나라를 구하겠다는 안 의사의 결의를 상징한다.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경 안중근은 하얼빈역에 도착한 이토를 향해 의거를 행동에 옮겼다. 오른쪽 3발이 이토에게 명중했고, 수행원 세 사람이 왼쪽에서 각각 한 발씩 총을 맞았다. 이토는 폐를 관통한 두 발의 총알이 치명상이 되어 곧 절명했다. 엽서에 있는 ‘안 의사의 단총’ 사진은 재판에 제출된 증거품 사진(자료03) 중 맨 위의 것이다.

안중근은 바로 러시아 헌병에게 체포됐다. 엽서 오른쪽 위의 안중근 사진은 체포된 후 의거 결행 당시의 복장 그대로 촬영된 것이다. 겹코트를 입고 사냥꾼들이 쓰는 모양의 모자를 쓴 모습으로, 의거를 성공적으로 이루어낸 안 의사의 당당한 모습을 보여준다.

안중근은 하얼빈 일본총영사관에 인계됐고, 여순의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오른쪽 아래의 안중근 사진은 안응칠(安應七)이라는 명찰을 달고 단지한 손가락이 잘 보이도록 촬영된 것으로, 옥중에서 1개월 정도 지난 후의 모습이다. 왼쪽 아래의 안중근 사진은 옥중에서 돌담을 배경으로 의자에 앉은 자세로 촬영된 전신사진(자료04)의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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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안중근과 우덕순, 유동하의 의거 결행 기념사진(1909.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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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안중근 의거 시 사용된 권총

안 의사가 사용한 총은 32구경 7연발의 브라우닝 모델 1900(총기번호 262336)으로, 벨기에 총기회사인 파브리크 나시오날(FM)사가 존 브라우닝의 설계도에 따라 생산한 반자동식 권총이다. 가운데는 조도선의 총인 스미스 웨슨(S&W) 리볼버 모델이며, 아래는 우덕순의 총으로 안 의사의 것과 동일한 모델(총기번호 263975)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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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옥중에서 돌담을 배경으로 의자에 앉은 자세로 촬영한 모습





한국인에게 안중근 사진엽서가 갖는 의미


이와 같이 안 의사의 의거와 관련된 사진을 모아 만들어진 단지혈서 엽서를 누가 언제 제작했는지에 대한 정보는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혈서 태극기 사진이 실렸던 『권업신문』의 「만고의사 안중근전」 중에서 단지동맹의 날짜가 엽서 내용과 일치한다는 점, 다음에 소개할 ‘안중근 의사 5종 사진엽서’에 사용된 활자가 혈서 엽서의 것과 유사하다는 점 등을 볼 때, 안 의사의 순국 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한 안정근과 그곳의 독립운동가들이 중심이 되어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1913년 말과 1914년 초에 걸쳐 『권업신문』에는 「사진 사가시오, 우리의 잊지 못할 기념물」이라는 제목으로, 안중근이 하얼빈 정거장에서 이토를 죽일 때의 모양과 여순 옥중에서 유언하던 사실을 기록한 사진 등 4종의 엽서를 판매한다는 기사가 실렸다. 안중근 전기 간행 경비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블라디보스토크 일본총영사관을 통해 안중근 사진엽서 5종으로 외무성에 보고되었고, 그 실체는 관련 문서에 첨부된 이미지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자료05)

이 안중근 그림엽서 5종 세트와 거의 동일한 것으로, 같은 시기에 안정근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기부금을 모으기 위해 비매품으로 제작했다는 엽서 세트도 있다. 이 엽서는 자료05-2에서 안중근의 사진 아래에 안중근의 단총 사진이 추가된 점과 05-2와 05-3에 있는 설명 문구가 활자로 인쇄되면서 내용이 조금 간략해졌다는 차이만 있다. 이 엽서 세트는 1914년 1월 초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500매, 하와이에 300매가 보내졌다고 한다.

이러한 사진엽서가 제작·판매되었던 1913년 말과 1914년 초의 시점은 러일전쟁 10주년을 맞이하여 러시아에서는 일본에 대한 복수심이 절정에 달하여 다시 개전할 조짐이 있던 때였다.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은 이러한 분위기를 이용하여 독립전쟁을 준비하며 군자금을 모집하고자 했다. 안중근 사진엽서는 안중근 의거의 현장과 죽음을 앞둔 안 의사의 결연한 모습을 보여주며, 나라를 잃고 해외를 떠돌아야 했던 한인들에게 조국독립의 의지를 다짐하도록 하는 소장 기념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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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하얼빈 정거장에서 이토와 러시아 대신이 만나는 장면

의거 현장의 사진으로 사진 왼쪽 위에 안중근 의사의 사진이 삽입되어 있고, “하얼빈 정거장에서 이등과 아라사 대신이 만나는데 안 의사는 기회를 기다림”이라는 설명이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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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안 의사가 여순 감옥에서 두 아우와 홍 신부를 만나는 장면

1910년 3월 10일경 옥중에서 정근, 공근 두 아우, 빌렘 홍 신부와 면회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이다. “안 의사 중근공이 여순구 옥중에서 두 아우와  홍 신부에게 유언하는 모양(나 죽은 후에 나의 시체는 어느 때든지 나라가 회복되기 전에는 본국에 반장하지 말고 속히 독립의 소식으로 나의 영혼을 위로하게 하라)”는 설명이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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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안중근 의사와 이토 히로부미 

‘대한의사 안중근공’과 ‘통감 일본인 이등박문’의 사진을 상하로 놓았다. 안 의사 사진 좌우에는 ‘捨生取義 殺身成仁 安公一擧 天地皆振’(목숨을 버리고 의를 좇았으며, 몸을 희생하여 인을 이루었네. 안공의 의거에 천지가 다 진동했네)라는 글이 적혀있다. 이 글은 천황제를 반대하다가 대역무도죄인으로 몰려 1911년 1월 24일 처형된 일본인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가 쓴 안 의사를 기리는 글 중 ‘안군(安君)’을 ‘안공(安公)’으로만 바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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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대한의사 안중근공 

안중근 의사의 사진 3가지로, “하얼빈에서 잡히기 전 모양”, “하얼빈정거장에서 잡힐 때 모양”, “여순구 옥중에 있은 지 한 달 후 모양”이라는 설명이 달려 있다. 위의 사진 왼쪽에는 ‘身在三韓名萬國 生無百世死千秋’(몸은 한국에 있어도 그 이름은 만방에 떨쳤네. 살아서 백 년을 못가지만 죽어서 천년을 가리라)라는 시구가 있다. 이는 중국의 위안스카이가 안중근 의사의 순국을 애도하는 시라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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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대한충의사 

중근 의사의 좌우로 충정공 민영환과 헤이그밀사 이준의 사진이 나란히 있다(『권업신문』의 4종은 이 엽서를 포함하지 않은 것일 수 있다)




<사진 하나 더 보기>

양주은의 사진엽서


미국 샌프란스시코 대한인국민회에서 활동하던 양주은이 1913년 3월 27일 안창호에게 보낸 사진엽서이다. 그가 모아서 벽에 붙여놓은 안중근, 장인환, 민영환, 이재명 등의 자료를 함께 사진으로 찍어 개인용 엽서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안중근 의사의 사진은 옥중에서 약간 초췌한 모습으로 단지한 손이 잘 보이게 가슴에 얹은 모습이다. 이 사진은 원래 ‘이등공을 암살한 안중근’이란 제목하에 “한인은 고래로부터 암살의 맹약으로서 무명지를 절단하는 옛 관습이 있다. 오른손(왼손의 잘못)을 촬영한 것이다”라는 비하의 문구가 일본어로 넣어져 엽서로 판매됐다. 그런데 양주은 엽서 속의 사진은 고토쿠 슈스이의 찬사(자료05-1 참고)가 적혀 있는 것으로,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되던 『신한민보』 1910년 3월 30일 자에 게재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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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중근 단지혈서 엽서는 곽영리님, 양주은 엽서는 안수산(Susan Ahn Cuddy)님이 기증해 주셨습니다. 독립기념관의 연구와 전시, 교육을 위해 소중한 자료를 기증해 주신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참고

김호일 편, 『대한국인 안중근 - 사진과 유묵으로 본 안중근 의사의 삶과 꿈』, 안중근의사숭모회, 2010.

윤병석, 「안중근의 사진」,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7, 2010.

이경민, 『경성, 사진에 박히다 - 사진으로 읽는 한국 근대 문화사』, 산책자, 2008.